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61화 (161/315)

# 161

161. 기분을 좀 바꿔볼까요? (2)

류효양의 설명을 들은 에릭슨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후우-.”

붉게 물든 낯빛을 털어내겠다는 양, 길게 숨을 내쉬었으나 여전히 달아올라 있는 그의 얼굴은 분노하는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다는 거지?”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 따를 수밖에 없는 지시를 누가 내렸다는 거야! 누가! 기업의 인수를 말 한마디로 막아버린다는 게 상식으로 가능하냐고!”

“우리의 체제에 관한 불평은 받아들일 수 없다.”

류효양의 답에 에릭슨은 기가 막힌 듯 “허!”하는 탄식을 쏟아냈다.

“믿을 수가 없군.”

“우리 임원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방향을 모색하고 있으니까 하루만 시간을 줘.”

“만약 그 하루를 주었는데도 인수가 무산되면?”

답이 없는 류효양을 보며 에릭슨은 또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동기라서 믿은 것이 아니라 인수 금액과 자네가 보인 열정에 남은 두 사람을 설득했었다. 뱉은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없다면 앞으로 자네는 경영에서 손을 떼는 게 좋아.”

“설마 한국과 거래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에릭슨을 따라 류효양이 급하게 몸을 일으킨 다음이었다.

문을 향하던 에릭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미 스톡홀름으로 떠났어. 지금부터 나는 앤더슨과 칼슨을 붙들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한 뒤에 다시 이해시켜야 하고 서둘러 달려가서 지경그룹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루면 돼.”

“그래서? 그 뒤에도 인수가 안 된다고 하면? 우리가 파산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10조 가까운 돈을 지원하겠나? 그런 거야? 아니!”

말을 하던 에릭슨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랬다가 정작 파산 직전에 또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느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어.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자네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르니까.”

“에릭슨? 지경은 안 돼! 하루면 된다니까.”

“지경의 인수팀은 인수 후의 투자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었지. 심지어 자동차의 판매와 생산은 우리에게 맡긴다는 조건이었는데 욕심을 부렸던 대가를 이렇게 받는군.”

경멸에 가득 찬 에릭슨의 눈빛을 본 류효양은 그를 더 이상 부르지 못했다.

콰앙.

그리고 방문이 거세게 닫혔다.

**

신상훈이 예약한 호텔은 ‘워터프론트’란 이름처럼 바다와 운하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환상적인 장소에 있었다.

정면에 스톡홀름 시청, 좌우로 유명 레스토랑, 쇼핑센터, 여객선 터미널까지, 촌구석에서 화려한 도시에 온 느낌으로 천중명은 객실 밖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하룻밤에 1천2백만 원 하는 특실이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왼편에 메인 침실과 보조 침실, 거실 두 개, 식당 하나, 작은 회의실 하나, 건너편에 방 세 개를 포함해 워터프론트 호텔 한 층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커피 어떠십니까?”

“본부장님도 드시겠어요?”

“이런 풍경을 보며 마시는 커피는 각별하지 않겠습니까?”

둘이서 유쾌한 대화를 나눈 뒤에 커피를 주문했고, 바다와 운하를 내려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

테이블을 가운에 두고 창을 향해 앉은 상태여서 유진교가 고개를 돌리며 천중명을 불렀다.

“외람된 표현인데 또 성장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계기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바다 위를 수놓은 하얀색의 요트와 갈매기를 내려다보며 천중명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아버지와 통화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제가 너무 경직돼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역할을 마쳤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아버지께서 그러시던데요? 진흙 밭에 들어가서라도 금을 캐라고. 그걸 빛나게 하고, 값어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직원들에게 넘겨주라고.”

유진교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때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들어와 테이블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신 팀장님.”

“예, 회장님.”

“저녁 먹을 때까지 쉴 테니까 다들 좀 더 편안하게 있고, 저녁은 평상복 차림이라고 알려주세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고급 레스토랑이 있을까요?”

“바다 바로 앞에 있는 해산물 전문점이 있습니다.”

“좋군요. 가능하면 전 층을 다 사용할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비용이 얼마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신상훈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가 방을 나선 뒤에 유진교와 둘이서 커피를 마셨다.

“신 팀장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명품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저런 직원들에게 뒤지지 않는 경영자가 되고 싶고요.”

