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59화 (159/315)

# 159

159. 아직 더 성장해야겠군 (3)

황성규는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말이 좋아서 2천억 원이지, 국가기관 소속이 아니고는 상상조차 못 할 자금을 투입해 조직과 장비를 보강했다.

천중명을 믿는다. 믿었다. 믿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덜컥 통장에 2천억 원을 꽂아주고는 당부 한마디 없이 스웨덴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거대 자본의 공격을 막아보자고 덤벼서 고작 뒷조사나 몇 건 해준 자신을 이렇게나 믿어준 사람이었다.

팀원들이 점조직 형태로 조직원을 보강했고, 대당 몇 십억 원 하는 장비들도 원 없이 갖췄다.

그리고 눈이 시뻘게지도록 뒤지고 뒤졌다.

찾아낸다.

이런 지원을 받고도 못 찾아낸다면 거대 자본의 공격이 있어도 어차피 황성규와 팀원은 제 몫을 하기 어렵다.

황성규의 독기가 머리를 타고 뻗쳐서 천장에 닿을 때쯤이었다.

“팀장님!”

문상훈이 짜릿한 무언가가 담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찾았습니다! 공항 화장실에서 얼굴과 복장을 완벽하게 바꿨습니다! 여기요!”

팀원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문상훈이 가리키는 모니터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책상에 놓인 여덟 대의 모니터 중 왼쪽에서 두 번째 모니터를 가리켰다.

“저기 화장실 들어가는 남자요.”

화면이 정지된 상태에서 마우스를 움직인 문상훈이 네모 칸을 정한 뒤에 다시 조그셔틀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모니터 여덟 대가 그 남자의 모습을 잡았다.

타다닥.

문상훈이 키보드를 누르자 남자가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엉뚱한 노인이 힘겨운 걸음으로 나왔다.

“정확하게 30초 만에 나왔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문상훈이 조그셔틀을 움직여 화면을 빠르게 돌렸다가 세웠다.

화장실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이 갈아입은 옷과 가면을 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신원 확인은?”

“순서에 걸린 여권을 찾았습니다.”

황성규의 질문을 받은 문상훈이 오른쪽에 놓인 다른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겼다.

모니터 여덟 대에 사람의 얼굴이 확인조차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지난 다음이었다.

화면 중앙에 서른 중반의 남자 얼굴이 떠올랐고, 오른편에 붉은 글씨로 ‘사망’이라는 글자가 번쩍였다.

“스케이시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는 테드 케블린입니다. 모사드 소속이었고, 2년 전에 사망 처리됐던 인물입니다.”

“이놈이 미국의 펀드 담당자라고 설쳤다는 거지? 현재 위치는?”

“하루 안에 찾아내겠습니다.”

“알았어. 최대한 서둘러.”

됐다. 이놈을 거꾸로 타고 들어가면 미국 쪽에서 자금을 댄 놈들을 제대로 찾을 거다.

황성규가 다부진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이제 겨우 새벽 6시가 지난 시간에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천중명의 이름을 확인한 황성규가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 중국의 거양자동차가 리온자동차와 주고받은 비공개 MOU가 있는지 확인해 주고 문자로 보내는 중국인 여섯 명의 현재 위치를 파악해 주세요.

인사조차 없이 천중명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였는데 새롭게 들어온 장비를 바라본 황성규는 모처럼 여유 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5분 뒤에 메일을 확인하십시오, 회장님.”

- 고맙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예, 회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황성규의 휴대 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천중명이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는 알림이었다.

**

황성규와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1층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를 마치면 팀장 세 명과 신상훈은 실무자 협상을 위해 다시 리온자동차로 향한다.

비밀유지계약서 따위의 기초적인 협약, 그리고 일정 조율, 인수 목록을 정리하는 일인데 이후에는 실무팀에 법무법인, 회계법인이 합류해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는 순서였다.

레스토랑에 자리 잡은 일행은 우선 각자 원하는 점심을 주문했는데 천중명은 역시나 샌드위치와 커피였다.

“분위기를 봐서 눈치챘겠지만, 아무래도 리온과 중국 측 사이에 모종의 협약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유진교가 팀장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거양자동차에서 승용차 부분만 가져가는 조건으로 예상보다 큰 금액을 제시했다면 당장 우리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다.”

