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 뭔가 한 번 더 터트릴 생각인 거지? (1)
박태곤은 돌아온 부회장 박영철과 이희철 부사장, 서병구 전무를 모처럼 기대에 찬 얼굴로 맞았다.
“어땠어? 천 회장은 봤어? 사업제안도 내놨고?”
박영철에게 질문을 던졌던 박태곤은 마지막에 이희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천 회장이 우리 부회장에게 꽤 성의를 보였습니다.”
“그래-에?”
반갑고 의심스러운 감정이 뒤엉켜서 박태곤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박태곤은 아들과 임원 두 명을 소파에 앉힌 뒤에 천중명과의 면담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다.
“관심을 보였다?”
“예, 회장님. 그룹발전본부에서 검토가 끝나면 바로 연락해 주겠다고 했는데 반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희철 부사장의 말에 박태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래. 이런 역할을 해줘야지!”
그런 뒤에 그는 아들인 박영철을 모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보았다.
“이제 천 회장에게 연락해서 접대라는 걸 해.”
“예, 회장님.”
뭔가를 말하려던 이희철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보았던 천중명 회장은 접대 따위에 판단을 흐릴 사람이 아니어서였다.
“나가 봐. 고생들 했어. 부회장은 좀 남고.”
“예, 회장님.”
서병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이희철은 고개를 숙이고 회장실을 나섰다.
천중명은 분명 사업의 개요를 한눈에 알아들었다.
게다가 이희철이 설명한 사업이 어떤 모습으로 커질 것인지를 한눈에 알아본 눈치였다.
고글이 무료 와이파이 망을 준비한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고.
그런 회장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소문은 돈다.
지경의 그룹발전본부 직원들이 일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모두 듣게 되고.
결재만 통과하면 전권을 보장해주는 회장이라니?
기용도 부사장이 10분 만에 2천억 원의 연구비를 결재 받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희철은 잠시 부럽고, 또 잠깐은 서글펐었다.
매출이 다르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를 사업을 담당 임원의 말과 열정, 그리고 가능성을 보고 결재하는 건 매출과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부사장님?”
서병구 전무가 부르는 소리에 이희철은 얼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보며 이희철은 씁쓸하게 웃었다.
**
급한 결재를 마친 천중명은 곽대출과 안신우 부장, 주인영 과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노크와 함께 들어온 세 사람을 향해 천중명은 소파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앉아요. 우리 뭐 시원한 거 좀 주고.”
책상에서 일어선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에게 음료를 부탁했다.
“고생들 많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곽대출이 대표로 점잖은 답을 내놓았을 때 음료가 들어왔다.
“마십시다.”
천중명의 권유에 다들 음료수를 마신 다음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최근에 지경신문고에 올라온 메일들의 후속조치가 없거나 늦게 처리되지? 뭐가 문제야?”
곽대출이 있어서 말이 좀 편하게 나왔는데 안신우와 주인영은 그걸 책망이라고 여겼는지 바싹 긴장한 얼굴이었다.
“처음과 달리 신문고에 모함이나 혹은 작은 일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시작은 곽대출이 했다.
적당하게 다듬은 머리스타일, 흰 와이셔츠, 점잖은 넥타이까지, 주인영의 관리를 받더니 놈은 이제 사무직 임원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현장 조사를 해보면 고발한 임원의 잘못을 부풀렸다거나 혹은 없는 사실을 적어놓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 외는 증명하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 점도 문제입니다.”
이번 답변은 안신우 부장이 했다.
“증명하기 어렵다는 건 뭐야?”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일이라든가, 녹화는 있는데 녹음이 없어서 사실 확인이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암행감찰을 하라는 거 아니었어?”
“죄송합니다만, 그룹발전본부의 임직원 이름과 얼굴이 모두 알려져서 그 점도 어렵습니다. 특히 곽대출 이사님은 용인과 그 외 현장에서 워낙 활동적으로 움직이셔서 얼굴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상황입니다.”
하긴, 대형망치를 들고 설치는 곽대출의 얼굴을 누가 잊어버릴 수가 있겠나.
천중명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긴 한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데이터가 축적되는 거겠지. 인원이 필요하면 보강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
천중명이 지시를 마친 다음이었다.
“두 사람은 먼저 내려가고, 곽 이사는 조금 더 있다가 가는 거로 하지.”
“예, 회장님.”
천중명은 안신우와 주인영을 먼저 내려 보냈다.
“힘들지?”
“얼른 중국 출장이나 갑시다, 회장님아.”
천중명의 질문을 곽대출은 엉뚱한 말로 먼저 받았다.