이번에도 유진교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이번 인수에 실패하더라도 회장님께서 성장하셨으니 출장 온 보람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천중명이 웃었고, 유진교가 따라 웃었다.

달각.

커피잔을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바다의 저 멀리서부터 먹구름이 덮치는 것처럼 어둠이 삽시간에 천중명의 주변을 감쌌다.

이건 또 뭐야?

없어진 거 아니었어?

먼저 짜증이 확 피어올랐고,

류효양과 에릭슨의 대화를 보게 된다면 말을 못 알아들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도 떠올랐다.

그 직후였다.

천중명을 완전히 감싼 어둠이 서서히 빛과 함께 두 사람의 남자를 보여주었다.

갑자기 피어난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천중명은 고급스러운 회를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을 확인했다.

‘하아, 저 양반이 진짜.’

정면에 있는 남자는 허세직이었다.

“의원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천수와 불미스러운 관계가 있었습니다.”

시선을 떨군 남자 앞에서 허세직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문광그룹 송평길 회장까지 나서서 일을 무마하려는데 어쩐 일인지 지경그룹의 사위분께서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저 남자가 정안규인가?

정안규로 보이는 남자는 초선과 재선 의원들을 데리고 허세직의 라인으로 들어가겠다며 매달렸다.

“내 사위라고는 해도 알다시피 워낙 강직해서 청탁을 받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함부로 장담하기 어렵겠는데?”

강직한 게 뭔지 알려드릴까?

선영 씨를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좀 합시다, 진짜.

“그렇다면 내가 한번 연락해 봄세.”

그러나 천중명의 바람을 저버린 채 허세직은 터무니없는 약속을 건넸다.

여기까지 보여준 어둠이 다시 두 사람의 모습을 감쌌다.

상황을 대강 이해한 천중명은 어둠에 완전히 잠기기 직전에 허세직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감출 수 없는 탐욕에 사로잡힌 그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구름이 몰려오는 장면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어둠이 밀려가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어둠이 왜 나타나는지를 밝혀내야 했다.

감전되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혹시 커피였나?

커피를 타기 위해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넣을 때 그랬고, 곽대출과 커피를….

지리산에서 내려오기 직전에 보았던 허선영의 영상은 또 커피와 아무 상관없는데?

앞이 환하게 밝아졌고, 다시 기울어진 햇살과 요트, 갈매기, 그리고 그것들을 품에 안고 넓게 펼쳐진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최만호 실장님이요. 혼자 외롭겠구나 싶어서요. 목소리나 한번 들어볼까요?”

유진교가 바라보는 앞에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실장님. 통화 괜찮으신가요?”

그런 뒤에 천중명은 대략 10분에 걸쳐 최만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수가 잘 된다면 나중에 실장님과 꼭 함께 보고 싶은 풍경이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최만호는 무척이나 홀가분한 음성이었다.

**

송평길은 부속실 직원의 연락을 받기 무섭게 수화기를 들었다.

“나, 송평길이오.”

- 지경그룹 기획실 최만호입니다, 회장님. 이른 시간에 전화 드렸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시간을 따질 게 뭐 있소? 그래, 어쩐 일이오?”

질문을 던진 송평길이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지경그룹의 최만호의 용건이 어천수의 일 말고 뭐가 있겠나.

- 우리 회장님께서 법무팀 철수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전화 드렸습니다. 남은 일은 송 회장님께서 잘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호오-.”

그토록 표정과 숨소리를 감췄던 송평길이 속내를 드러냈을 정도로 지금 소식이 그에게는 기뻤다.

- 당부 말씀도 있었습니다.

“말씀하시오.”

- 송중대 전무가 기본을 지킬 수 있게 현명한 판단을 해주십사 한다는 말씀이 먼저 있으셨고,

하마터면 송평길은 “끄응.”하는 소리를 뱉어낼 뻔했다.

- 이번 일은 허세직 의원과 무관하니 가능하면 그쪽에 말이 새나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렇다면 허세직이 천중명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말이잖아?

놀라고 당황했으나 그래도 송평길은 나름 구렁이였다.

“알았소. 내 천 회장의 당부를 분명하게 처리하리다. 우리 최 실장의 노고를 잊지 않겠고, 천 회장이 귀국하면 일간 식사나 한번 하자고 꼭 전해주시오.”

-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송평길은 복잡한 얼굴로 부속실과 연결된 인터폰 스위치를 눌렀다.

