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 뭔가 한 번 더 터트릴 생각인 거지? (2)
유진교와 큰 줄기에 관한 이야기를 끝낸 다음이었다.
“회장님. 리온의 생산기지를 우리나라에 만들 생각이십니까?”
최만호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우선 품질을 확보하고 보죠. 원성의 대상이 되는 잔 고장을 해결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서 누구나 가지고 싶은 승용차와 트럭을 만들었을 때 국내 공장을 생각했으면 싶습니다.”
최만호가 메모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가지만 명심해 주세요. 리온자동차의 국내 생산기지가 생긴다면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가격이 가장 낮아야 합니다.”
반발이 있을 줄 알았는데 최만호는 묵묵하게 메모만 했다.
“대송 그룹이 어떻게 차량을 생산하고 판매하는지 참고하는 것은 말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 자동차는 동일 고장 3회라든가, 엔진, 미션 종류의 안전과 직결되는 고장은 전량 새 차량으로 교환하는 규정을 준비하세요.”
결국, 메모하던 최만호의 고개가 들렸다.
“임시번호일 때는 몰라도 새로운 번호판을 장착하면 세금이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법규로 제품을 교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실장님.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법규나 기존의 테두리나 관습에 안주하시지 말라구요. 많이 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고객에게 어떤 만족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최만호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힘들겠지? 지칠 수도 있을 테고?
메모하는 그의 모습은 그런 느낌이었다.
“두 분은 좀 불행하신 거죠. 남들이 안 가던 길을 헤쳐 나가야 하니까요. 지경리온이라는 새로운 브랜드가 국내시장에 안주하길 바란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 회장님.”
그나마 단단하게 들리는 최만호의 답에 천중명과 유진교가 가볍게 웃었다.
“지경화장품의 미라클을 참고하세요. 세계적인 제품은 반드시 소비자가 원하고, 거래를 희망하는 유통업자들이 나옵니다. 지경은 그렇게 성장해야 합니다.”
천중명의 말이 끝나자 유진교와 최만호가 보고서를 덮었다.
“어쩌면 리온자동차의 협상이 오늘 중으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최소 한 달에서 두 달은 걸린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칼슨이 거의 모든 사항을 결정한다는 보고였습니다. 기존에 협의했던 지분 매수 금액만 확정하면 바로 경영을 넘기고, 투자 계획은 여유를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랍니다.”
혹시 에릭슨이 5백억 원을 받았던 것이 들통났나?
그렇다면 칼슨의 독자적인 결정을 이해할 만도 했다.
천중명은 ‘더 시푸드’에서 보았던 칼슨의 눈빛을 떠올렸다.
프라이드 강한 그가 동료의 비리를 알았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회장님. 혹시 인수가 확정되면 리온자동차의 책임자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둔 인물이나 방법이 있으십니까?”
“칼슨과 의논해서 현지 법인은 당분간은 지금 체제로 가고, 우리 쪽에서 총괄사장과 임원을 발령 내는 선으로 결정하시죠. 실무자야 인수팀이 그대로 들어가면 되니까요.”
말을 건넨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최만호를 보았다.
“총괄사장으로는 우리 최 실장을 임명할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예에?”
이렇게 놀라는 최만호는 또 처음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다들 부러워할 임명인 것 같은데요?”
“회장님. 앞으로 세계적인 지경그룹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국내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이게 진심이야,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거야?
천중명이 고개를 돌린 곳에서 유진교는 알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싫으시면 제 마음에 드는 인물을 추천하시던가요.”
“예,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길었던 회의가 끝났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이 있어서요.”
“그럼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유진교와 최만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허세직은 오랜만에 강남구청 앞의 한정식집으로 들어섰다.
주택을 개조한 게 역력한 대문,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와 그걸 지키는 소나무, 그리고 이 냄새까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권력의 향기를 채워 넣는 사람처럼 허세직은 남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진짜 삶이지.
저녁마다 이런 곳에서 보자는 사람들이 줄 서 있고, 식사가 끝나면 질펀하게 놀고서 주머니 두둑하게 집으로 향하는 삶 말이다.
