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 기분을 좀 바꿔볼까요? (3)
간편한 차림으로 객실을 나선 천중명은 일행과 함께 호텔이 제공하는 독일산 600S 승용차에 올랐다.
천중명의 지시대로 다들 편안한 차림이었다.
특히, 천중명과 유진교는 한눈에도 명품임을 알아볼 수 있는 브랜드의 티셔츠와 바지, 캐주얼 재킷차림이어서 호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조수석에 신상훈, 운전석 뒤로 유진교가 앉았는데 ‘워터프런트’ 호텔은 600S를 세 대나 준비하는 것으로 천중명을 예우했다.
“도착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지?”
“15분입니다, 회장님.”
신상훈이 답을 하는 옆에서 스웨덴의 운전기사가 긴장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더 시푸드라는 레스토랑을 예약했습니다. 5층 건물인데 5층을 전부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어둠과 불빛이 공존하는 스톡홀름으로 천중명이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신 팀장은 그곳에서 식사해 봤나?”
유진교의 나직한 질문이 있었다.
“안식구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이어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들르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저녁을 함께하자고 할 걸 그랬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신상훈의 대꾸가 어쩐지 “말씀만으로도 끔찍합니다.”라고 들려서 천중명은 차창을 향해 소리 없이 웃었다.
팀장의 부인이 회장과 저녁을 먹으려면 끔찍하기는 하겠다.
천중명은 불빛을 머금은 바다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 거양자동차의 확실한 포기 선언이 나오지 않아서 신상훈과 팀장들에게 숨겨진 내용을 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려 뽑은 인수팀 팀장급들이었다.
천중명에게 숨겨놓은 뭔가가 있다고 짐작하는 눈치였으나 당장은 묵묵하게 천중명과 유진교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만큼 리온자동차를 반드시 인수해서 유능한 직원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리온의 세 사람이 분명히 온다.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꽉 움켜쥐어서 넘겨줄 테니 멋지게 만들어.’
천중명은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삼켰다.
지금은 깔리는 어둠처럼 묵직하게 기다려야 할 때였다.
**
점심을 먹고 난 송중대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다가 말고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 비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기 전무님. 회장님께서 전무님을 부산의 문광수산 항만 현장으로 발령내셨습니다.”
위쪽에 있는 회장실을 바라본 것처럼 시선을 들었던 송중대가 황당한 얼굴로 비서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
“회장님께서 직접 전화하셨습니다. 들어오시는 대로 바로 문광수산으로 출발하시랍니다. 싫으면….”
“싫으면 뭐?”
“사직서 제출하시라고….”
말끝을 두 번이나 흐린 비서가 고개를 떨군 다음이었다.
“와, 나 이거? 아니? 무슨?”
허리에 손을 올린 송중대는 기가 막힌 심정을 연달아 토해낸 뒤에 “푸후-.”하는 숨을 길게 뿜었다.
“가라 이거지? 그것도 부산으로?”
비서는 답이 없었다.
“거기서 나더러 뭘 하라는 건데? 그것도 말씀하셨어?”
“죄송합니다, 전무님. 부장으로 발령 나셨습니다.”
“아, 나 진짜 이 씨…!”
여전히 허리춤에 손을 올린 송중대가 아랫입술을 고약하게 말아 넣고는 씩씩거렸는데 사실 비서는 죄가 없었다.
“그래! 아예 바다에 가서 죽으라는 거네? 지금 가라고?”
“예, 전무님.”
“부장이라며! 부장으로 가라며! 그런데 왜 전무라고 불러! 왜!”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송중대가 목이 갈라지도록 고함을 질렀으나 비서는 답이 없었다.
**
천중명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더 시푸드’ 5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의 맞은편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와이드비전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풍광이 멋졌다.
오른쪽에 뷔페스타일로 음식이 진열되었고, 그 왼편으로 세 개의 테이블이 입구에 하나 중간에 하나, 다시 통유리 바로 앞에 하나가 놓여 있었다.
5층을 전부 사용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입구에 서서 기다리던 지배인이 직원들과 함께 공손한 태도로 천중명 일행을 맞았다.
“회장님. 이곳은 원래 메뉴에 있는 요리를 주문하는 곳입니다. 다만, 5층을 전부 사용하는 조건으로 우리 돈 1천만 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음식을 이렇게 준비했답니다.”
천중명과 유진교의 옆을 따라 걸으며 지배인이 음식을 설명했고, 그걸 신상훈이 전해주었다.
“새우를 찐 뒤에 굴소스로 조리한 요리입니다.”
