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57화 (157/315)

# 157

157. 아직 더 성장해야겠군 (1)

30분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천중명은 회의실에 있던 팀장들 사이에 떠도는 묘한 흥분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유진교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앞쪽에 앉은 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경전자의 장외주식이 100만 원을 넘어섰습니다.”

“무슨 소리야? 공모가 발표까지 적어도 3개월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장외주식이 그렇게 오를 수가 있어?”

“외국계 기관에서 본격적으로 장외주식을 거둬들이는 모양입니다. 이관수라는 개발자와 나노셀룰로오스 배터리 계약이 어제 있었는데 그 뒤로 장외주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같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흥분이 가득한 기용도의 눈빛이 먼저 떠올랐고, 다음으로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외국계 투자기관의 발 빠른 움직임이 재미있어서였다.

“자!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하지.”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지경전자에서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나노셀룰로오스 배터리를 이용한 자동차 내장재를 개발할 예정이라는 보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배터리 설치 무게가 획기적으로 줄어듭니다.”

유진교의 말에 팀장 한 명이 노트북을 천중명이 보기 좋도록 돌려놓았다.

“여기 보시면, 지경그룹은 향후 블루크루드와 나노셀룰로오스 배터리를 이용해 리터당 1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공기 중에 있는 질소 함유량 이상을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자동차를 개발할 기술을 확보했다.”

노트북 화면에 볼펜을 가로로 가져다 댄 팀장이 내용을 읽어나갔다.

“최근 지경그룹이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고자 몇 개 업체를 타진하는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기사를 다 읽은 팀장이 상체를 세우고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 정도로 준비했다.

리온을 인수하면 우리 지경그룹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키워나갈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다.

기용도 이 양반, 어떻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런 식으로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열정이 가득했던 기용도의 눈빛을 천중명이 떠올렸을 때였다.

“기용도 부사장이 아직 더 성장해야겠군.”

유진교의 차가운 평가가 회의실을 흘렀다.

“이렇게 해놓으면 리온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어. 자동차 회사를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보인 꼴이니까.”

정말이지 단순할 정도로 기본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유진교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천중명은 또 하나를 배운 느낌이었다.

지경전자의 기용도가 보인 열정, 리온 인수팀의 노력,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유진교의 냉철함, 이런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검토해서 방향을 정하는 것이 바로 천중명의 몫이었다.

퍼뜩!

천중명은 무언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리온 입장에서 우리가 인수하길 바랄 가장 매력적인 조건이 뭐가 있지?”

질문이 뜬금없기는 했는데 그런데도 유진교와 세 명의 팀장, 신상훈과 직원 둘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천중명에게 건넬 답을 고민하고 있었다.

“쉽게, 쉽게 의논합시다. 너무 완벽한 답이라면 틀을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리온자동차를 현재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점이 가장 크지 않겠습니까?”

“같은 맥락인데 고용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수 있다는 면도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함께 왔던 팀장 두 명의 의견이 나왔고,

“자부심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자동차의 부활과 안전성 면에서 세계 최고 명예를 되찾고 싶은 욕망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현지 팀장 신상훈의 의견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투자 계획입니다. 얼마의 자본을 어떤 과정을 통해 조달할 것이며, 그 투자를 통해 리온자동차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겠다, 이런 분명한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유진교가 의견을 내놓은 다음이었다.

“이번 인수과정을 총괄하는 세 명이 앤더슨, 에릭슨, 칼슨입니다. 앤더슨은 목돈을 쥐고 빠져나가고 싶어 합니다. 그의 부인이 뉴욕에 거주하는 아들 근처에서 살겠다고 선언한 다음이라 더 그렇습니다.”

천중명은 황성규가 보내준 정보 중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풀어놓았다.

“에릭슨은 중립입니다. 중국에 승용차 부분을 매각해서 앤더슨을 떠나보낸 뒤에 트럭 부분에 집중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말한 에릭슨에 관한 내용은 다들 아는 내용이었다.

