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 아직 더 성장해야겠군 (2)
맑은 공기, 주변을 감싼 녹지, 동화책에 나올 법한 고성, 깨끗한 도로와 노천카페까지, 화창한 스웨덴의 세브테는 축복받은 땅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정작 천중명의 첫 번째 공식일정 당일은 구름이 짙게 끼어서 아침 일찍부터 우중충한 날씨였다.
출발 준비를 마친 천중명은 호텔의 객실에 서서 우중충한 세브테를 내려다보았다.
밖이 어두워서인지 창이 거울처럼 천중명을 비춰주었다.
짧은 느낌으로 넘긴 머리, 강렬한 눈빛, 다부진 체형의 천중명은 유리에서 시선을 넘겨 거리를 바라보았다.
고작 구름이 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오싹한 서늘함에 눌린 세브테는 저 아래 골목 어딘가에 마귀할멈이나 커다란 낫을 든 사신을 감춰놓은 것처럼 음산했다.
‘성을 샀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네.’
이런 날, 저 커다란 성에 혼자 있다고 해봐라.
어쩐지 피를 탐내는 드라큘라의 심정이 이해될 지경이어서 천중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똑똑똑.
“회장님. 준비되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
신상훈의 음성이 문밖에서 들렸다.
날씨가 어떻든 간에 지금은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몸을 돌린 천중명이 문을 열고 나서자 유진교와 신상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들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발하죠.”
“예, 회장님.”
좋게 말해서 고풍스럽고, 막 표현하면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천중명은, 기다리던 일행과 함께 곧바로 리온자동차를 향해 움직였다.
어제 걸었던 도로를 따라 20분쯤 달리자 갈라진 도로의 왼편에 리온자동차의 입구가 나타났고, ‘리온’이라는 명판 아래에서 다섯 명의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중명이 차에서 내린 다음이었다.
“회장님. 리온의 경영총괄 사장 앤더슨 크로울입니다.”
신상훈의 소개를 들은 천중명은 앤더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워낙 마른 체형에 코가 쓸데없이 뾰족한 느낌이어서 혹시 지병이 있나 싶은 인상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 역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천중명과 앤더슨이 악수를 나눈 다음이었다.
신상훈의 소개에 따라 돌아가며 악수를 하는 것으로 기본적인 인사를 마쳤다.
“버스를 준비했답니다.”
천중명은 앤더슨이 가리키는 버스에 일행들과 함께 올랐다.
뒤편에 지경그룹 일행, 그리고 앞쪽에 앤더슨 일행이 앉았는데, 솔직히 천중명은 리온자동차 경영진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복장이나 경영방침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5조 원이 넘는 인수협상을 위해 처음 만나는 자리에 청바지에 셔츠, 캐주얼 재킷 차림의 앤더슨은 물론이고, 타이조차 매지 않은 직원들의 복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도 지경그룹의 최고책임자인 천중명이 처음으로 공식 방문하는 자리에 말이다.
천중명은 앞에 앉은 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긴장 따위 없었다.
심지어 슬쩍슬쩍 그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면 여유마저 보였다.
거양자동차와 지경그룹이 모두 손을 떼면 당장 버티기도 어려운 리온 관계자가 저렇게 여유를 보인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떡해서든 기술을 얻어가겠다는 중국 측에서 저들이 만족할 만한 조건을 제시했겠지.
15분쯤 공장 외곽을 돈 버스가 완성된 트럭들이 서 있는 왼편 도로를 지나 생산 공장 앞에 멈췄다.
“회장님. 승용차 생산시설입니다. 견학을 마칠 때까지 대략 20분쯤 예상하시면 됩니다.”
신상훈의 설명을 들은 천중명은 안전모를 착용한 뒤에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생산시설은 깔끔하고 직원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집게에 걸린 자동차의 프레임이 정해진 방향으로 이동하면 로봇이 부착해야 할 부품을 가져다주고, 그걸 기술자들이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본부장님.”
용접하느라 불꽃이 튀는 옆에서 천중명은 나직하게 유진교를 불렀다.
“복장이나 태도로 봐서 거양자동차가 저들이 만족할 만한 제안을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설비를 둘러보는 척하면서 유진교와 주고받은 대화였다.
“승용차 부분만 가져가는 조건으로 상상했던 것 이상의 큰 금액을 지불하면 리온은 굳이 트럭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본 느낌은 그렇습니다, 회장님.”
유진교의 부연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두 가지가 궁금합니다.”
천중명은 애꿎은 자동차의 프레임 한 곳을 검지로 가리키며 유진교에게 말을 건넸다.
