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 기분을 좀 바꿔볼까요? (1)
천중명은 곧바로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중국의 삼합회에 양서평과 조양회란 사람이 있습니다. 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의 정확한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 5분만 기다리시면 자료를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빨라서 좋네요.”
- 그만큼 투자해 주셨으니까요.
기분 좋은 느낌으로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아까 읽던 노트북 속 보고서에 시선을 주었다.
작성자의 이름으로 최만호가 올라와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천수의 일로 정안규와 문광그룹의 송평길 회장이 곤경에 처했다는 보고였다. 그리고 이어서 박상구의 진술에 따라 이범준 노조위원장이 긴급체포 되었다는 내용도 읽었다.
“독나방이 따로 없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더니 어천수가 한 날갯짓에 정안규와 이범준까지 줄줄이 죽어 나가는 꼴이 딱 그랬다.
하여간 송중대라는 놈도 참.
아버지인 송평길이 죽게 생겼는데 공항에서 그렇게 큰소리쳐?
송중대를 떠올린 천중명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 외에 곽대출이 보낸 기숙사 현장 보고, 지경신문고에 올라온 내용의 처리 등등, 보고를 읽을 때였다.
지이잉.
[회장님. 서류를 확인하십시오.]
황성규가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화면 속의 화살표를 움직인 천중명은 황성규가 새로 보내준 서류를 확인했다.
‘두 놈 다 죽게 생겼구나.’
황하를 기준으로 아래쪽을 차지한 양서평은 정동방의 일로 곤경에 빠졌고, 덩달아 조양회 역시 무척이나 아쉬운 상황이었다.
원인은 강북의 주인이라는 가등섭이었다.
그가 양서평의 입지를 야금야금 줄이고 있다는 평가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잖아?
천중명이 류효양을 떠올렸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노트북 옆에 두었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천중명은 픽 웃었다.
하여간 사람 일이 늘 이렇다.
안 될 때는 벨을 누르려던 손가락까지 꼬이고, 될 때는 또 줄줄이 사탕으로 좋은 것들이 몰려오는 것이 말이다.
표정을 갈무리한 천중명은 느긋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양서평 부총재를 모시는 조양회입니다. 잠시 통화가 괜찮으실까요?
“말씀하세요.”
어쩐지 조양회는 뿌듯해하는 음성이었다.
- 양서평 부총재께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양자동차의 철수소식이 들릴 테니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주십시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 회장님께서 리온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스웨덴 현지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부총재께서 움직이셨습니다. 당이 지시하면 거양자동차는 바로 물러날 겁니다.
정말이지 자부심 가득한 음성이었는데 말을 듣는 순간, 천중명은 소리 없이 입가에 미소를 그려냈다.
- 이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길 바랍니다.
기특한 새끼들.
“그 통지가 언제쯤 이루어질까요?”
- 그곳 시간으로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입니다.
“확정된 사항입니까?”
- 회장님. 양서평 부총재께서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또다시 자부심 가득한 음성이 건너왔다.
“이런 선물을 내게 할 때는 바라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 양서평 부총재는 다음 분기 지경전자의 메모리 생산량을 우리 중국에 돌려주실 것과 지경화장품의 미라클 독점유통권을 바라십니다.
“그 두 가지면 가등섭과의 대결에서 이겨낼 수 있습니까?”
- 혹시 그가 먼저 연락했었습니까? 회장님! 절대 그와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는 표리부동하기가 이리와 같습니다.
정말이지 다급한 조양회의 말이 전화기를 뚫고 달려들었다.
“알았습니다. 다만, 메모리와 미라클은 함부로 약속할 수 없으니 한 시간쯤 뒤에 다시 통화하지요.”
- 예, 회장님. 그럼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가등섭이 연락해오더라도 절대 그의 달콤한 말에 속지 않으시길 당부드립니다.
“그러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트윈침대, 중간에 놓인 협탁, TV와 냉장고, 그리고 노트북과 서류들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 전부였다.
천중명은 서류를 뒤져 류효양의 자료를 들었다.