“그가 미국의 유명한 공대에서 공부할 때 절친했던 동기가 현재 거양자동차의 부사장으로 있어. 그러니 조용하게 뒤쪽에서 딜하기가 적당하겠지?”

그러나 다시 이어진 천중명의 말을 팀장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들었다.

“승용차 파트의 부분 매각도 가능하다고 한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습니다.”

무언가 안 풀렸던 문제의 답을 찾아낸 것처럼 팀장들은 후련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칼슨인데 이 친구는 우선 아시아에 자동차 분야를 매각하는 것 자체가 불만스러운 인물이야. 리온자동차가 궁지에 몰린 것이 아시아에서 판매하는 값싼 자동차 탓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사람이니까.”

황성규가 넘겨준 정보를 바탕으로 천중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스위스 여행에서 우리나라 사람 몇몇이 된장찌개를 끓였던 모양이지? 그 때문에 크게 다툼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인은 썩은 음식을 먹느냐고 떠들었다가 꽤 곤욕을 치른 적도 있고.”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십니까?”

“극단적인 것은 아닌데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신상훈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눈치였다.

천중명과 유진교의 시선을 받은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체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그의 태도가 굉장히 비협조적이었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까 확인하던 내용이 끝나면 최종 인수제안서의 초안을 작성할 때 참고하고. 혹시 인수 가능한 다른 자동차 회사는 없을까?”

“경영이 어려운 회사들이 몇 개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들이 인수를 공개적으로 의논할지는 확실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신상훈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숙제를 마치고 남은 일들을 의논하죠.”

그리고는 연필을 들고 재고자산 목록과 리온자동차 현황표를 펼쳤다.

뭔가 간질거리는 해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이럴 때는 묵묵하게 할 일을 하는 게 좋았다. 열쇠를 어디에 두었더라, 고민하느니 다른 일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좋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

지경화장품이 벌컥 뒤집혔다.

불만스럽고, 불안한, 전혀 섞이지 않는 이 두 가지 감정을 얼굴에 담은 채 공장을 어슬렁거리던 노조위원장이 긴급 체포되었으니 오죽하겠나.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명을 불러주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중성은 직원이 긴급 체포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서 형사들의 앞을 막았다.

“어천수코스메틱에서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 대가로 이곳 제품의 원재료와 배합비율을 넘겨주기로 했고요.”

답을 들은 이중성은 고개를 떨군 이범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갑시다.”

형사들이 말을 잊은 이중성의 옆으로 움직여 이범준을 데리고 나갔다.

생산직 직원들이 모두 일을 멈춘 채 이중성과 공장을 나서는 이범준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처럼 이중성이 고개를 들었다.

“공장장! 혹시 집중하지 못해서 불량품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오늘은 특히 더 주의해.

“예, 대표님.”

“나는 그룹 기획실에 보고할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절대 불량품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 써. 알지? 불량고객 등재 시스템이 얼마나 무서운지?”

“정 안 되면 잠시 쉬더라도 불량품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장장의 답을 들은 이중성이 급하게 사무실로 향했다.

**

궁지에 몰린 사람은 체면이나 상식 따위 모두 없어지는 모양인지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과 문광그룹 송중대는 지경본사의 최만호를 방문했다.

“실장님. 무리한 요청이 아니잖습니까? 와이파이 망 개방에 따른 협의를 하자는 건데 최소한 한 번쯤 일정을 잡아주실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나마 상식적인 요청을 내놓는 박영철에 비해,

“문광그룹에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뭐든 협조할 테니까 천중명 회장님께 말씀드려봐 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송중대는 밑도 끝도 없는 요구를 내놓으며 버텼다.

“실장님. 우리 회장님이 직접 챙기시는 일입니다. 이럴 때 베풀어주시면 나중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좋지 않겠습니까?”

“두 분의 뜻은 알았습니다. 다만, 회장님께서 스웨덴 출장 중이셔서 당장 어떤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요. 실장님은 회장님과 통화라도 하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송 전무님. 저는 전무님과 달라서 로열패밀리도 아닙니다. 괜히 나서면 이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나마 재벌가의 자식들이라고 최만호가 넉넉하게 대꾸한 직후였다.

