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3)
박영철은 정확하게 한 시간 뒤에 도착했다.
“회장님. 자이로텔레콤 박영철 부회장 일행이 제1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천중명은 몸을 일으켜 부속실 직원을 따라 접견실로 걸었다.
접견실 문은 직원이 열어준다.
천중명이 들어서자 박영철과 함께 두 명의 임원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출장 잘 다녀오셨습니까?”
박영철의 말과 태도는 공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임원들 앞에서 친분이 있음을 증명하고픈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던 참이었다.
이왕이면 후련하고 시원하게.
“박 부회장은 왜 갑자기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해요?”
“예?”
“박 부회장이 그러니까 괜히 나까지 어렵잖아요. 함께 오신 분들 때문에 그런가?”
“아닙니다, 회장님.”
심장에 감동을 퍽 하고 쳐 맞은 표정으로 박영철이 임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 자이로텔레콤 부사장 이희철, 전무 서병구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입니다. 앉으세요.”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천중명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박 부회장께는 좀 특별한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게 있나?”
“이번에 새로 올라온 유자차가 괜찮습니다, 회장님.”
어떠냐는 의미로 시선을 돌린 천중명에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고 박영철이 얼른 답을 했다.
부속실 직원이 나간 다음이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박 부회장 아니었다면 약속을 잡지 않았을 겁니다. 공항에서 시간에 쫓겨 서운했던 점도 있고요.”
음료가 나올 때까지 대화는 그렇게 천중명과 박영철의 친분을 알려주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차를 한 모금씩 마신 다음이었다.
“설명하겠다는 이야기는요?”
천중명의 요구를 받은 박영철은 이희철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서병구 전무가 사업계획서를 네 부 꺼내서 전달했고, 이희철이 그중 한 부를 천중명이 보기 좋도록 앞에 놓아주었다.
“회장님의 시간을 오래 방해하지 않도록 첫 페이지에 개요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첫 장을 넘긴 천중명은 이희철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우리 자이로텔레콤은 이미 2년 전부터 압축 코덱을 추가로 압축하는 기술을 연구했고, 이번에 성과가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동영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거 봐?
천중명은 사업계획서에 시선을 떨구고 천천히 내용을 살폈다.
“새로운 압축 기술을 이용하면, 내비게이션의 실시간 길 안내에 사고나 도로공사 영상, 선택한 경로의 CCTV 영상을 바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별거 아닌 설명이었다.
그런데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전하는 이희철의 설명, 태도, 눈빛이 사업아이템만큼이나 천중명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용은 대강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수익은 어떻게 창출합니까? 공연히 광고를 붙였다가는 와이파이 망을 무료로 개방한 의미가 퇴색될 텐데요?”
“그 점에 관해 지경그룹과 자이로텔레콤이 전략적 제휴를 맺고 각 기업의 화상회의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을 구상했습니다.”
“새로운 압축 기술로 데이터 잼을 해결한다고 쳐도 기존에 보급된 화상회의 시스템에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컴퓨터의 OS에도 프로그램이 담겨 나오는 상황인데요?”
“중요한 회의는 보안이 필요합니다. 자이로텔레콤의 시스템을 이용하면 보안을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자이로의 압축 기술을 지경그룹이 원하는 서비스에 장착하는 것으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다시 한 번 사업계획서를 천천히 살폈다.
이 정도 기술이라면 욕심은 난다.
반대로 지경의 연구소를 독촉하면 2년 안에 만들 것 같기도 했다.
“회장님. 지경의 능력이라면 압축 기술쯤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천중명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이희철의 설명이 있었다.
“해외에서 고글이 와이파이 망 개방을 목표로 테스트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워드 프로그램처럼 우리나라의 데이터 시장을 지킨다는 큰 틀에서 봐주십시오. 그런 이유로 이번 전략적 제휴의 시한을 10년으로 제한하겠습니다.”
“흠.”
10년은 좀 길다.
천중명이 시선을 들었을 때, 박영철은 멀뚱멀뚱한 얼굴이었다. 이런 부회장을 챙겨서 사업을 진행하는 이희철의 심정은 어떨까?