허세직이 현관 앞의 작은 돌계단을 올라가자 문이 안으로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의원님.”
“오랜만이네?”
“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알까 모르겠다.
진짜 품격 있는 곳은 자동문이 아니라 사람이 열어준다는 거 말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약을 확인할 필요 없이 허세직은 매니저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한복은 매니저급 이상, 그 아래는 감색 유니폼에 어깨에 걸어 뒤로 묶는 하얀색 앞치마를 두른다.
매니저는 복도 가장 안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허 의원님이십니다.”
허세직이 안으로 들어서자 맞은편에 있던 눈매 날카로운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허세직 의원님? 윤성일입니다.”
퉁퉁한 몸매에 덩치가 있었고, 볼살이 늘어진 윤성일이 허세직을 향해 손을 내밀어서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앉으십시오.”
“허허허.”
허세직이 앉기 무섭게 매니저가 차와 시원한 물수건을 주고는 옆에 앉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식사하지.”
“예, 회장님.”
매니저를 물린 윤성일이 차를 권해서 허세직은 손을 닦은 후에 잔을 들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 요즘 한가합니다.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고민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말씀을 주십시오.”
“흠.”
편안하게 말하라는 데도 윤성일은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번거로운 절차가 남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경이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랬지요.”
마치 리온자동차의 인수에 관여한 사람처럼 허세직의 답은 분명하고 확실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대송그룹은 자성자동차와 함께 지금껏 열악한 우리 국내 시장을 일궈온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기둥이자 산증인입니다.”
허세직을 살피며 뜸을 들이던 윤성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리온의 브랜드를 우리 대송자동차에 얹는다면 국내시장에서의 평판은 물론이고, 해외시장에서의 판매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사위를 통해 지경그룹과 협력할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어봐라, 이런 말씀이신가요?”
말을 마친 뒤 침묵하는 윤성일에게 허세직이 건넨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편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제 여식과 천 회장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음-.”
이제야 윤성일이 원하는 바를 알겠다는 것처럼 허세직은 신음 같은 대꾸를 내놓았다. 그다지 화나거나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른 분은 몰라도 허 의원님이라면 말씀이 통하지 않을까 싶어서 외람된 뜻을 전했습니다.”
“허허. 사업하시는 분들은 생각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니까요. 그러니 그룹을 일구신 분들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허 의원께서 결단을 내려주시면 저 역시 그만한 것으로 갚겠습니다. 아드님과 제 조카딸의 혼사를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허세직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윤성일이 얼른 말을 이었다.
“요즘은 쓸데없는 눈들이 많아서 다른 걸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식당 앞에 승합차를 한 대 두었습니다. 성의로 사과를 좀 담아두었는데 대략 스무 상자 정도 되나 봅니다.”
허세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거로 바닥을 다지시고, 제 조카딸과 혼인을 마치면 아드님께 작은 기업을 하나 맡겨볼 참입니다. 대송그룹 계열사에 들어가는 모든 식자재를 담당하는 곳이라 그리 헐하지는 않습니다.”
“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천 회장도 그렇고, 이미 머리가 커 버린 자식이 제 말을 들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의원님께서 결심만 하신다면야 또 방법이 안 있겠습니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윤성일은 옆의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집어 허세직 앞으로 내밀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시키시면 모두 해낼 직원입니다.”
명함에서 고개를 든 허세직의 시선을 윤성일은 피하지 않았다.
“신임회장이 날뛰고 있어서 당장 지경그룹이 빛나 보이기는 합니다. 의원님께서 지경을 사돈으로 선택하실지, 우리 대송을 사돈으로 선택하실지 현명하게 판단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윤성일은 허세직의 시선에 밀리지 않는 눈빛으로 원하는 바를 꺼내놓았다.
명함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던 허세직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제 아들놈과 회장님의 조카딸이 혼인해서 사돈이 되고, 다시 회장님의 따님과 천 회장이 부부의 연을 맺으면 지경그룹과 제가 남이 되는 건 아니군요.”
“듣기만 해도 흐뭇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 가족인 의원님이 총리가 되시도록 대송도 힘을 더하겠습니다.”
