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68화 (168/315)

# 168

168. 지경그룹 진짜 지독하다 (1)

신상훈은 대학교 때 배낭여행을 유럽으로 떠났고, 그 여정에서 들렀던 스웨덴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스웨덴의 유명 브랜드인 리온자동차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은 인수팀의 팀장 역할을 맡아 세 명의 경영자들을 상대했다.

“신 팀장님. 우리는 손을 털다시피 내놓았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법무팀의 검토도 거쳤고, 실사 과정에서 추가로 드러나는 부외부채가 있다면 인수대금 5조 원에서 감하겠다고 했는데 왜 시간을 끄는 겁니까?”

칼슨이 완전히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내놓은 항의였다.

“부실의 범위가 애매합니다. 특허권이 있다고 명시되었는데 실제로 해당 인원이 없어서 그 기술을 다시 개발해야 한다면 그런 면이 우리 지경에는 부실이 됩니다.”

“후우-.”

뜨거운 숨을 내쉰 칼슨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에릭슨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지경이 포기한다고 선언하면 리온은 그야말로 망신만 떠는 꼴이 된다.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야 말할 것 없고, 이후에 지경이 인정하지 않는 인수처와는 그 흔한 협약서 하나 작성하지 못한다.

에릭슨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연히 알았다.

외환 거래에 관한 서류가 리온자동차로 왔기 때문이었다.

‘설마 거양자동차에서 받았겠어?’ 하던 참에 ‘더 시푸드’를 나선 에릭슨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하마터면 칼슨은 주먹을 날릴 뻔했었다.

이게 무슨 개망신인지?

거양자동차와의 계약을 앤더슨과 칼슨에게 몰아쳤던 에릭슨은 고개만 처박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인수계약을 서두르시는 건지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신상훈의 질문을 들은 칼슨은 비장한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경그룹 진짜 지독하다.

직원이라면 이런 계약을 오히려 서둘러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지금이야 좀 밀려났다고 하지만, 리온자동차와 같은 브랜드 파워를 가진 회사가 세상에 어디 흔한가.

그 리온을 인수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 자체가 저들에게는 큰 실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텐데, 신상훈을 비롯한 팀장 세 명은 고개가 절로 저어질 만큼 집요하고 꼼꼼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합시다. 지경이 이렇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 인수협상이 잘못되면 우리는 지경이 인정하는 다른 인수처를 찾아야 합니다.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회사의 존폐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단종이 염려되는 자동차를 누가 사겠습니까?”

어차피 알려질 일이고, 이대로 계속 간다면 보도에도 나올 상황이라 칼슨은 주저할 것이 없었다.

“리온자동차의 판매량이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공장은 이미 가동률을 절반 이하로 낮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재고 물량이 계속 쌓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세 명의 팀장에게 말을 건넨 신상훈이 시선을 가져왔다.

“10분만 쉬고 진행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시죠. 나도 진한 커피가 그립던 참입니다.”

신상훈의 제안을 칼슨이 시원하게 받아서 10분간의 휴식이 결정되었다.

리온자동차의 세 명, 지경의 팀장 네 명, 그리고 좌우로 배석한 양측 직원과 법무팀, 회계팀까지, 테이블에 있던 열한 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무팀은 어때요?”

“오전에 검토한 계약서대로라면 인수를 발표하는 것까지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인수대금 5조 원을 실사가 끝나는 시점까지 담보로 잡은 상황이어서 이 정도면 인수계약의 가장 성공적인 예로 남을 겁니다.”

법무팀의 의견을 들은 신상훈은 결심한 얼굴로 휴대 전화기를 꺼내서 번호를 눌렀다.

“본부장님. 리온자동차 인수팀 신상훈입니다.”

그런 뒤에 그는 지금 상황을 빠르게 전했다.

- 5분 정도 시간을 줄 수 있나?

“예, 본부장님. 다만, 휴식 시간을 10분으로 잡아서 그 안에 연락 주시면 진행이 더 매끄러울 것 같습니다.”

- 그렇게 하지.

통화를 마친 신상훈이 다시 회계팀과 특허권의 평가에 관한 의논을 할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인수팀 신상훈입니다.”

- 계약을 체결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맞나?