“좋은 제도를 만들어주면 좀! 그걸 유익하게 쓰면 안 되나? 지경신문고를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모함하는 메일이 올라오니까 요새는 메일을 열 때 의심부터 든다니까, 회장님아!”
“유익하게라는 말도 써?”
“에이, 집무실이라 욕을 할 수도 없고! 이 회장님을 그냥 확!”
천중명이 웃자 그제야 곽대출도 마음이 풀린 얼굴로 따라 웃었다.
“어쩐지 지경신문고 처리 내용이 확 줄었다 싶더라.”
“전에는 신문고에 메일이 올라오면 해당 부서나 임원에게 전화나 질의 메일을 보내서 해결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요즘은 열 개의 억울함이 올라오면 그중 일곱, 여덟 개는 임원이 억울하다고 난립니다.”
“그래도 어쩌겠냐? 억울한 두, 세 사람을 위해 일해야지?”
“그래얍지요.”
별거 아닌 대답에 둘이서 또 웃었다.
“우리 인터넷 쇼핑몰하고 뱅킹인가 그거 하시나, 회장님?”
“계속 준비 중이다. 왜?”
“떼인 돈 받는 거나 맡아볼까 하고 그러지.”
“미친놈.”
둘이서 그렇게 한 10여 분 시간을 보냈다.
곽대출은 안에 쌓였던 것들이 풀리는 얼굴이었고, 천중명은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박승양 회장 있잖으셔? 그 양반 좀 관심 가져 주시지? 노선을 바꿔서 나를 들들 볶는데 죽을 맛입니다. 매몰차게 대할까 싶다가도 언제 연락 주실까 하고 목이 빠진 모습을 보면 안 되기도 했고.”
“그건 내가 알아서 챙길게.”
“예, 회장님.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곽대출을 내보낸 천중명은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명선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조 단위의 거래를 감당했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솟아오르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하는 극적인 순간도 경험했다.
아무튼, 천중명의 덕분에 그토록 식구들을 괴롭히던 빚을 시원하게 정리한 이명선은 남은 돈을 개인계좌에 넣고서 파생상품 거래에 투자했다.
3억4천만 원 출발이었다.
첫날은 홀랑 2천만 원을 털렸는데 밤새 그 돈이 아까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잤다. 살면서 2천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다음 날은 미친 것처럼 치솟는 지수에 기대서 6천만 원의 수익이 있었다.
전날 손실 2천만 원을 제하고도 4천만 원의 이익이었다.
믿기기나 한가?
3억4천만 원을 이틀 굴려서 4천만 원의 수익이 계좌에 꽂혔다는 것이?
그날도 이명선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이렇게 열흘만 벌면 4억이고, 한 달이면 22일 거래하니까, 아파트 큰 거로 옮기고….
그 모든 꿈과 희망을 품은 채 이명선은 다음날 좀 더 과감하게 주문을 꽂아 넣었고, 깔끔하게 1억 원을 날렸다.
인생 뭐 있나, 후유.
안 되는 사람은 뭘 해도 안 되는 거지.
그녀가 원금을 복구하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릴 때였다.
박승양이 홀연히 딜링 룸으로 들어왔다.
“잘 지냈어? 이 과장?”
“안녕하세요? 회장님?”
“내가 좋은 일 하나 가져왔지.”
그러면서 박승양은 1천억 원짜리 계좌 두 개를 통쾌하게 개설했다. 하나는 천중명 회장의 지시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박승양 회장의 판단에 따른 입금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박승양은 매일 남부증권에 출근하다시피 나와서 이명선의 곁을 지키거나 아니면 그날의 수익과 손실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갔다.
털어먹어도 울고불고하면 끝나는 3억4천만 원과 천중명, 박승양이 넣어준 2천억 원은 어감부터 좀 다르잖나.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은 치와와를 키우다가 성질머리 더러운 비글을 맡게 된 것쯤 되었다.
게다가 비유는 좀 이상한데 대형버스를 달랑 한 번 연수해 주고, “이제부터 혼자 운전해서 영업해!”라고 지시받은 느낌이라면 적당하겠다.
방향도 모르겠고, 얼마를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는 더더욱 모른다. 하긴, 그걸 다 알았다면 3억4천만 원으로 얼마든지 인생 꽃피었겠지만 말이다.
천중명의 지시 없이 포지션을 직접 결정하는 거래, 그리고 실제로 피 같은 돈이 직접 들어왔다 나가는 거래를 하면서 이명선은 본인의 실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따박따박. 한땀한땀.
이명선은 독하게 매달렸고, 작은 수익에도 철저했다.
