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2)
아버지와 어머니는 확실히 다르다.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천중명을 바라보는 천호득과 이은명의 시선을 보며 알 수 있었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천중명을 보이고픈 천호득과 긴 비행에 피곤하지는 않을지, 지친 상태에서 무리한 것은 아닌지를 염려하는 이은명의 시선은 그렇게 달랐다.
천중명이 휠체어를 밀었다.
그 뒤로 이은명의 손을 잡은 허선영이 따랐고, 누구나 돌아보는 장만섭과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송달순이 걸었으며, 다시 지경백화점 우상학 사장과 매니저가 함께 걸었다.
“뭐 하러 사람들 많은 곳을 돌아?”
“아버지와 어머니, 선영 씨 시계 하나씩 사고 싶었거든요.”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지경그룹 회장으로 첫 출장 다녀와서요. 월급 받은 것도 있고요.”
천중명은 상체를 기울여서 천호득의 귀에 고개를 가져갔다.
“아버지가 조언해 주셔서 리온자동차를 인수할 수 있었거든요. 그거 감사드리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만 사드리면 어머니가 서운하실 거잖아요.”
“흐헤헤헤헤.”
백화점의 사장과 매니저가 얌전히 따라오고 있어서 매장 직원은 물론이고, 손님들도 혹시 하는 시선으로 천중명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럴 거면 위층으로 가져오라고 하거나 문을 닫은 뒤에 편안하게 쇼핑을 해야지.”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그렇게 특유의 웃음을 웃던 천호득이 “별!”하는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고집 심한 영감님의 모습이어서 하여간 표정 하나는 진짜 변화무쌍했다.
“어느 거로 하실래요?”
“그럼 저리로 가.”
천호득이 가리킨 매장은 바쉐론 어쩌고 하는 시계 브랜드였다.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매장에 들어간 천중명은 천호득의 시선과 같은 높이로 자세를 낮췄다.
“뭐를 하지?”
백화점 1층 물건을 쓸어 담듯이 구입한다던 천호득이었다.
그런데 의아할 정도로 영감님은 기대와 행복이 피어난 눈빛에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얼굴로 시계들을 살폈다.
진열대 맞은편에서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손을 마주 잡고서 천호득의 선택을 기다리는 앞이었다.
“회장은 어느 게 마음에 들어?”
“여기 이거 어떠세요? 지도 그려진 거요.”
“그래?”
천호득이 시선을 들기 무섭게 매장 직원이 지적한 시계를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마음에 드세요?”
“흐헤헤헤. 살면서 자식에게 처음 받아보는 시계인데 마음에 들지.”
약해져서 그럴까, 아니면 나이를 먹으면서 감성이 풍부해져 그런 걸까.
아이처럼 웃는 천호득을 보며 천중명은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였다.
나쁜 인간들.
그렇게 천호득의 자리와 재산을 탐냈으면서 지금까지 이런 시계 하나 선물해준 적이 없었나.
여자 연예인에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주식까지 넘기던 인간들이?
“이거로 하지. 아, 놔둬! 차고 갈 거니까.”
매장 직원이 앞으로 내민 시계를 천중명이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천호득의 왼손에 채워주었다.
“잘 어울리네요.”
“그렇지?”
천호득의 심정을 알아챈 것처럼 이은명은 붉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회장도 하나 골라. 내가 사줄게.”
“저는 다음 출장에서 하나 살게요. 어머니와 선영 씨 시계 사고 떡국 먹으러 가세요.”
천중명이 공손하게 거절했는데 어디 천호득이 그런 말 받아들이는 사람인가?
“저기 뚜르비옹 있지?”
“예, 총수님. 마침 한 세트가 있습니다.”
“그게 흔해졌나?”
“아닙니다, 총수님. 지금껏 세트로는 국내에서 두 세트밖에 판매된 적 없습니다.”
“그거로 가져 와.”
천호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장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이은명과 허선영이 시계를 고르는 사이 부산하게 움직인 매장 직원이 엄청나게 커다란 케이스를 가져와 그 안에서 다시 시계 케이스를 꺼내서는 진열대 앞에 두었다.
시계 매장의 입구를 장만섭과 송달순, 백화점 사장과 쇼퍼가 막다시피 서 있었다.
“총수님. 뚜르비옹입니다. 희소성도 있어서 회장님께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이며 가격을 확인할 뻔했다.
한 개에 3억5천만 원이 조금 넘는 시계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어때?”
“아버지. 이러시면 제가 선물한 게 초라해지잖아요.”
2천7백만 원짜리 시계를 선물하고 초라하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현실이 이런 걸 어쩌겠나.