“다른 자동차 회사에 지분 참여하는 것은 어떤지, 그리고 만약 중국과 우리가 동시에 인수에서 손을 떼면 리온이 얼마나 곤란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천중명이 가리킨 곳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던 유진교가 마치 프레임에 관한 의견을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순히 지분 참여로 손을 잡으면 오히려 배터리와 블루크루드의 기술을 넘겨주는 모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리온자동차만큼 우리에게 매력적인 기업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뒤를 슬쩍 돌아본 유진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국과 우리가 동시에 손을 떼면 리온은 당장 다음 분기에 파산신청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공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의견은 충분히 나누었다.
그리고 그때쯤 천중명 일행은 처음 들어선 곳에 도착했다.
다시 버스로 10분쯤 이동해서 리온자동차의 명판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고, 단층으로 되어 있는 사각형의 건물로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서자 유리로 된 공간 세 개가 나왔고, 천중명 일행은 그중 정면에 있는 가장 큰 미팅 룸으로 들어갔다.
“공장을 둘러보신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앤더슨이 건넨 질문을 신상훈이 통역하면서 미팅 룸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천중명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리온자동차가 탑승자의 안전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기술과 철학을 보유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지금의 견학을 통해서는 그 점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공장을 견학하는 사이 생각을 정리한 탓에 천중명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안전을 위한 노력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위험한 순간에 빛을 발하는 특별함,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수록 리온자동차를 이용하는 고객이 안전하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말을 전해들은 직후에 앤더슨이 만족한 느낌으로 가볍게 웃는 것이 보였다.
“나는 리온이 선택의 기로에 있다고 믿습니다. 어느 쪽이든 현명한 선택을 하겠지만, 그것이 리온자동차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공장을 돌아본 내 소감입니다.”
천중명의 소감이 전해진 다음이었다.
“회장님께서 리온자동차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려주실 수 있겠냐는 질문입니다.”
앤더슨의 질문을 신상훈이 전해주었다.
“함께 일해보고 싶었던 회사입니다. 탑승자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철학이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그러나 1927년부터 시작된 리온의 정신을 계승하고, 함께 발전시켜 보자고 13시간을 날아온 나와 우리 인수팀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신상훈이 천중명의 말을 전한 다음이었다.
앤더슨과 리온자동차 관계자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짧은 말을 꺼냈다.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어떤 점에 실망하셨는지 들을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인수협상을 하는 자리에 평상복 차림으로 나온 것부터, 세 명의 결정권자 중 한 명밖에 안 나온 점.”
“지금의 복장이 리온자동차의 평소 모습이라고 이해해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시장에서 밀려난 거라고 전해줘.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이 정도에 만족한다는, 그따위 태도로 고객을 상대했을 테니까. 매각도 마찬가지겠지.”
천중명과 앤더슨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형식적이든 아니든, 우리와 있는 오후의 실무자 협상에서는 적어도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행동하길 바란다고 전해줘.”
신상훈이 전하는 말을 들은 앤더슨이 정말 짧게 한 마디를 뱉어냈다.
“알겠답니다.”
“그럼 우리는 일어나지. 오늘 만남이 반가웠고, 견학에 협조해 준 점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고.”
천중명을 시작으로 유진교를 비롯한 인수팀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불편한 기색으로 앤더슨과 리온자동차의 관계자들 역시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중국 측과 우리, 어느 쪽이 되든 간에 목표하는 인수협상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해줘.”
신상훈이 말을 전한 뒤에 천중명은 앤더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감정과 감정 사이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텁텁한 악수를 마친 천중명이 몸을 돌리며 미팅 룸을 나섰다.
승용차에 나눠 탄 천중명 일행은 곧바로 호텔을 향해 출발했다.
“본부장님. 우리가 자동차 회사를 만든다면 어떻습니까?”
“리온자동차 정도의 브랜드 인지도와 기술을 갖추려면 최소 20년의 세월과 50조 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네요?”
“다음 분기부터 내년까지 이어지는 자금 압박만 풀어내도 리온의 인수가격이 20조 원 이상으로 평가될 겁니다.”
유진교의 의견을 들은 천중명은 왼손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매만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 팀장.”
“예, 회장님.”
“중국 쪽 일정 스케줄 확인해주고, 혹시 그쪽 관계자 명단 구할 수 있으면 전부 추려줘.”
“알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천중명을 유진교가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손을 놓는 건 몰라도 뺏기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요. 할 수 있는 걸 다해볼 생각입니다.”
“모시고 오는 길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상황입니다.”