“흐음.”
이명선의 옆에서 모니터를 보던 박승양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지 마라니까! 얼른 거래에 집중해, 얼른.”
그리고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남부증권 회장실로 걸었다.
“뭐해?”
“예? 결재 서류가 좀 있어서요.”
“이리 와서 앉아봐.”
“예, 회장님.”
머리가 살짝 벗어지고 살집이 있는 남부증권 회장이 얌전하게 박승양의 앞에 앉았다.
“내가 또 1조를 한번 넣을까 하거든.”
“예에?”
“수수료 어떻게 할 거야?”
“파생상품 거래를 하시면….”
“하시면?”
“제가 업계 최저 수수료로 맞춰드리겠습니다.”
“파생상품 양도세는?”
“회장님. 그건 저희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던 박승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 뭐. 내가 내일 가져올 테니까 이명선 과장에게 맡겨.”
“예, 회장님. 어? 벌써 가십니까?”
“한알저축은행 들러서 돈이 잘 있나 확인해야지.”
“예! 다녀오십시오.”
양손을 옆구리에 붙이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회장을 뒤로 한 채 박승양은 남부증권을 나섰다.
“무서운 양반이네.”
건물을 나선 박승양은 고개를 젖혀 남부증권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한 번 더 터트릴 생각인 거지? 이전의 거래를 통해서 간을 키워놓고, 지금은 1천억 원짜리 거래로 훈련시키는 게 모두 뭔가 큰 건이 있을 거란 암시 아니겠어?”
천중명의 눈빛을 떠올린 박승양은 몸서리를 쳤다.
3조 원이 넘는 돈을 박승양에게 맡기고 돌아보지도 않는 강단이라니!
돈이 많다고 그럴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건 누구보다 박승양이 잘 안다.
심지어 명동 사채업자나 그가 아는 기업가 중에는 통장에 몇천 원 남은 것이 다른 이름으로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히 어마어마한 게 있어.”
박승양은 땅 저쪽에서 바람에 실려 풍겨오는 야릇한 돈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5조 원이 훈련밖에 안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거래. 그걸 위해서 내게 돈을 맡기고 이명선을 단련시키는 거지. 천 회장이라면 그러고 남지.”
흐뭇한 얼굴로 박승양은 한알저축은행을 향해 걸었다.
저녁은 그 인간들이 사주는 양장피와 짜장면으로 해결하면 되겠다.
**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유진교와 최만호가 천중명을 찾았다.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오세요?”
“회장님께서 방향을 정해주셨으면 싶은 내용입니다.”
유진교와 최만호는 확실히 평소보다 많은 결재판을 들고 있었다.
셔츠의 손목을 걷어붙인 차림으로 셋이서 소파에 앉았다.
인터넷 은행의 자본금, 대출 규모, 방식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그것만으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지치는 일이다. 지겹기도 하다.
연필을 들고 사업계획의 항목이 새롭게 나올 때마다 의견을 주고받은 뒤에 큰 줄기를 정하는 일은 늘 그렇게 사람의 진을 빼낸다.
“본부장님. 직원 스카우트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어떤 경우에라도 고객의 과실을 묻지 않도록 방법을 좀 더 보강하세요.”
“예, 회장님. 그렇더라도 은행법이 규정한 수준에 맞추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유진교의 질문에 천중명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상대는 국내 은행이 아닙니다. 인터넷이 좀 더 활성화되고 와이파이 망이 공공재의 형태로 제공되면 지금처럼 국내시장에 안주하는 기업들은 절대 견디지 못합니다.”
천중명은 늘 생각하던 내용을 다시 한 번 꺼내놓았다.
“이미 해외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세상입니다. 앞으로 국내에서 미국의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신용대출을 받는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유진교와 최만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중명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직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 쇼핑사이트가 국내에 지사를 만들면 그때 가서 어떤 법으로 막겠습니까? 미국과 중국의 유통업체만도 못한 그놈의 고객과실을 따지지 않는 업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확실한 서비스입니다.”
“단단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명심하세요. 지경이 무너지면 경제가 휘청인다는 말? 지금 20대가 30대가 되는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됩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품질과 서비스만이 살길입니다. 우리가 노리는 시장은 역으로 미국과 유럽, 중국이어야 합니다.”
“예, 회장님.”
“다음은 뭔가요?”
“리온자동차의 국내 판매에 관한 보고입니다.”
“아직 인수도 안 됐는데요?”
“큰 틀만 잡아주시면 나머지는 진행되는 대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숙제를 잔뜩 안기는 가정교사 같은 모습으로 유진교가 보고서를 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