퉁퉁하게 생긴 얼굴에 안경을 낀 얼굴이었다.
“내게 아버지가 계시거든. 그것도 하늘이 주신 아버지.”
그리고는 그의 사진을 향해 자랑하듯 혼잣말을 건넸다.
**
거양자동차의 부사장 류효양은 액정에 올라온 번호를 확인하고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류효양입니다, 회장님.”
- 리온자동차의 인수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게 어떠냐는 지시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 중이니까 당장 어떤 계약도 확정하지 말고 있어.
류효양은 따귀를 제대로 얻어맞은 심정이었다.
- 어디에서 연락이 왔는지는 짐작하지?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는?”
- 내용을 확인하고 나면 전화하겠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한 걸음 물러나.
“회장님! 이번 인수는 당에서 지지했던 일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바뀌었다면 의심 가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차라리 천중명 회장을 만나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류효양의 질문에 당장 답은 없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기다려.
그리고 외마디 답이 있은 뒤에 전화가 뚝 끊겼다.
**
팀장 셋과 신상훈은 불과 한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밀유지 계약의 범위를 정하는 것부터 일정까지 리온자동차의 반응이 더는 회의를 진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끝났어.’
네 사람 모두 알았다.
이미 중국 측과 리온의 협상이 막바지여서 지경은 단순히 들러리로 역할이 변했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 일정은 언제로 할까요?”
“추후에 통지하겠습니다.”
심지어 실무자 협상의 다음 일정조차 정해주지 않은 채 리온의 직원들은 형식적인 악수를 끝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이렇게 된 것이 자신들의 탓인 것만 같아서 네 명은 참담한 심정으로 세워놓은 승용차로 걸었다.
“죄송합니다.”
승용차에 서서 리온의 명판을 바라보는 팀장들에게 신상훈이 꺼낸 사과였다.
“신 팀장님이 죄송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지 마세요. 함께 애써주신 회장님과 본부장님께 죄송하면 했지, 신 팀장님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세 명의 팀장이 신상훈을 다독이며 승용차에 올랐다.
가서 뭐라고 보고하지?
네 사람은 차라리 호텔까지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출근을 위해 현관으로 향하던 기용도가 휴대 전화를 받았다.
“예, 회장님. 기용도입니다.”
그가 급하게 거실 창으로 움직이자, 그릇을 치우던 부인이 얼른 움직여 TV의 볼륨을 줄였다.
- 부사장. 이른 시간에 미안합니다. 리온자동차의 인수를 위해 부사장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라서요. 다음 분기에 생산하는 메모리를 중국으로 넘길 수 있습니까?
“회장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가볍게 웃는 천중명의 음성이 먼저 넘어왔다.
- 부사장의 의지는 잘 알았습니다. 부작용이나 그 후에 감당해야 할 후폭풍은요? 그 점에 관한 부사장의 판단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고압적인 태도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의견을 물어봐 주는 천중명이 고마워서, 기용도는 턱없이 맞은편 아파트 건물의 위를 바라보았다.
“미국과 계약된 일괄 판매 물량이 이번 분기로 끝납니다. 지난번 덤핑 의심 판정으로 받은 손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주십시오. 미국 측의 사과를 받아내고, 다음 일괄 판매 계약에서 유리한 고지를 따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가능하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다만, 단가 협상의 여지는 남겨주십시오.”
기용도가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 결정 나는 대로 문자를 보내겠습니다. 가격 협상에서 굳이 양보할 이유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연락주시는 대로 처리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휴대 전화기를 품에 넣는 기용도에게 부인이 다가와 눈치를 살폈다.
“왜?”
“회장님 아니야? 그럼 아부도 하고 그러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으며 현관으로 걸은 기용도는 구두를 신은 뒤에 뒤따라 온 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 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대강 방송을 통해 들었지?”
“그래도 이렇게 통화할 때 건강 살피시라고 한마디 건네서 나쁠 게 뭐가 있어?”
“혹시 또 통화하게 되면 그렇게 말씀드릴게.”
