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63화 (163/315)

# 163

163.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1)

유진교, 지경의 인수팀과 악수를 마친 리온자동차의 세 사람이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후-.”

숨을 내쉬었던 신상훈이 천중명을 보고는 아차 하는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그 모습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내일 오전에 내가 말한 조건대로 기본계약을 먼저 체결하고 협상이 시작되면 허술한 곳이 없는지 끝까지 살펴.”

“맡겨주십시오, 회장님.”

됐다.

중국이 펼쳐놓은 진흙탕에서 금을 찾아냈으니 이제는 직원들이 그 금을 값어치 있게 만들도록 지원해주면 된다.

“내일 오전에 기본계약을 발표한다고 치고, 그때가 한국은 몇 시쯤 되지?”

“대략 새벽 1시에서 2시일 겁니다.”

“본부장님과 나는 비행기 안에 있겠네요.”

유진교에게 말을 건넨 천중명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빛을 안은 바다가 일렁이는 몸통 위로 스톡홀름의 어둠을 펼쳐놓은 밤이었다.

세상일이란 참 묘하다.

홍콩물고기와 정동방의 사건이 양서평에게 달려가더니 그게 또 스웨덴의 리온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도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홍콩물고기를 좀 살살 다뤄줄 걸 그랬나 싶어서요.”

아무리 유진교라고 해도 지금 천중명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자, 그럼 일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볼까? 인수협상은 신상훈 팀장이 이끄는 거로 하고.”

그래서인지 유진교는 떠나기 전에 챙겨야 할 일을 꺼내 들고 있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보도방송은 지경그룹의 리온자동차 인수협상에 관한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인수협상이 결렬되더라도, 다음 인수협상자를 정하기 전에 반드시 지경그룹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요. 이런 계약이 일반적인 겁니까?]

[편을 가르는 것 같아서 좀 이상한데요. 솔직히 지경그룹이 갑의 위치라 다행이지, 을의 입장이었다면 비난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앵커의 질문에 M&A 전문변호사가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리온자동차는 왜 이런 불리한 조항을 넣어가면서 지경과 협상을 시작했을까요?]

[글쎄요. 속된 말로 약점을 잡혔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요. 실제로 그럴 일은 없다고 봐야 하니까 결국 천중명 신임회장이 직접 날아가서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리온자동차에서 천중명 회장의 체면을 세워주었을까요?]

앵커가 엉뚱한 질문을 건네자,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죠.]

변호사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료에 시선을 주었다.

**

누구보다 먼저 내용을 전해들은 곳은 지경의 그룹발전본부였다.

[스웨덴의 리온자동차, 지경과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계약 체결.]

[지경의 승인을 받아야 새로운 인수협상자를 지정하는 방식으로 협상 진행.]

[리온자동차 인수, 남은 것은 지경의 결단뿐.]

속보형태로 떠오른 기사 제목이었다.

[지경그룹 신임회장의 거침없는 행보. 세계적인 브랜드를 품다.]

이어서 천중명의 활약을 담은 기사가 연달아 떠오르고 있었다.

일찌감치 출근한 최만호는 새롭게 밝아오는 창을 향해 섰다. 스웨덴은 오후일 테니 한국의 지난밤에 또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또다시 발전본부 직원들을 충원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한다.

최만호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다 말고 빙그레 웃었다.

세계적인 브랜드인 리온자동차를 계열사로 둔 지경그룹의 기획실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그가 자부심 넘쳐 웃는 이유였다.

**

공항에 도착한 천중명과 유진교는 브리지를 나서기 무섭게 방송카메라와 마주쳤다.

“회장님! 리온자동차의 인수가 거의 확정적인데요. 이렇게 계약이 진행된 것에 대해 소감 한마디만 부탁합니다.”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어떤 제안을 하셨기에 그런 결과를 얻으셨습니까?”

입국장을 나서야 기자들이 있을 줄 알았던 천중명은 결국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송카메라의 플래시가 하얗게 천중명과 한 걸음 뒤에 있는 유진교를 비추었고,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지의 신상훈 팀장과 그룹발전본부의 직원들이 애써주었고, 유진교 본부장과 최만호 기획실장, 지경전자의 기용도 부사장, 지경화장품의 이중성 대표가 협력해주었습니다.”

촤자자작. 촤자자자자작.