그렇게 테이블을 돌며 넓적하게 생긴 게, 피조개와 비슷해 보이는 조개, 여러 가지 종류의 생선 요리를 보았고, 이어서 고기와 튀김 요리들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보신 음식을 자리로 가져다 드리고, 스테이크 종류와 몇 가지는 주문을 하시는 대로 바로 만들겠답니다.”
대략 10분 정도를 둘러본 천중명은 고맙다는 간단한 인사를 전하고는 전면 유리쪽의 테이블에 자리했다.
서빙 직원들이 가장 먼저 가져온 것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친 나무형상의 철제 모형이었다.
“저 가지마다 요리를 올려놓을 거랍니다.”
신상훈의 설명이 있은 뒤였다.
실제로 서빙 직원들이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철제 모형의 사이사이에 능숙하게 올려주었다.
먼저 냄새가 좋았고, 이어서 배도 고팠다.
“나쁘지 않네. 듭시다.”
천중명이 앞에 있는 접시에 생선 요리를 덜어오는 것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생선을 가른 천중명은 살점을 포크에 올려서 입으로 가져갔다. 기름에 튀긴 생선에 새콤한 소스를 부어놓았는데 향이나 맛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데요?”
“제 입맛에도 적당합니다.”
역시나 생선 요리를 입에 넣은 유진교의 반응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지경의 인수팀이 함께하는 저녁이었다. 평소에는 엄한 모습의 유진교가 농담을 건네면서 분위기도 좋았다.
그런데도 천중명이 보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생선 요리에 끼얹은 소스처럼 테이블 주변에서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뭔가 있다고 믿는 팀장들과 두 명의 직원들이 천중명과 유진교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보았다.
숨겨진 것을 기대하는 팀장들의 시선 앞에서 천중명은 태연하게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 저녁은 오래도록 생각나겠는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유진교가 의미심장한 답을 내놓은 직후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5층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중명이 먼저 시선을 들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테이블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
신상훈이 놀란 소리를 내고는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세 명의 남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리온자동차의 결정권자인 앤더슨, 에릭슨, 칼슨이었다.
누군가 세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뚝 자른 것처럼 5층의 공간이 정적에 휩싸였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 봐.”
“예, 회장님.”
신상훈이 얼른 몸을 일으켰고, 테이블에 앉은 팀장들과 직원 두 명이 ‘저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표정으로 천중명과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스웨덴에서는 그래도 유명인인 모양이었다.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아는 척을 하며 세 명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랬다.
신상훈이 돌아오는 것을 본 천중명은 다리에 올려놓았던 냅킨을 들어 입가를 찍어냈다.
“먼저 회장님께 사과드리고 그 뒤에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답니다. 식사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호텔에 가서 기다리겠답니다.”
천중명은 시선을 들어 레스토랑 입구에 서 있는 세 명을 다시 보았다.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 그리고 반짝이는 구두를 갖춘 모습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예?”
“리온자동차의 인수협상을 하는 실무자로서 결정해. 호텔에 가서 기다리게 해? 아니면 여기에서 대강 내용을 들어?”
“회장님. 리온자동차를 인수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놀라움과 기대를 한껏 품은 신상훈의 질문이었다.
“저 사람들이 저녁 먹으러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천중명이 대꾸를 건넸을 때 테이블에 앉은 팀장들의 표정 역시 신상훈과 다르지 않았다.
“호텔에서 기다리고 하면 오히려 팀장들이 못 견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을 살핀 유진교의 적절한 조언이 있었다.
“그러네요. 호텔에서 기다리라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까 함께 가보시죠.”
천중명이 일어서면서 테이블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섰다.
“다른 분들은 여기 있어요.”
천중명은 우선 유진교, 신상훈과 함께 입구로 향했다.
“저녁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회장님.”
“대강 끝난 참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괜찮다면 앉아서 이야기하죠.”
신상훈의 통역으로 오간 대화였다.
천중명이 가리키는 테이블로 여섯 명이 앉았다.
정장 차림의 앤더슨, 에릭슨, 칼슨, 그리고 평상복 차림의 천중명, 유진교, 신상훈이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결례에 대해 먼저 사과하겠습니다.”
신상훈이 전하는 말을 들은 천중명은 다시 앤더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일부터 지경그룹과 리온의 인수협상을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말을 전해들은 천중명은 세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인수협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당신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협상을 시작해도 누군가 인수가격을 높게 부르면 또 그쪽과 손을 잡고 우리를 무시할 텐데?”
“그 점에 관해서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사과는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나와 우리 직원들이 다시는 무시당하지 않을 보장책을 준비해 주세요. 그렇게 하면 우리도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가겠습니다.”