“나야. 법무팀장을 불러. 서두르라고 전해.”

그런 뒤에 그는 다시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풀이 팍 죽은 정안규의 대꾸가 바로 나왔다.

“나요. 지금 지경그룹이 물러난다고 하니까 얼른 들어가서 손을 쓰세요.”

- 예?

“지금 지경의 최만호 기획실장과 통화를 마쳤습니다. 내가 법무팀장을 움직일 테니까 우리 정 의원은 얼른 검찰에 손을 쓰시란 말씀이오. 어천수가 지껄이는 것이 헛소리인 거로. 아시겠소?”

- 조건은요?

“그게 나도 이상하긴 한데, 우리 둘째 놈이 기본을 지킬 수 있게 현명하게 판단해 달라, 그리고 이번 일은 허세직 의원과 무관하니 그쪽에 말이 새나가지 않게 처리해라, 그 두 가지였소.”

- 예?

정안규의 반문에 송평길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세직 의원이 천 회장에게서 사람대접 못 받는 모양이오. 공연히 시간 끌다 천 회장이 다시 독하게 마음먹으면 일 다 틀어지니까 먼저 수습하고 허 의원의 반응을 살피는 게 어떻겠소?

- 알겠습니다. 오전 중으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한 가닥 희망을 붙든 정안규의 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

오후 조서를 위해 검찰청에 도착한 어천수는 높게 올라온 볼 위의 눈을 고약하게 치켜떴다.

검은 머리 짐승 거둬봐야 아무 소용없다더니!

조사받으러 들어가라던 정안규는 이렇게 포승에 묶여 끌려 다니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월급 말고도 목돈을 집어주었던 박상구는 엉뚱한 일을 터트려서 어천수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었다.

‘두고 봐. 너희도 절대 못 빠져나가. 내가 어천수야. 어천수. 남대문 리어카에서 출발한 어천수!’

호송 버스에서 내린 그는 교도관이 이끄는 대로 검사실로 들어섰다.

포승을 풀고 검사 앞에 앉은 다음이었다.

어째 분위기가 다른데?

본능적인 감각이 경고하고 있어서 어천수는 빠르게 검사실을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우선 종이컵에 봉지 커피 한 잔 주고 시작했는데 오늘은 계장이나 여직원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검사의 말투까지 바뀌어 있었는데 어천수는 우선 대꾸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통해 돈을 좀 집어주면 저런 검사의 태도쯤 또 한순간에 바뀐다.

“사건이 넘어갈 것 같아요.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을 조사해 봤는데 어천수 씨의 말을 증명할 증거가 없거든.”

“예? 그게 뭔 소리입니까?”

“아이, 귓구멍이 막혔나? 증거가 없다고, 증거가.”

“내가 진술하잖습니까? 시간에 장소에, 수첩도 있다니까요.”

픽 웃은 검사가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기울였던 상체를 세웠다.

“거기 수첩에 내 이름 적으면 나도 돈 먹은 거야?”

어천수는 코보다 높게 올라온 볼을 씰룩이며 대꾸하지 못했다.

“적당히 좀 해요. 구멍가게에서 회사 키웠으면 열심히 살아야지, 무슨 원정 도박을 다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당신이 무슨 재벌이야?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놀고 있어, 진짜.”

“돈을 줬다니까요! 돈을!”

“그러니까. 수첩하고 장소, 시간만 기억한다는 거 아냐? CCTV 없는 곳만 골라서 주느라고 다른 증거는 없고. 그렇지? 이거를 좀 봐요.”

검사가 책상 한쪽에 있던 서류를 집어 어천수 앞에 내밀었다.

“박상구, 당신 직원 맞지? 이렇게 녹취록이라도 있어야 증거라고 하지? 비겁하게 경쟁회사 노조위원장이나 꼬드기는 주제에 무슨 정치권을 팔아?”

녹취록에서 시선을 든 어천수를 향해 검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봐요. 어천수 회장님. 돈 좀 만진다 싶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재벌이 태풍이나 장마철에 내리는 비라면 당신들은 그냥 지나가는 여우비야, 여우비. 그러니까 앞으로 살면서 재벌계열사는 함부로 건드리지 마.”

말을 마친 검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손등을 밖으로 저었다.

“갑시다.”

교도관이 붙들어 일으켜 세우도록 어천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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