웃는 얼굴로 아내를 안아준 기용도가 현관을 나섰다.
**
지경화장품의 이중성 역시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중국에서 보낸 제안서는 받았습니다. 다만, 카피 제품과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것이라 판단해서 거절했었습니다.”
- 그렇다면 카피 제품 방지, 우리가 철수할 때 일체의 조건을 걸지 않는다는 조건이면 어떻습니까?
“회장님. 중국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조차 안 되는 명분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걸 끝까지 우기는데 법원이 또 그런 면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계약서는 사실 의미조차 없습니다.”
- 의견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리온자동차의 인수를 위해 그룹 차원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누구보다 천중명을 지지하고 믿는 이중성이었다.
“중국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경험했던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연락처를 주시면 최대한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조건으로 거래를 시작하겠습니다.”
천중명의 요청을 받은 이중성이 단단한 답을 내놓았다.
-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리온의 인수에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어서 오히려 기쁩니다. 그리고, 회장님.”
통화의 끝을 붙든 이중성은 노조위원장 이범준이 긴급체포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어제 이미 보도가 나간 상태입니다. 어천수가 털어놓는 내용이 워낙 커서 크게 보도되지는 못했습니다.”
- 알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다독여주세요.
통화를 마친 이중성이 바쁘게 넥타이를 묶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중국에 제시할 조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양서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벌 회장이라는 게 우리 총재와 다를 바가 없군.”
그토록 매달려도 반응이 없던 지경화장품과 지경전자가 천중명의 한마디에 상담을 진행하는 것을 보며 그가 뱉어낸 탄식이었다.
“형님. 거양자동차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미 인수를 중단하라는 통지는 보낸 것으로 안다. 거양자동차의 임원들이 상황을 바꾸려고 버둥대는 모양인데 안 되면 마누라들의 모가지를 잘라서라도 물러나게 할 거다.”
빌어먹을 정동방이 저지른 일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구정물처럼 덮치는 상황인데, 강북의 가등섭이 그걸 또 삽으로 퍼붓는 꼴이어서 어차피 양서평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총재께는 홍콩에서 손해 본 금액을 복구하고도 얼마가 남을지 모를 일이라고 말씀드렸으니까 메모리 거래가 망가지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
“스마트폰 업체가 돈을 싸 들고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양회의 답을 들은 양서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도 그거, 메모리 공장을 만들면 어때?”
“알아는 보겠습니다.”
차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타박하지 못한 조양회의 답에 양서평은 공연히 입가를 닦아냈다.
“천중명 회장이라고 했지? 이렇게 되면 그를 반드시 만나봐야겠다. 돈 냄새가 나거든. 그와 손잡고 강북의 가등섭을 처리한 뒤에….”
뒷말을 삼킨 양서평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
팀장 셋과 함께 호텔에 돌아온 신상훈은 곧장 천중명의 방으로 올라갔다.
“다녀왔습니다.”
“고생들 했어요.”
유진교와 있던 천중명은 네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본 뒤에 내용을 짐작하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별로였던가 보죠?”
“죄송합니다, 회장님.”
신상훈과 팀장 세 명이 고개를 숙인 다음이었다.
“기분을 좀 바꿔볼까요? 모처럼 스웨덴에 와서 작은 도시의 호텔에만 있으려니까 숨도 막히고. 스톡홀름에 가서 하루 자고 올까 하는데 본부장님은 어떠십니까?”
“이왕이면 고급 호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풀이 죽은 자신들을 위로하는 건가 싶었던 모양이었다.
신상훈과 팀장들이 시선을 교환한 뒤에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신 팀장님.”
“예, 회장님.”
“스톡홀름에서 가장 고급 호텔의 특실이면 하룻밤에 얼마나 하지?”
“알아봐야 하겠지만, 우리 돈으로 1천2백만 원 정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네요. 그럼 그거 알아봐서 예약하고, 버스는 준비할 수 있겠어요?”
“예?”
신상훈이 멍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천중명은 분명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