유진교가 옅은 미소와 함께 감상평을 내놓았다.
**
조양회는 ‘황하 이남의 주인’ 양서평의 두뇌라고 불린다.
그런데도 그는 코가 쭉 빠진 얼굴로 새벽부터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또 살폈다.
양서평이 삼합회의 총재에게 찍혀서 밀려나면 조양회의 최후 역시 정동방, 황채산과 다를 바 없다.
지경화장품의 매출로 꼬드기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들 줄 알았다. 그런데 천중명은 고사하고 이중성의 선에서 제안이 잘릴 줄 솔직히 짐작이나 했겠나.
‘협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인가?’
조양회는 타워크레인에 매달린 천중명의 영상을 떠올렸다.
삼합회 조직원을 경호원도 부르지 않은 채 직접 상대하는 그룹 회장이라니?
게다가 조건을 보내면 뭐, 이런 건 마음에 들고 저건 좀 바꿔달라는 식으로 받아줘야 달라붙든 매달리든 할 게 아니냐는 말이다.
어쩐지 고기 가는 기계에 다리부터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조양회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르.
새벽 6시에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전화기를 들었던 조양회는 정말 다급한 동작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양회입니다.”
- 그쪽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어?
“예, 형님.”
양서평을 상대하던 버릇 때문인지 조양회는 고개마저 숙이고 있었다.
- 스웨덴에 있다고 했지? 리온자동차의 인수를 도와주면 어떤지 전화는 해볼 수 있지 않나?
“거양자동차에 말을 넣으실 수 있으십니까?”
- 야아!
질문을 건넸던 조양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강북의 가등섭이 내 목을 졸라오고 있다고! 내가 없어지면 너는 어떻게 될 것 같아? 가등섭이가 가장 좋아한다는 게 상대의 뇌와 간이라는 걸 몰라? 그래서 그렇게 여유 있어?
“바로 천 회장에게 전화를 넣겠습니다!”
조양회의 답이 떨어지자 양서평이 길게 내뱉는 숨소리가 넘어왔다.
- 한국의 지인들에게도 알아봤는데 당최 독불장군이야. 머리 회전이 기막힌데다, 강단도 대단하고, 무엇보다 직원들 일이라면 끔찍하다는 평이야.
조양회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 그쪽 조직원들은 아예 엄두도 안 나고, 지금은 정치인과 그룹 회장 몇 명까지 천중명 회장의 선처를 바라고 목을 빼고 있는 꼴인데 눈길도 안 준다는 답이다! 그러니 가등섭이 득의양양해서 내 목을 대놓고 노리지.
“예, 형님.”
- 오늘 중으로 답이 안 나오면 가등섭의 목을 자르러 가든, 거양자동차 회장놈 첩의 모가지를 자르러 가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해. 내가 원하는 답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분기 지경전자의 메모리 생산량을 가져오겠습니다.”
- 흐음.
평소 같으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좋아!”라고 할 양서평이 지금은 신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돈은 차고 넘치는 인간이고! 차도! 보석도! 욕심내는 법이 없고! 그저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재벌 회장이라니!
이어서 한탄 같은 양서평의 말이 건너와서 조양회는 그저 숨을 죽인 채 듣고만 있었다.
- 그가 원하는 건 리온자동차다. 그러니 거양이 양보할 수 있는 선을 찾아내. 오늘 중으로.
“예,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조양회가 답을 전하기 무섭게 전화가 뚝 끊겼다.
“하아. 정동방, 이 개 같은 인간! 뒈져서도 속을 이렇게 썩이나!”
자리에 앉은 조양회는 이를 깨물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평소라면 정동방과 황채산, 그리고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킨 책임자 놈을 죽인 것으로 상황이 끝났어야 맞다.
그런데 가등섭이 손을 쓰기 시작하면서 양서평의 입지가 무섭게 줄어들고 있었다.
조양회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조양회 역시 가등섭을 이참에 짓밟으려 온갖 수를 썼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강북을 양서평의 사람으로 심어놓으면?
“멍청한 인간! 어떻게 일을 그따위로!”
정동방을 다시 떠올린 조양회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생각해, 조양회. 거양자동차가 필요로 하는 것만 손에 쥐어 주고 물러나게 할 방법을 찾아.”
주문처럼 혼잣말을 지껄이던 조양회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럼 뭐하나?
지경그룹의 천중명이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내치면 그만인데!
심지어 문자로 연락처를 보냈는데 여태껏 연락조차 없었다.
“제발 좀!”
천중명을 떠올린 조양회의 간절한 바람이 그의 사무실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