번호를 모르던 신상훈이 얼른 커피잔을 내려놓고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 회장님. 내부통신망에 보고 드린 내용을 골자로 법무팀이 오전에 검토를 마쳤으며….”

- 신상훈 팀장.

천중명은 신상훈을 부르는 것으로 그의 설명을 잘랐다.

- 내용은 이미 검토했어. 내가 궁금한 건 신상훈 팀장과 그곳에 함께 있는 팀장들이 이 결정을 원하느냐, 아니면 내게 결정을 해달라는 거냐, 그게 궁금한 거지.

신상훈은 더 시푸드에서 보았던 천중명의 눈빛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리온자동차의 인수협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실무자들이잖아. 실무자로서 결정해. 호텔에 가서 기다리게 해? 아니면 여기에서 대강 내용을 들어?”

시 푸드에서 천중명이 했었던 말이었다.

인수대금 5조 원이 들어가고 이후 정상화에 다시 10조 원이 들어가는 사업에 실무자의 의견을 이토록 존중해 주는 회장이 있을까?

“회장님. 저와 이곳 인수팀 팀장들은 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신상훈의 답이 건너간 직후였다.

- 계약 끝나면 문자 하나 보내줘. 보도로 보기 전에.

“알겠습니다, 회장님.”

믿음이 뭔지를 더할 수 없이 증명해주는 천중명의 답이 있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인 리온의 인수계약을 신상훈이 진행한다.

벌게진 눈가와 신상훈의 다부진 답을 들으며 짐작한 모양이었다.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는 세 명의 팀장을 향해 신상훈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0분의 휴식이 끝났다.

불편한 표정으로 커피세트 근처에 있던 칼슨이 동료들과 자리에 앉았고, 신상훈과 팀장 세 명이 맞은편에 자리했다.

양쪽의 회계팀과 법무팀이 함께 앉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경그룹은 오전에 합의한 내용으로 계약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마침내 신상훈의 발표가 있은 뒤에 칼슨은 안도의 숨을 대놓고 내쉬었고, 앤더슨과 에릭슨은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지경그룹은 신 팀장님이 대표로 사인합니까?”

“그렇습니다.”

리온의 법무팀에게 시선을 주었던 칼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신상훈을 향해 시선을 둘렸다.

“진행하시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느닷없는 열기가 피어나서 회담장 실내가 덥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출근하기 무섭게 신상훈과 통화한 천중명이 책상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유진교와 최만호가 들어왔다.

계약이 진행된다는 사실 때문인지 두 사람의 눈가에 묘한 흥분이 묻어 있었다.

“앉으세요. 커피 괜찮으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은 커피 잔을 들고서 소파의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장님을 뵈니까 아무래도 리온의 총괄사장이 되고 싶은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저는 전혀 그런 욕심이 없습니다.”

최만호가 강하게 부인할 때,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드세요.”

천중명이 권하면서 셋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경영이라는 건 참 묘하다.

1927년에 시작한 세계적인 브랜드를 계열사로 둔다고 생각하자 천중명의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설레고 있었다.

아직 가져본 적 없는 자식을 새로 얻는 느낌도 있었다.

앞에 앉은 두 사람의 기분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냐는 질문을 하기 어려웠다.

이러다가도 글자 하나를 두고 다투는 바람에 연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하겠지?

천중명은 스웨덴에서 보았던 신상훈을 떠올렸다.

운동 좀 했나 싶게 생겼는데 조리 있게 하는 설명이나 일을 진행할 때의 모습은 엘리트 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이로텔레콤에 이희철 부사장이 있다면 지경그룹에는 신상훈 같은 명품 팀장이 있는 거지.

유진교, 최만호, 곽대출, 그리고 함께 가서 스웨덴에 남아있는 세 명의 팀장과 두 명의 직원도 있었다.

다른 곳의 인재를 탐낼 게 아니라 기용도 같은 인물이 이중성처럼 선 굵은 임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 회장의 역할이 아닐까.

천중명이 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지이잉.

휴대 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회장님. 계약 체결했습니다. 10분 뒤에 리온자동차에서 공식 기자 회견이 있을 예정입니다.]

천중명은 픽 웃으며 신상훈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들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한 음성이었다.