“나쁘지 않네. 회장에게 좋아. 이거 세트로 있다고 했지?”
“마침 꼭 한 세트 있습니다. 국내에는 이 세트가 마지막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이거로 하지.”
“예, 총수님.”
어떻게 76억 원어치의 쇼핑을 했을까 싶었던 의문에 천호득이 답을 보여준 느낌이었다.
“아버지 시계 사러 왔던 건데요.”
이미 매장 직원들이 부지런히 포장하고 있어서 더는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당황했던 허선영이 천중명과 천호득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은명의 시계를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회장이 어쩐 일이야? 평생 이런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 조언 덕분에 결과를 얻은 것과 첫 월급 받은 게 있어서요. 그래서 나왔던 겁니다.”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이야.”
그러면서 그는 당장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꺼냈다.
“지금 내가 사준 시계가 별거 아니구나 하고 느껴질 때가 있으면 주변을 돌아봐. 회장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받는 대접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불만스러울 수 있으니까.”
천호득은 오랜만에 보는 총수의 눈빛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회장의 사람들을 모함하는 놈들이 나타나지. 종류도 다양하고 심지어 증거를 가져오는 놈들도 생겨. 그걸 무조건 외면하지 마.”
시계를 선택했던 이은명이 이쪽을 보았다가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사람은 변해. 내가 믿던 사람들의 변한 모습을 무조건 외면해서는 안 돼. 확인한 뒤에 돌아올 기회를 줄지 잘라낼지를 고민해야지.”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말을 마친 천호득은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자세를 낮춘 천중명의 어깨를 다독여준 천호득이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저녁 먹자.”
“어머니와 선영 씨 시계 고르고요.”
“우리 다 골랐어.”
천호득의 독하게 변한 눈빛 앞에서 이은명이 얼른 답을 내놓았다.
송달순이 전표를 챙기는 사이 천중명은 천호득의 휠체어를 밀어 지하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였다.
천호득이 떨리는 왼손을 비틀어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천중명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눈과 볼이 웃고 있는 것도 보였다.
정말 왜 그렇게들 살았니?
저렇게 좋아하는데 시계 하나쯤 선물하면서 살지.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홍콩물고기와 정동방의 사건이후에 양서평은 모처럼 통쾌한 얼굴로 저녁을 먹었다.
검은색 젓가락으로 돼지고기 조림을 집어 든 그의 뒤에 조양회가 흐뭇한 얼굴로 서 있었다.
“메모리 문제는 잘 되고 있지?”
“스마트폰 업체들이 총재님께 매달려서 애걸복걸인 모양입니다.”
“그것참. 목숨 걸고 사는 우리보다 그깟 기계 부품 만드는 사람들이 큰돈을 버는 세상이라니!”
입에 넣은 돼지고기를 씹던 양서평이 홱 시선을 돌렸다.
“미라클은?”
“요구조건이 두 가지인데 그 부분만 보장해 주면 초도 물량이 넘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보따리상들이 풀어놓은 제품 때문에 입소문이 붙었고, 벌써 유사제품이 나왔다고 합니다.”
음식을 씹던 양서평은 고량주 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었다.
“적어도 내가 관리하는 강남에서는 유사품이 나오지 않도록 관리해. 혹시 강북에서 나오면 바로 알려주고. 이참에 그동안 당했던 것을 싹 갚아줄 테니까.”
“예, 형님.”
혀로 이 사이를 닦아낸 양서평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식탁에서 물러났다.
“천 회장과의 연락은? 교활한 가등섭이 그쪽에 연락하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
“오늘 한국에 입국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거양자동차에도 은혜를 한번 베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양서평은 고개만 돌렸다.
“한국의 지경그룹에 부탁해서 승용차 부분의 기술협력을 끌어내겠다고 총재께 말씀드리십시오.”
“오!”
감탄했던 양서평이 삽시간에 눈빛을 바꾸었다.
“그랬다가 지경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거양자동차가 독자적으로 지경에 접촉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 미리 언질을 넣어두어야 거양이 총재님만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이거 봐, 하는 표정으로 양서평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양 입장에서는 원래 원하던 기술을 가져와서 좋고, 지경은 인수에 들어가는 초기 비용을 해결해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네. 그거 아주 묘수네!”
양서평이 크게 만족한 얼굴로 식탁에서 일어섰다.
**
떡국을 먹고 헤어진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모처럼 삼성동의 탄천을 걸었다.
“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얼른 침대에 들어가고 싶어.”
천중명의 말투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던 허선영이 음흉한 눈빛을 보고는 “풉!”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의 서늘함에 웃음이 녹아든 다음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뭔데요?”
“의원님 말인데.”
