# 169
169. 지경그룹 진짜 지독하다 (2)
남부증권 회장이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사무실로 박승양이 불쑥 들어왔다.
“이제 나오십니까?”
“뭐야? 내가 늦었다고 뭐라 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일찍 나와 기다리던 참이라 반가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회장실이라고 해도 이미 소파의 상석은 박승양의 차지였다.
상석에 앉은 박승양은 재킷 안쪽 주머니의 단추를 연 뒤에 수표 한 장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제 약속했던 1조 원짜리 수표였다.
“내가 아니라 이걸 기다렸겠지? 이거 현금 처리해야 하는 거 알지?”
“예, 회장님.”
이 인간이 눈치가 이상한데?
박승양은 가늘게 좁힌 눈매로 남부증권 회장을 노려보았다.
“당신, 뭐 잘못한 거 있지?”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그런 게 아니면 누가 그런 건데?”
하얀 와이셔츠 아래로 배가 불룩 나온 남부증권 회장이 곤란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혹시 이명선 과장이 밤사이에 손실을 크게 봤어?”
“예, 그런 모양입니다.”
“그깟 2천억에 손실이 났으면 얼마나 났다고? 내가 가보고 올 테니까 이거 입금증하고 차 좀 준비해 놔.”
“예, 회장님.”
회장실을 나선 박승양은 급하게 이명선의 딜링 룸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는 방 앞에서 독해진 표정을 풀기 위해 고개를 몇 차례나 흔든 뒤에야 문을 열었다.
“나오셨어요? 회장님?”
“어허! 거래할 때는 그냥 앉아서 인사하라니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슬쩍 이명선의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어제는 어땠어?”
“오전에 계좌당 116억의 손실이 있었습니다.”
“흐음. 그럼 두 계좌니까 232억 손실이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2천억 원에서 그 정도 손실 본 거 가지고 뭐 그런 소리를 해? 내가 방금 회장실에 1조 원을 두고 왔거든. 그러니 그런 푼돈 손실에 기죽지 말고 소신껏! 알지? 소신껏! 응?”
이명선이 의아한 눈으로 살필 만큼 정말이지 박승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흐하하하.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그깟 푼돈에 기죽어서야 쓰나?”
위로를 건넨 박승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 회장님이 뭔가 계획이 있으신 것 같아. 그러니 독하게 매달려서 실력과 경험을 쌓아.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이렇게 1조 원이 넘는 거래를 해본 사람 몇 명 없어.”
“예, 회장님.”
“그래. 기운 내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고 콜? 알지? 전화? 콜?”
마지막까지 이명선을 다독여준 박승양은 그 길로 딜링 룸을 나섰고, 복도를 걸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두리번. 두리번.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한순간에 박승양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아오! 232억? 그게 어떤 돈인데! 도대체 거래를 어떻게 하길래!”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누군가 등에 불쏘시개를 꽂아 넣는 것처럼 이를 악문 채 신음을 흘렸다.
“이런 건물 두 채는 살 돈을 하룻밤에 까 처먹어? 에이, 씨! 오늘 잠은 다 잤네, 이 씨!”
탄식을 쏟아낸 박승양은 세면대를 짚고서 커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후우-.”
그런 뒤에 그는 붉어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니, 약속도 안 드렸는데 무슨 선이자를 떼는 것도 아니고, 왜 앞에서 잘라 가십니까? 내가 또 지난번처럼 1퍼센트 드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232억은 채워놓으세요. 진짜 이러는 건 아닙니다. 예?”
그는 턱없이 전에 매달렸던 신을 찾아 원망을 퍼부었다.
**
천중명은 평창동 저택의 대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돌계단으로 올라서 잔디와 정원수, 저 안쪽에 작은 연못이 있는 마당으로 올랐다.
“아버지? 나와 계셨어요?”
“회장이 어쩐 일이야?”
“오전에 리온자동차 인수계약 마쳤습니다.”
“들었어.”
어쩐지 천호득의 얼굴에 화가 잔뜩 붙어 있어서 천중명은 힐끔 그의 뒤편을 보았다.
장만섭은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 얼굴로 있었고, 그 옆에 송달순은 두꺼비가 못마땅한 풀뱀의 눈빛이었다.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홱!
대답 대신 천호득은 장만섭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다고 저 덩치는 눈빛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장만섭이 또 김밥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먹지는 않았을 테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저놈은 곰이야, 곰!”
절규 같은 천호득의 투정이 쏟아져 나온 다음이었다.
“오늘 2층 거실의 귀중품을 망가트렸습니다.”
장만섭이 꺼내놓은 말을 천중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천호득은 심통이 올라왔고, 장만섭은 머리와 꼬리를 뚝 자른 설명을 던지고 있어서 남은 사람은 독오른 풀뱀밖에 없었다.