“원하시면 전략적 제휴 기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천중명은 이희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흔 후반쯤으로 보였다.
지경전자 기용도 부사장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회장님. 기업의 화상회의 시스템을 저희가 관리하게 해주십시오.”
박영철을 바라보는 천중명의 시선이 안타까웠던지 그는 사업을 진행하고자 하는 열정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 사업의 실무 책임자가 이희철 부사장님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자이로텔레콤이 오래 준비했던 사업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만족할 성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사람이 탐난다는 말뜻을 천중명은 처음으로 실감하고는 웃었다.
“부사장의 설명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룹발전본부에 넘겨서 검토한 뒤에 답변 드리지요. 오래 걸리지 않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차 드세요.”
“예, 회장님.”
세 사람에게 차를 권한 천중명은 잔을 들었다.
천중명을 만난 것에 기뻐하는 박영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희철, 눈치를 살피기 바쁜 서병구가 차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좋은 사업을 가지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저는 리온자동차 같은 회사를 인수하시는 회장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속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아예 고개를 숙이기로 작정한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박영철은 저자세로 일관했다.
저런 모습이 이희철과 서병구에게 어떻게 보일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그럼 빠른 시간 안에 검토해서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웃으며 일어난 천중명은 먼저 박영철과 악수했고, 이어서 이희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뒤에 서병구 전무와도 인사를 마쳤다.
인연이 된다면 언제가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
하나 명심해야 할 것도 있었다.
천중명의 모습이 흔들리는 순간, 지경의 인재를 누군가 이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접견실을 나서 집무실로 걷던 천중명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고 온 게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아쉬움을 두고 왔다고 답할 수는 없어서 다른 대꾸를 건넨 천중명은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볕이 있으면 그늘이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대송그룹은 느닷없이 고민에 휩싸였다.
대송물산의 부회장으로 있는 윤병지는 이틀째 삼성동의 대송그룹 본사로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소식은?”
고개를 숙인 그가 상체를 세우기도 전에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직 없습니다.”
“거기 앉아.”
개인적으로는 큰형과 막냇동생이라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룹 회장과 계열사 부회장이라 직급의 차이가 워낙 컸다.
게다가 큰형 윤성일과 막내인 윤병지의 모친이 달라서 어차피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이렇게 되면 지경의 리온자동차 인수가 확정적이라고 봐야겠지?”
“그렇습니다, 회장님.”
“젊은 친구가 물불을 안 가리니 이거야 원.”
탄식 같은 혼잣말을 쏟아냈던 윤성일이 따지듯이 시선을 들었다.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겠어? 리온자동차의 인수금액에 웃돈을 얹어서 우리가 재인수한다든가?”
“제가 본 천중명 회장은 그런 제안에 흔들릴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아직 미련이 남은 윤성일을 보며 윤병지는 고민했다.
저 성격에 반드시 천중명에게 제안할 게 분명했다. 뒤는 불을 본 듯이 망신당한 후에 씩씩대는 모습일 테고.
윤세계의 그 성격이 빤히 저 윤성일에게서 왔을 테니 더 말해서 뭐하겠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윤병지는 윤세계와 천중명, 그리고 박영철과 송중대의 이야기를 윤성일에게 본대로 전했다.
“아니! 그런 꼴을 보고도 가만있었어!”
“죄송합니다.”
“크흠.”
배다른 막내에 계열사 부회장의 처지인 윤병지가 이미 그룹 회장 자리에 앉은 천중명에게 맞서기는 어렵다.
그걸 빤히 아는 터라 못마땅한 심정을 토해낸 윤성일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천호득 명예회장을 만나보면 어때?”
무슨 말인가 하는 윤병지를 향해 윤성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막말로 망가진 집안 딸 아니야? 내가 나서서 천호득 명예회장과 합의하면 끝나는 일 아니냐고. 지경이 재계 3위면 우리는 재계 5위 그룹이야.”
“최근에 천호득 명예회장이 신임회장의 행보에 관여 안 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운 양반을 중간에 끼우면 될 것 같은데?”