이미 상황을 예상하고 있어서 팀장들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유진교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리온자동차 입장에서야 적자인 승용차 파트를 넘기고, 돈을 벌어들이는 트럭 부분을 쥐고 가게 되었으니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지.”

유진교가 말을 건넸을 때, 마침 음식이 나와서 잠시 틈이 있었다.

“앞으로 5년간 예상되는 트럭 수요, 강화되는 유럽의 배출가스 기준, 전기와 청정에너지 개발비용 등을 감안하면, 당연히 우리가 유리하겠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겠나.”

공항과 달리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샌드위치는 위에 빵을 덮지 않는다. 맨 아래에 빵, 그 위로 청어나 혹은 고기를 올리고 그 위에 다시 엄청난 양의 샐러드를 덮어서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먹는 방식이었다.

이럴 거면 왜 굳이 빵을 깔아놓고 샌드위치라고 하는 건지 의아한 수준이었는데 스웨덴에서는 이렇다는데 할 말은 없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죠.”

천중명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면서 유진교와 팀장들 역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뉴욕에 가고 싶은 앤더슨은 목돈을 손에 쥐어서 좋고, 트럭 파트를 계속 운영하고 싶은 에릭슨은 앤더슨이 떠나서 좋은 모양새입니다. 에릭슨이 동기인 거양자동차의 부사장과 물밑에서 접촉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빵의 끝부분을 잘라서 입에 넣은 천중명은 커피를 마신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부심을 가집시다. 우리 역시 배터리와 블루크루드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저들이 욕심을 부렸다가 내년에 파산신청을 한다면 그건 또 그들의 몫이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됩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은 직원들을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먹으면서 들어야 오후 회의에 참석하지. 앞에서 그렇게 있으니까 나도 제대로 음식을 먹기 어렵잖아.”

천중명의 말에 유진교가 웃어주면서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번 인수에 실패한다고 해서 우리 지경이 타격을 받을 건 없습니다.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당당하게 협상합시다.”

인수와 관련해서 고민할 것은 사실 끝이 없었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과 주지사를 비롯한 관공서의 협조, 지경그룹에 대한 스웨덴 국민 정서까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역시 인수가격이어서 그 부분에 있어 지경그룹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산책로에 있던 성이 12억 원 정도 한다고 했죠?”

“예, 회장님.”

식사를 편하게 하라는 의미에서 천중명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1년 유지비가 얼마나 들지?”

“성을 원래 모습으로 수리하는 데 20억 가량이 필요하고, 매년 15억 정도의 유지비가 소요됩니다.”

안 팔리는 이유를 이보다 더 실감 나게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 천중명은 실없이 웃고 말았다.

다들 눈치껏 가벼운 대화를 하며 식사에 집중했는데 처음과 달리 팀장들이 천중명을 대하는 것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

거양자동차의 부사장 류효양은 미국의 유명 공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리온자동차의 에릭슨과 동기이기도 해서, 그가 거양의 인수협상팀을 이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수서류들을 살피던 그는 한쪽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천중명?”

서류의 왼쪽에 클립으로 집힌 사진을 보며 그는 천중명의 이름을 불렀다.

한국에서 절대 찾아보기 힘든 경영인이었다.

물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파생상품으로 홍콩물고기와 정동방을 쓰러트린 건 인정할 만했다. 게다가 쉬쉬하고는 있지만, 삼합회의 습격을 직접 상대한 인물이었다.

“고려인 주제에!”

그러나 그가 한국인인 건 변함이 없다.

손톱만 한 땅덩어리에 사는 주제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믿고 으스대던 한국인들이라니.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비록 카피네, 복제품이네 하지만, 조만간 중국의 제품이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제패할 날이 머지않았다.

‘모창하다 명창 난다’는 속담을 핑계로 일본을 베끼던 한국은 중국을 욕할 자격조차 없었다.

‘샌드위치나 먹다가 돌아가.’

류효양은 천중명의 사진이 붙은 서류를 한쪽으로 툭 던졌다.