“고생했어.”

- 감사합니다, 회장님.

“거기 간 세 명은 아무래도 좀 더 있어야겠지?”

-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수고해.”

웃으며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유진교와 최만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천중명의 가슴에 가득 찼다.

뿌듯하고, 자부심도 생겼으며, 또 누군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어서 함께 떠들고 싶을 정도였다.

좋았다. 진짜 좋았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두 사람의 인사를 기분 좋게 받은 천중명이,

“고생 많으셨어요.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이 담긴 당부를 전했다.

**

지경이 리온과 인수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는 내용 없이 속보 형태로 먼저 올라왔다.

“우와-!”

허선영이 인터넷을 확인하는 사이 밖에서 연신 함성이 들렸다.

세계적인 차량 디자이너들과 만날 기회가 많아질지 모른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인물들과 디자인에 관해 의논하고, 어쩌면 브랜드를 상징하는 새로운 로고를 맡게 될 수도 있었다.

허선영은 솔직히 리온자동차의 이름은 들어봤어도 그 위상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축하해요, 중명 씨.’

그러나 천중명이 바랐던 인수가 제대로 마무리된 것이 기뻐서 가슴속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벼운 흥분을 털어내며 올라온 디자인 샘플에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녀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혹시 천중명인가 싶어 빠르게 전화기를 들었던 허선영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는 물끄러미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허세직이 전화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리온을 인수한다는 발표를 보고서 자리를 요구하려고 이러는 건가.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러는 사이에도 휴대 전화기는 계속 몸을 떨었다.

감히 아버지인 내 전화를 안 받아?

그런다고 내가 연락 안 할 것 같냐?

휴대 전화기의 진동이 허세직의 집착처럼 느껴져서 허선영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당당하게 마주 서는 것이 좋았다. 정 무섭거나 두려운 일이 생기면 천중명의 등 뒤에 잠시 숨어도 된다.

그는 허선영에게 그런 남자니까.

통화 버튼을 누른 허선영이 휴대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 나다.

허세직은 어쩐지 강압적인 냄새를 폴폴 풍기는 음성이었다.

- 잠시 봤으면 싶은데?

“죄송한데 제가 바빠서요. 전화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 허! 이제 머리가 컸다는 게냐, 아니면 남편 될 사람을 믿고 그래? 나는 널 그따위로 가르친 기억이 없다.

분명 당당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이상하게 허세직의 음성을 듣거나 얼굴을 대하면 허선영은 뱀 앞에 놓인 쥐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 회사에 있지? 한 시간쯤 뒤에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까 나와. 보고서 이야기하자.

허선영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통화가 끊겼다.

굳어버린 사람처럼 허선영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천중명이 변할까?

그건 사람 마음이니까 허선영이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천중명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 허선영의 몫이었다.

‘중명 씨와 지내는 동안은 이런 일들이 끝없이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중명 씨를 힘들게 할 거야? 이런 일로?’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허선영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시뻘건 목도리를 하고….”

언젠가 삼성동의 집 앞 벤치에서 천중명이 해보라던 욕이었는데 다음에 이어질 ‘조까지 미끄러질’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기운 내자, 허선영. 무리한 요구를 들으면 당당하게 안 된다고 말하자. 해야 해. 할 수 있어.’

허선영이 각오를 다진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녀의 휴대 전화기가 또다시 몸을 떨었다.

액정을 확인한 허선영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중명 씨? 리온자동차 인수를 진심으로 축하해요.”

기분 좋게 웃는 천중명은 웃음이 넘어왔다.

- 선영 씨에게서 그 말을 꼭 듣고 싶었어.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니요. 나도 중명 씨 목소리 듣고 싶어서 축하한다는 전화를 할까 고민했었어요.”

- 그런데 왜 안 해줬어?

“바쁠까 봐요.”

허선영이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건넨 다음이었다.

- 평창동에 가는 길이야. 그런데 어디 아픈 거 아냐? 목소리가 이상한데?

“괜찮아요. 나도 중명 씨처럼 잘해낼 거예요.”

- 느닷없이 뭘?

“뭐든지요.”

허선영의 의지를 칭찬하는 것처럼 듣기 좋은 천중명의 웃음이 또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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