“그 외에도 발전본부 직원들의 고생이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순간에 천호득 명예회장님의 가르침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천중명의 말이 끝난 다음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정을 정해서 본사에서 따로 발표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유진교가 능숙하게 기자들을 다루며 천중명의 앞길을 열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입국장을 나서자 부속실과 비서실 직원들이 천중명과 유진교를 감싸고 준비한 차까지 안내했다.

천중명이 뒷좌석에 앉은 뒤에 문을 닫을 때까지 카메라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

천호득은 서재에서 TV를 통해 천중명의 인터뷰 장면을 보았다.

“흐헤헤헤헤.”

그의 첫 반응은 특유의 웃음이었다.

속보형태로 나온 방송이니 천중명은 지금쯤 인천공항에서 빠져나오는 길일 게다.

오늘은 바쁠 테고, 내일쯤 얼굴을 볼 수 있을까나?

천호득이 TV의 볼륨을 막 줄인 참이었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르.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어셋을 귀에 건 천호득이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버지, 중명입니다.

“뉴스 봤어.”

- 벌써 나왔습니까?

“보도가 그렇지.”

흔들리는 고개 안에서 흐뭇해하는 천호득의 미소가 피어났다.

- 저녁에 떡국 드시러 가시면 어떻습니까?

“회장이 피곤하지 않겠어?”

- 아버지 뵙고 떡국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아서요.

“흐헤헤헤헤.”

오늘 천호득은 여러 번 웃는다.

- 회사에 들어가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이어셋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큰애야!”

“예에, 총수님.”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는데 천호득은 벌써 장만섭을 부르고 있었다.

**

본사에 들어온 천중명이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평소처럼 부속실 직원들이 모두 서 있다가 천중명을 맞았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미숫가루가 생각나는데 준비해 줄 수 있나? 최만호 실장도 불러주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집무실에 들어간 천중명은 책상의 뒤로 걸어가 커다란 창 앞에서 서서 눈앞에 펼쳐진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13시간 비행의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오늘 해야 할 일을 처리해야 했다.

계열사가 하나 더 늘었다.

천중명이 픽 웃고 났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유진교와 최만호, 그리고 미숫가루를 준비한 부속실 직원이 함께 들어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혼자 더 애쓰셨을 것 같은데요. 앉으세요.”

소파를 가리킨 천중명은 두 사람과 함께 앉았다.

**

그룹발전본부에 있던 곽대출은 또다시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도착하기 무섭게 최만호가 불려 올라갔으니 급한 일을 의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회의가 끝나야 목소리라도 들을 텐데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연락은 없었다.

많이 피곤하겠지.

내일 봐도 되고.

“후.”

숨을 내쉰 곽대출이 모니터에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벌떡.

곽대출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해? 바빠?”

“아닙니다, 회장님.”

“한 시간만 빼주지.”

“예?”

천중명이 고개로 밖을 가리키는 것을 본 곽대출은 급하게 재킷을 들고서 문을 나섰다.

주인영을 포함한 발전본부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곽 이사와 둘이서 한 시간 정도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비서실과 부속실 직원들은 그냥 있어.”

“예, 회장님.”

함께 온 부속실 직원에게 지시한 천중명은 곧장 발전본부 입구를 향했다.

멈칫.

그러다가 걸음을 멈춘 천중명이 주인영을 바라보았다.

“주인영 과장.”

“예, 회장님.”

“잘 지냈지?”

“예, 회장님.”

픽 웃어준 천중명은 그 길로 곽대출과 함께 발전본부를 나섰다. 천중명이 두 사람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이 이상 보여주기도 어려운 장면이었다.

**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잠실의 선착장으로 향했고, 둘이서 벤치에 앉았다.

따끈한 커피와 담배도 챙겼다.

찰칵.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 다음이었다.

“안 피곤하셔?”

“피곤하다.”

“그럼 좀 쉬지.”

“너랑 이렇게 있는 게 가장 확실하게 쉬는 거지. 다음번에 출장 갈 일이 있으면 함께 가자.”

곽대출이 히죽 웃은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스웨덴에서 있었던 일부터 어둠이 덮쳤던 장면, 그리고 리온과의 협상에 중국의 양서평이 도움을 주었던 것까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세상 참. 아니? 눈알을 파낸 일이 어떻게 그렇게 흘러가나 그래?”