천중명은 단호한 태도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너무 강하게 나가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앤더슨과 에릭슨, 굴욕을 삼키는 칼슨을 보며 신상훈의 얼굴에 스친 감정이었다.
염려할 것 없어.
꽉 움켜쥐어서 건네줄 테니까.
“이 저녁을 먹는데 우리 돈 1천만 원이 듭니다. 그런데 당신들과 협상을 시작해서 리온을 인수하게 된다면.”
천중명은 세 사람을 돌아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인수대금으로 이런 식사를 50만 번 하는 돈을 지불해야 하고, 다시 리온의 정상화를 위해 최소 100만 번 이상 이런 식사를 할 자금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것도 당신들의 거만한 태도를 받아들이면서.”
신상훈이 말을 전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리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당신들의 손에 많은 돈을 쥐고 싶다면 다른 인수자를 찾으세요. 나처럼 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10조 원 이상 되는 돈을 추가로 부어 넣을 고민하는 사람 말고.”
통역하던 신상훈의 눈에 자부심이 올라온 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당신들이 먼저 신뢰를 깼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리온자동차를 정상화하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지경그룹의 이름을 믿지 못하겠다면 인수협상에 나설 수 없습니다.”
“원하거나 생각해 둔 조건이 있습니까?”
뜻밖에도 질문을 던진 사람은 굴욕을 삼키던 칼슨이었다.
“우리가 무례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번의 교훈을 통해 진심으로 리온자동차를 정상궤도에 올려 줄 파트너와 손을 잡고 싶습니다.”
칼슨의 말을 전한 신상훈이 어떤 답을 건네야 할지를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인수협상의 전권을 준다면 다시 협상하겠습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우리와 인수협상이 깨지더라도 다음 인수협상자는 우리의 승인을 얻어야 선정할 수 있다는 조건입니다.”
세 사람의 얼굴이 ‘말도 안 돼’라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의 인수협상이 결렬된 뒤에도 지경이 다른 인수협상자를 선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산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나와 지경의 의지와 명예를 믿지 않을 거라면 더는 인수협상을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먹먹한 침묵과 긴장이 테이블을 넘실거리며 둘러앉은 여섯 명을 적신 다음이었다.
“잠시 우리끼리 의논하고 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언제까지 이곳에 묵으실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본부장과 함께 내일 돌아갈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서는 것을 보며 천중명과 유진교, 신상훈은 원래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정장 차림의 세 명이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다음이었다.
“어차피 식사를 더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커피를 주문하지?”
천중명의 지시에 신상훈이 커피를 주문했다.
“이쯤에서는 말씀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부장님께서 설명하시죠?”
“예, 회장님.”
주문을 받은 지배인이 돌아가는 뒤에서 유진교가 팀장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온과 거양의 협상이 오늘 깨졌다.”
한마디였다.
‘어떻게 된 거지?’
‘그래서 온 거라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는 거잖아?’
‘혹시 회장님이 그렇게 만든 건가?’
그런데 그 한마디 말을 들은 팀장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유진교의 말이 나온 뒤에 또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리온자동차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천중명이 제시한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며 협상을 시작할까, 아니면 내일부터 다시 인수협상자를 모집하겠다고 나설까?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지경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자 기회였다.
그사이 주문했던 커피가 도착했다.
“아무래도 의논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모양이니 커피 마시고 호텔로 돌아가지?”
천중명의 권유에 유진교를 제외한 팀장들이 영혼을 반쯤 빼앗긴 얼굴로 잔을 들었다.
이해한다.
천중명이 팀장이었더라도 세계적인 브랜드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서 정상화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도전해 보고 싶었을 것이 분명했다.
달각.
커피를 마신 천중명이 잔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곳에서 내린 리온자동차의 세 사람이 넥타이를 쓸어내리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자리였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천중명이 일어섰고, 테이블에 있던 일행들 모두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온 세 사람이 천중명의 앞에 섰다.
“천중명 회장님.”
입을 연 것은 앤더슨이었다.
“우리는 지경그룹과 천중명 회장님의 인격을 믿고 회장님께서 원하는 방식으로 인수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팀장 둘이 신상훈의 말을 전해 듣고는 볼을 씰룩이고 있었다.
시선을 떨군 직원의 꽉 움켜쥔 주먹도 눈에 들어왔다.
“결단에 감사합니다. 이번 협상은 지경과 리온이 함께하는 훌륭한 도전이 될 것이고, 그 도전의 끝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이루리라 믿습니다.”
천중명의 말을 전해들은 앤더슨이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였다.
정장의 앤더슨이 편안한 차림을 한 천중명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