“총수님께서 2층 방에서 옛날 앨범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셨는데 장 비서가 구석에 있던 상자를 포개놓는 바람에 안에 있던 몇 가지가 망가졌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못 들어간다는 방에 장만섭을 들여보냈다고?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못 드는 상자를 저 곰단지가 불쑥불쑥 들어서 쌓을 줄 누가 알았냐고! 그렇게 무거운 걸 위로 올리면 안에 있는 게 남아나겠어? 그걸 또 3단으로 쌓았다!”
옆집 아이가 심하게 군 것을 이르는 아이처럼 천호득이 갑갑한 속을 마구 터트렸다.
“그래서 정리는 하셨어요?”
“아래 있는 아이들을 부르지도 않고서 앨범을 가져왔길래 저기 작은애를 올려 보냈더니 그 모양이라지 뭐냐? 에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천호득의 눈에 매달린 심통이 염려돼서 천중명은 질문을 꿀꺽 삼켰다.
“마음 푸세요, 아버지.”
“헤휴!”
묘한 숨을 털어낸 천호득이 입맛을 다셨다.
“점심은 먹고 갈 거지?”
“어머니만 뵙고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참. 괜찮으시면 선영 씨와 날을 잡고 싶은데 어떠세요?”
“아무렴 그런 생각도 없이 시계를 사줬겠어?”
어지간하면 천중명에게만큼 좋은 얼굴로 대하던 천호득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툴툴거렸다.
아무래도 좀 더 천호득의 곁에 있는 게 좋을 듯싶었다.
“차 드실래요?”
“그래? 그럴까?”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송달순을 바라보았다.
상자를 옮기기 전에 장만섭이 의논하지 않았던 것이 아쉽고 서운한 눈치였다.
평소 장만섭은 그런 걸 송달순에게 의논할 성격이 아닌데?
송달순이 그런 것을 서운해 할 사이로 발전한 건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송달순을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
허세직은 10시를 코앞에 둔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 회사 바로 앞에서는 서로 불편할 테니 거기 들어서기 전 사거리에 있는 커피전문점으로 나와.
“예.”
답을 한 허선영은 휴대 전화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처럼 사랑을 얻었고, 운명처럼 천중명에게 빠져들었다.
사람인데 왜 천중명에게 미안할 때가 없겠나.
처음 30억 원을 빌려주었을 때, 어머니를 삼성동으로 피하게 할 때, 신문에 엉뚱한 기사가 났을 때, 그리고 허세직이 천중명에게 달라붙었을 때도.
허선영은 핸드백에 전화기를 넣고서 사무실을 나섰다.
“나, 앞에 사거리 커피전문점에 다녀올게요.”
“네, 대표님. 다녀오세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는 천중명을 떠올렸다.
나나 선영 씨가 부모를 선택한 건 아니잖아.
그런 이유로 미안해하지 마.
우리도 행복할 권리쯤 있는 거 아냐?
그녀는 천중명을 믿는다.
그리고 늘 그녀를 바라봐주는 천중명의 눈빛을 의심하지 않는다.
허선영은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서 회사를 나섰다.
사거리 커피점이라고 해야 어차피 한적한 도로에 있어서 차를 세울 곳은 많았다.
승용차에서 내린 허선영은 곧바로 커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여기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 또 뭘 발랐는지 번들거리는 볼, 감색 정장과 붉은 넥타이를 한 허세직이 강압적인 음성으로 허선영을 불렀다.
고개를 살짝 숙인 허선영이 테이블로 다가가자,
“나는 커피가 좋겠다.”
그가 명령이라고 해야 할 말투로 커피를 요구했다.
들어준다, 이런 거.
죽고 사는 것도 아니고.
허선영은 카운터로 걸어가 커피 한 잔과 레모네이드를 주문하고 계산했다.
“대표님.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허선영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직 한가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매니저가 자리로 가 있으라고 알려주었다.
“고마워요.”
인사한 허선영은 테이블로 돌아가 허세직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그게 오랜만에 본 아비에게 할 말버릇이냐?”
허세직의 눈빛을 이기기 위해 허선영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저 눈빛을 피하는 순간 진다.
“흥! 못된 것만 늘었구나.”
어쩌면 사람 눈빛과 입술이 저다지도 무섭고 잔인하게 보이는지.
“차 가져왔습니다.”
분위기를 눈치챈 매니저가 차를 놓아주고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네 태도를 보니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두말할 것 없고, 다음 주에 미국의 고모에게 가. 그리고 당분간 그곳에 있어.”
허선영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본 허세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떤 성격인지 너만큼 아는 사람도 없지. 나와 네 오빠인 광렬이가 곤경에 빠지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으냐?”