“내 말이! 나도 딱 그런 생각 했었거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곽대출의 탄식 역시 천중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한 번은 만나야 하겠네?”

“그렇지.”

“중국 출장은 내가 모셔야 하지 않겠어, 회장님?”

곽대출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웃었고,

“도깨비에게 꼭 어울리는 출장 아니겠냐?”

천중명의 답이 있었다.

**

허세직은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천중명에게 연락하기도 전에 어천수에 관한 보도가 비틀어지면서 송평길과 정안규가 위기에서 빠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만 서둘렀으면 좋았을 것을, 천중명이 스웨덴 출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시간을 끄는 동안 정안규가 좀 더 궁지에 몰리길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야비한 놈들.’

정안규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지역구 놈들의 연락이 싹 끊긴 것도 괘씸했다.

그토록 전화를 해대던 놈들이 말이다.

손안에 거의 다 들어왔던 물고기가 마지막 순간에 퍼덕이며 물로 뛰어든 꼴인데, 뭐 또 돌이켜 보면 크게 손해는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 천중명이 만들어 주는 벤처사업부를 맡아 사회에 봉사하는 이미지를 만들면 그만 아니겠나.

리온자동차의 이야기가 뉴스마다 떠오르며 천중명이 화제의 중심에 서고 있는 것도 좋았다.

허세직은 비릿하게 웃었다.

정치는 이미지 싸움이다.

아들의 잘못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천중명의 세련되고, 강단 있고, 추진력 있는 이미지를 살짝 뒤집어쓰면 우매한 대중은 또 “아! 허세직 의원이 참 아깝긴 했지!” 하면서 표를 던져줄 것이 분명했다.

우선 지경그룹에서의 입지를 확실히 해놓고 그 뒤에 정안규의 반응을 보면서 행동하면 되겠다.

허세직은 표정을 갈무리한 뒤에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천중명의 부속실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부속실입니다.

“나 허세직이오. 회장님 자리에 계신가?”

- 외부에 계십니다.

“그럼 전화 좀 부탁한다고 전해주시오.”

- 네, 메모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허세직은 묘한 느낌에 입맛을 다셨다.

그의 본능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었다.

**

곽대출과 본사로 돌아온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을 불렀다.

“조금 편하게 쇼핑을 하고 싶은데 전에 총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지?”

“총수님께서는 늘 지경백화점을 이용하셨습니다. 미리 연락해두시고 영업이 끝난 시간 이후부터 따로 쇼핑하셨습니다.”

영업이 끝난 다음에 쇼핑을 한다고?

천중명의 시선이 부속실 직원은 오히려 의아한 눈치였다.

“유명 매장의 경우에는 총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워낙 구매하시는 금액이 크셔서요.”

그래서인지 부속실 직원이 설명처럼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런 날이면 총수님께서 얼마나 구매하셨지?”

“1층에 있는 수입 브랜드의 보석과 시계, 위층의 수입 브랜드의 외투를 전부 구매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또 유명 브랜드의 가방까지 전부 매입하셔서 다음 날 매장 매니저들이 백화점 직원 전체 회식을 했었습니다.”

천중명이 기가 막혀 픽 웃은 다음이었다.

“총수님께서는 그 보석과 시계, 가방의 대부분을 임원들께 선물하셨습니다. 집에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습니다.”

“흠.”

책상에 깍지 낀 손을 올린 천중명은 짧게 고민한 뒤에 시선을 들었다.

“미안한데 그날 총수님께서 얼마나 지불하셨는지 금액을 기억하나?”

“대략 76억 원으로 기억합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니까 그냥 지경백화점에 연락해서 오늘 쇼핑과 지하 매장의 떡국을 먹기 위해 총수님 모시고 간다고만 전해줘.”

“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답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76억 원?”

혼잣말을 뱉은 천중명은 잠시 고개를 들어 부속실 직원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훑다시피 사서 던져주는 선물이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할까?

비싸고, 유명한 브랜드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아니면 총수가 준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는 건가?

“어렵네.”

스웨덴 출장에서 느꼈었다.

그룹회장의 검소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옷차림과 시계, 어떤 수준의 방에 묵느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도 배웠다.

얼른 더 확실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공부해야 했다.

겉모양이 아닌 천중명을 인정할 때까지.

“76억은….”

확실히 그런 돈은 좀 더 좋은 곳에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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