윤병지는 고개를 숙이고는 답을 하지 않았다.
천중명이 과연 윤성일의 뜻대로 얌전히 윤세계를 받아들일까?
그가 본 천중명이라면 윤세계의 따귀를 갈겨서라도 다시는 그런 말이 안 나오게 할 사람이지, 절대 허선영을 외면할 인물이 아니었다.
“회장님. 그러지 마시고 제가 천중명 회장을 만나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나서? 지경은 절대 국내에 생산시설을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을 거야? 이미 리온자동차를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어! 허가만 받으면 국산이 된다니까.”
“판매와 생산은 승인 자체가 다르지 않습니까?”
“당장이야 어렵겠지. 그렇지만 세계적인 브랜드를 가져왔는데 계속 생산시설 허가를 막을 수야 있나? 그리고 말이지.”
윤성일이 아무도 없는 좌우를 둘러본 뒤에 입을 열었다.
“막말로 지경이 미쳐서 우리가 생산하는 디젤 차량을 걸고넘어지면 불편해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더구나 리온자동차 하면 안전의 대명사 아닌가. 그걸 국내 생산해서 우리와 비슷한 가격에 판매해 봐?”
지금이라도 품질을 개선할 생각을 해야지, 엉뚱하게 지경을 막아낼 방법을 연구하다니.
윤성일의 말을 들으며 윤병지는 속이 터져나갈 것처럼 답답했다.
“안 되겠어. 내가 천호득 명예회장을 만나서 천중명 그 친구를 사위로 삼는 게 가장 확실해.”
하마터면 찌푸릴 뻔한 인상을 윤병지는 억지로 참았다.
아버지나 딸이나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은지.
게다가 윤성일은 윤세계의 의사 따위 아예 묻지도 않았다.
“아니면 허세직이지? 그 양반에게 적당하게 후원하고 그 모자란 딸아이를 단속하라고 하든가. 양쪽을 동시에 움직이는 게 가장 효과가 좋겠지?”
결국, 윤세계가 따귀를 맞아야 끝나겠구나.
윤병지는 뒷일이 걱정됐으나 역시 입을 열지는 못했다.
**
허세직이 눈 끝을 비틀며 기다려도 천중명의 전화는 없었다.
이렇게 나왔다 이거지?
어천수가 잡범 수준으로 나오는 보도와 그 뒤에 정안규의 연락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애걸복걸 매달렸던 위기를 넘긴 건 분명해 보였다.
허세직은 정치인이다.
그 바닥에서는 구렁이로 인정받는 고수이기도 했다.
‘정안규가 나서기는 어려웠을 테고, 송평길과 천중명 사이에 뭔가 협정이 있었겠지?’
짐작하기에는 스웨덴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허세직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천중명도 알게 된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는 전화 메모를 두 번이나 남겼는데 연락이 없다는 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허세직은 뜨거운 숨을 거푸 내쉬었다.
딸년이 아비를 우습게 아니까 사위 놈도 그런 게 아닌가 말이다. 우선 허선영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확실히 다져놓는 게 먼저였다.
허세직이 전화기를 드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공교롭게 그 직후에 진동이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여보세요?”
- 허세직 의원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어디 신가요?”
- 대송그룹 회장님 부속실입니다. 회장님께서 통화를 원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래요?”
상대방의 말을 들은 허세직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지금 말입니까?”
- 네, 의원님.
“알았습니다. 연결해 주시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통화 대기음이 울리는 동안에 허세직은 눈을 좌우로 굴리며 대송그룹 윤성일에 관해 아는 것들을 떠올렸다.
- 허세직 의원님? 대송의 윤성일입니다.
“아, 예. 허세직입니다.”
마치 바쁜 일을 처리하고 있다가 받는 것처럼 허세직의 음성은 태연하고 뻔뻔했다.
- 의논할 것이 있어서 그런데 저녁에 잠시 시간이 되십니까?
“혹시 어떤 일로 그러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허허허. 서로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번 뵙는 게 좋겠군요.”
지금 허세직의 눈빛은 아예 번들거리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