“남은 것은 천 회장의 선택이군요.”
“제 여식이 못나지 않았으니 자리만 잘 만들어준다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세상을 모르고 설치는 친구들이 뜨거운 맛을 보고 나면 고분고분해지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시선의 허세직을 향해 윤성일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의원님께서 결단을 내리시면 준비해 봐야지요. 어떻게 이제 식사를 주문할까요?”
“사돈 될 분의 청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허허허.”
“듣기만 해도 흡족한 말씀입니다.”
허세직을 따라 웃은 윤성일이 테이블 옆의 버튼을 눌렀다.
**
천중명은 참 오랜만에 직접 차를 몰았다.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여기요.”
조수석에 앉은 허선영이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을 벗겨서 천중명의 입에 넣어주었다.
잔잔한 음악에 더해진 S600의 계기판 조명이 허선영을 좀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느낌이었다.
“이제 전화 드려.”
“그럴까요? 집에 안 계시면 어쩌죠?”
“우리 둘이서 드라이브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러네요.”
미소를 단 허선영의 얼굴을 보며 천중명은 힘들었던 하루를 숨결에 실어 뱉어냈다.
“엄마? 저요. 어디세요?”
질문을 던졌던 허선영이 약간은 짓궂은 표정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엄마, 있잖아요. 우리 지금 안성으로 가는 길인데 한 20분이면 도착해요. 중명 씨랑 같이요. 예.”
그렇게 통화한 허선영이 휴대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너무한다고 뭐라 하세요.”
“미리 알려드리면 준비한다고 바쁘셨을 거잖아.”
도로의 굴곡을 따라 S600의 차체가 묵직하게 출렁인 다음이었다.
“저 도로에서 오른쪽이요.”
길을 알려준 허선영이 천중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하면 허리 안 아파?”
“차가 크긴 해요.”
상체를 세운 허선영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웃었다.
“왜?”
“이럴 때 보면 중명 씨 참 멋없는 거 알아요?”
울퉁불퉁한 도로를 따라 핸들을 튼 천중명의 질문에 허선영이 웃으며 건넨 답이었다.
행복하다는 감정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
어느 정도의 행복이냐가 문제이긴 하겠다만, 천봉서와 천상기, 강승애와 오지은을 보면 돈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저 집이에요. 저기 파란 지붕이요.”
허선영이 가리키는 집을 향해 천중명은 크게 방향을 틀었다.
거실과 방은 말할 것도 없고, 현관의 주황색 등까지 불이 모두 켜져 있었다. 집 앞의 도로에 차를 세운 천중명이 허선영과 함께 내렸을 때, 개 짖는 소리와 눅눅한 냄새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입구로 걸어가는 동안 현관이 열렸다.
그리고, 송순주가 스웨터를 걸친 모습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준비 하나 못했고, 집도 지저분한데. 너는 피곤한 분을 이렇게 귀찮게 하면 어떻게 해?”
당황하는 송순주의 모습이 귀엽다면 좀 이상한데 천중명의 시선에는 그렇게 보였다.
“엄마, 이거.”
과일을 내민 허선영을 밉지 않은 눈으로 흘겨본 뒤에야 송순주와 셋이서 집으로 들어갔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받침대, 딱히 비싸 보이지 않는 도자기, 화분, TV가 있는 거실의 소파에 셋이서 앉았다.
“이렇게 살아요. 저녁은?”
“먹었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리기 싫어서 이렇게 온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송순주를 달랜 천중명은 허선영을 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괜찮으시면 저희 날을 잡을까 하거든요. 평창동에 말씀드리기 전에 어머님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순주는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냥…. 예쁘게 봐줘요.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엄마, 왜 울어?”
고개를 모로 돌린 송순주를 안으려던 허선영이 오히려 먼저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요, 회장님.”
“언제까지 그렇게 부르실 거예요? 서운합니다.”
코를 훌쩍인 송순주가 상체를 다가간 허선영을 안고 등을 어루만졌다.
“행복해야 해. 알지?”
허선영의 눈가를 닦아주며 송순주가 건넨 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