대꾸가 없는 허선영을 허세직은 눈을 좁혀서 노려보았다.
**
10분쯤 경영에 관한 교훈을 들려주며 천호득의 얼굴이 어느 정도 풀렸다.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나올게요.”
“바쁜 사람이 왜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해?”
젊은 시절의 천호득을 깨닫는 느낌으로 천중명은 몸을 일으켰다.
“얼른 다녀올게요. 장 비서!”
그런 뒤에 장만섭을 고갯짓으로 불렀다.
마치 조용한 곳에 데려가서 꾸짖으려는 것처럼 천중명의 표정이 묵직해서 천호득과 송달순이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현관에 들어간 천중명은 이은명에게 인사한 뒤에 장만섭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뭐가 망가진 거야? 구할 수 있으면 비슷한 거로 선물해드리려고 하는 거니까 조용조용하게 말해.”
“가장 아래 박스에 놓았던 기계가 망가졌습니다.”
“기계? 골동품이 아니고?”
주위를 돌아본 장만섭이 검지를 입에 세웠다.
뭐야?
눈을 반짝인 천중명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쿵쾅거린 장만섭이 2층 거실 귀퉁이를 손으로 가리킨 뒤에 다시 검지로 귀를 가리켰다.
‘도청기?’
천중명의 입 모양을 본 장만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라도 살아야 했을 천호득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천호득의 인생이 힘겨웠겠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이곳에서 독한 계획을 세우던 천봉서와 천상기의 대화를 들으며 천호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 힘들게들 살았었다.
천중명은 시선을 장만섭에게 주었다.
‘안에 부서졌다는 거는 어디 있어?’
그런 뒤에 고갯짓으로 방을 가리켰다.
천중명의 눈빛을 이해한 장만섭이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었다.
“이 상자입니다.”
그는 문 바로 안쪽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딱딱해 보이는 플라스틱 재질의 상자 안에 다시 종이박스가 담겨 있는 형태였다.
천중명은 먼저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정말 오래돼 보이는 가구, 한쪽에 고서, 포장해 놓은 액자, 그리고 내용물을 알기 어려운 박스들이 벽을 타고 쭉 있었다.
방을 둘러본 천중명은 다시 시선을 문 앞에 있는 상자로 옮겼다.
“안에 기계가 있다고?”
마치 이삿짐업체들이 들고 다니는 꼭 그런 크기였다.
“예. 저는 전혀 짐작도 못 하는 기계입니다.”
바깥을 힐끔 살핀 장만섭이 상자의 위를 당겨서 열었다.
뭐지?
상자 안에 담긴 것은 장만섭의 말마따나 정밀하게 만든 기계처럼 보였다.
오래 묵은 자동차 엔진이나 발전기 형태였는데 하여간 관리를 잘했는지 흠이나 망가진 곳은 당장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뭔지 알아야 비슷한 걸 구해보기라도 하겠는데?
상체를 기울여 기계를 살피던 천중명이 씁쓸하게 웃었다.
체인으로 된 벨트가 헐겁게 늘어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더 기울인 천중명의 눈에 역시나 벨트를 걸었던 한쪽 축이 아래로 구부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야? 이 벨트 늘어진 거?”
“예. 송 비서가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열어보니까 여기 벨트가 연결된 부분이 아래로 처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여쭤본 뒤에 수리하든가 하자. 크게 망가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 천중명은 체인으로 된 벨트를 걸려있는 방향대로 움직여보았다.
끼릭. 끼리릭.
예상보다 매끄럽게 잘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어둠이 천중명을 덮치듯 감쌌고, 빠르게 조여들었다.
분명 벨트를 잡고 돌렸는데?
이 기계가 어둠을 보내는 거야?
천중명의 놀라움을 외면한 채 눈앞이 밝아지면서 가장 먼저 허세직의 모습이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선영 씨?’
“대송그룹에서 정식으로 혼인을 요청할 게다. 천 회장과 윤세계가 결혼하면 이어서 네 오빠와 그쪽 조카딸의 혼인이 있을 테고. 그러니 미국의 고모에게 가 있어.”
“싫습니다.”
허세직의 눈 끝이 독하게 변했다.
“아직도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대송그룹이 사람을 붙여줬어. 어느 날 퇴근길에 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아니면 너의 추문이 세상에 퍼질 수도 있어.”
“나는 중명 씨에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요.”
“대송이 나서고 내가 만드는 데도? 네가 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아. 아무튼, 너에 대한 흉측한 소문이 퍼지는 데도 천호득 명예회장이 너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것 같으냐?”
이것들이 진짜 뒈지지 못해서 몸이 꼬이나?
대송그룹?
오냐! 너희 한번 보자.
천중명이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힐끔 고개를 돌린 허세직이 천중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