천중명의 입에서 허세직의 이야기가 나오자 허선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치에 대한 야욕을 놓지 못하신 것 같거든. 벤처사업부를 순수하게 이끌기보다는 아무래도 정계 복귀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것 같고.”
“중명 씨.”
이야기를 다 듣지 않은 상태에서 허선영이 천중명을 불렀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세요. 어릴 적부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치는 마약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중명 씨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원망하거나 바라는 거 없어요.”
허선영이 간혹 보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생각을 밝혔다.
“중명 씨에게 미안해요.”
“내게 그럴 건 없어. 이해해줘서 고맙고.”
허선영의 등을 다독여준 천중명은 계속 탄천을 따라 걸었다.
“어머니는 언제 오신데? 말씀 없으셨어?”
“결혼날짜 받으면 오신다던데요?”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평창동에 말씀드릴게. 괜찮지?”
“난 지난번 양평에서 이미 대답했었잖아요.”
그렇게 허선영과 함께 걸으며 천중명은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탄천의 양쪽에 켜놓은 주황색 등이 물살 위에서 아름답게 피어있는 밤이었다.
**
다음 날부터 천중명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늘 올라오는 결재서류와 보고서, 거기에 기용도와 이중성이 올리는 중국 진출 보고, 리온자동차의 협상 중간보고, 신제품 개발 진척상황 등 읽고 검토할 일들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았다.
천중명이 한창 서류를 살필 때였다.
부속실 직원이 새로운 메모를 가져다주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나?”
“예, 회장님. 시원한 음료는 어떠세요?”
“괜찮아.”
직원의 권유를 사양한 천중명은 메모를 펼치고 내용을 살폈다.
허세직의 전화,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이 남긴 간곡한 당부, 그리고 그 외에 늘 있는 협회의 면담요청 등이 쭉 적혀 있었다.
“박영철? 너는 반성 좀 했어?”
천중명은 박영철의 이름을 보며 혼잣말로 물었다.
송중대가 부산으로 발령 난 상황에서 자이로텔레콤의 매출이 뚝뚝 부러지고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속이 시커멓게 탔을 것만은 분명했다.
네게는 기회를 한번 준다.
천중명은 인터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이로텔레콤 박영철 부회장 연결해 줘.”
[네, 회장님.]
지시를 내린 천중명이 잠시 창을 돌아본 뒤였다.
[회장님. 박영철 부회장 2번에 연결했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보고가 있었다.
“여보세요?”
- 천 회장님. 박영철입니다. 이번 출장에서 거둔 성과를 먼저 축하드립니다.
전화기를 받기 무섭게 간과 쓸개를 완전히 꺼내 버린 듯한 박영철의 낯간지러운 말이 연달아 들렸다.
- 회장님. 먼저 이전의 거만했던 모습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천중명의 용서가 없으면 어디 오지에라도 발령이 나나 싶을 정도로 박영철은 절절한 음성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 우리 자이로텔레콤의 제안을 설명드릴 기회를 간청 드립니다. 이번에 지경이 개방한 와이파이 망을 이용해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사업입니다.
“이용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라면 오히려 우리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을 텐데요.”
- 뵙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한 번쯤 기회를 주기로 했던 참이었다.
“알았습니다. 언제가 편합니까?”
- 말씀하시면 지금이라도 찾아뵙겠습니다.
시간을 끌 이유도 없었다.
“지금 본사에 있으니 이리로 오세요. 혹시 사업계획을 함께 들었으면 하는 부서가 있으면 미리 말해주고.”
- 아닙니다. 우선 회장님께 설명 드리고 괜찮다고 하시면 실무진 협상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고작 와이파이 망 개방에 이토록 애걸복걸할 거면서, 뭐 그리 잘난 척을 한 건지 당최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천중명은 왼손에 걸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억5천만 원이 넘는 이 시계가 당연하게 느껴지면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다.
“정신 똑바로 차려, 천중명.”
천중명은 시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혼잣말을 뱉었다.
이따위에 정신이 팔리면 손목과 발목이 잘린 곽대출을 볼지 모르고, 허선영이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칠 수도 있으며,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재산을 놓고 천중명이 죽기를 바랄지 모른다.
천중명이 공식적으로 타는 10억 원이 넘는 독일산 승용차, 그 외에 일상적으로 타는 S600, 관공서를 드나들 때 타는 국산 리무진과 대형승용차까지.
그 모든 것들이 편안함과 자만을 흩뿌리며 천중명이 타락하길 간절히 바라는 느낌이었다.
“도깨비가 꼴통회장이 되는 거라니까. 박영철이나 송중대처럼 되는 건 자존심 상하잖아.”
천중명은 픽 웃은 뒤에 보고서에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