승용차 부분만 인수하는 조건으로 거양자동차가 제안한 인수금액이 한국 돈으로 7조 원이었다.

에릭슨에게 따로 2천억 원을 주기로 했고, 계약금 조로 이미 5백억 원이 건너갔으니 막말로 상황이 끝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직원이 행복한 회사?

인수 후에 리온의 직원들을 걱정해?

“5조? 흐하하하.”

류효양은 상체를 들썩이며 웃음을 쏟아냈다.

리온의 승용차 부분만 인수한다면 상황 끝이다.

프레임과 서스펜션, 멀티링크, 브레이크의 기술만 빼낸다면 이번 인수에 들어가는 비용 따위 중국 내수에서 1년이면 만회하고 남는다.

시간을 확인한 류효양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책상의 시계를 확인했다.

지경의 인수팀이 실무협상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점심을 마친 천중명은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에 올라온 메모들을 살폈다.

첫 번째는 역시 황성규가 보낸 자료들이었다.

역시!

여섯 명 모두 천중명이 있는 세브테 근방의 호텔에 있었고, 그중에는 에릭슨의 동기라는 거양자동차 부사장 류효양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썹을 매만지며 자료를 살피던 천중명의 눈이 반짝했다.

[27시간 전에 에릭슨의 계좌로 우리 돈 5백억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그의 개인지분에 변동은 없으며, 송금자는 중국의 유광기계공작입니다.]

27시간 전이면 천중명이 세브테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이거 봐?

천중명은 페이지다운 키를 눌러 다음 서류를 화면에 올렸다.

[MOU의 작성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래에 있는 영상을 확인하시면 모종의 협약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류 아래의 파일에 화살표를 옮긴 천중명이 엔터키를 누른 다음이었다.

네 명의 남자가 호텔 입구에 들어서서 복도를 걷고, 객실의 입구에서 동양인과 인사하는 모습이 있었다.

달각.

화면을 정지시킨 천중명은 한쪽에 놓인 서류를 들췄다.

앤더슨은 오전에 봤으니 알아보겠고, 다른 한 명은 확실하게 에릭슨이었으며, 나머지 두 명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객실에서 나와 악수를 하는 사람은 분명하게 거양자동차의 부사장 류효양이었다.

거래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스웨덴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깨끗하고 정석에 따른 거래를 하는 건 아닐 테고.

이러니까 오전에 앤더슨이 그토록 여유 있게 천중명 일행을 대했겠지.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눈썹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대출아.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

이런 지저분한 거래에 뛰어들어 뺏어올까, 아니면 얌전히 물러나 줄까?

잠시 고민하던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쯤 간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웃음이 픽 나오는 깐깐한 음성이 들렸다.

반갑고, 고맙고, 든든했다.

“아버지. 중명입니다.”

- 그래? 어쩐 일이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 쉽지 않지?

속을 콕 찌르는 듯한 질문을 듣자 정말 이유도 없이 웃음이 나왔다.

- 회장.

“예, 아버지.”

- 경영은 원래 진흙탕에서 금을 줍는 것과 같아. 회장이 손과 발에 진흙을 많이 묻힐수록 더 크고 값어치 나가는 금을 찾을 확률이 높지.

“예.”

- 더럽다고 물러나고, 아니꼽다고 외면하면 기회는 없어. 경쟁자들은 그렇게 달려드니까. 회장이 찾은 금을 직원들은 더 빛나게 하고, 더 값어치 있게 만들지.

“제 속이 보이세요?”

- 흐헤헤헤헤.

천호득의 기분 좋은 웃음이 천중명을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 얼른 뺏어서 가져와. 떡국 먹으러 가고 싶어.

“아버지.”

천호득의 답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 가져올 거지?

“예.”

- 그래! 그래야 이 천호득의 아들이지!

인사를 하려던 순간에 전화가 뚝 끊겼다.

그리고 여운처럼 “얼른 뺏어서 가져와.” 하는 말과 “가져올 거지?”하는 천호득의 말이 천중명의 귀가를 맴돌았다.

“후-.”

내 몸에 진흙을 묻혀라 이거지.

직원들이 더 빛나고 값어치 있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의 번호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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