“정 그러시면 문광그룹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이 보장해 드리면 됩니까?”

송중대가 불쑥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놓았고, 그 순간에 분위기가 서늘하게 바뀌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우리 회장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제가 맡은 직책과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송 전무가 사정이 너무 급하다 보니까 나온 말입니다.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정도로 속이 타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주십시오.”

박영철이 수습하려 나섰으나 최만호의 표정과 분위기는 이미 얼어붙은 다음이었다.

“두 분의 말씀은 제가 충분히 알았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하기는 어렵고, 회장님께서 전화를 주시면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최만호가 말을 꺼내고는 시선을 돌려서 박영철과 송중대는 또 풀 죽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두 사람이 나선 다음이었다.

예의상 배웅을 마친 최만호는 책상으로 향하며 고개를 나직하게 저었다.

“송평길 회장이 왜 둘째 아들을 전무에 두었는지 궁금했는데 저 정도 인물이라면 그 직책도 과분하겠는데? 회장님에 비하면 그릇의 차이가 너무 커.”

혼잣말을 뱉어낸 최만호가 책상에 앉은 뒤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냈다.

천중명 같은 회장을 모시는 일이 힘겹기는 하지만, 박영철과 송중대를 보고나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자부심이 모락모락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

언제가 보았던 여의도의 일식집에서 정안규는 허세직과 마주 앉았다.

고급 일식집은 대개 방문을 테이블의 옆으로 만든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을 때, 누군가 문을 등에 두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고 생각하면 맞다.

아무래도 직급이 떨어지는 사람이 문을 등지기 때문이라 그렇다.

그렇다면 문이 옆에 있는 일식집에 들어갈 때는 자리를 어떻게 정할까?

우습게도 문을 오른쪽에 둔 자리가 상석, 왼편에 둔 자리가 아랫사람의 자리가 된다.

회가 들어온 다음이었다.

정안규는 문을 왼편에 둔 자리에 앉아서 허세직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것도 주전자를 공손하게 든 자세로 말이다.

“정 의원의 술을 받으려니까 부담스러워. 자, 내 술을 받아.”

“감사합니다.”

둘이서 잔을 채운 다음이었다.

가볍게 입만 대고 잔을 내려놓은 두 사람은 회를 한 점씩 들어서 입에 넣었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파야지, 별수 있겠나.

“의원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천수와 불미스러운 관계가 있었습니다.”

시선을 떨군 정안규의 앞에서 허세직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문광그룹 송평길 회장까지 나서서 일을 무마하려는데 어쩐 일인지 지경그룹의 사위분께서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흐음.”

허세직의 신음을 들은 정안규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지경그룹 법무팀이 손을 놓게만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의원님 라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쪽 초선과 재선 의원 숫자가 꽤 됩니다.”

“허허.”

허세직은 묘한 느낌의 웃음을 먼저 흘렸다.

“내 사위라고는 해도 알다시피 워낙 강직해서 청탁을 받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함부로 장담하기 어렵겠는데?”

“그러시면 혹시 송평길 회장과의 약속을 잡아주실 수는 있으십니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누구? 내 사위, 천 회장과 말인가?”

“예. 그 정도만 해주셔도 저를 살려주신 거라고 믿고 죽을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허세직은 술잔을 들어 반쯤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것참. 모른 척하자니 자네 사정이 딱하고, 그렇다고 대쪽 같은 사위를 곤란하게 하기도 그렇고. 아! 지금 스웨덴에 있어서 당장 만나기도 어렵지 않나?”

“약속만 잡아주시면 송 회장이 스웨덴으로 가겠답니다.”

이 정도로 급하구나.

허세직이 야비한 웃음을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한번 연락해 봄세.”

“감사합니다, 의원님.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허허허. 정치하는 사람이 그 정도 일로 사느니, 죽느니 해서야 쓰나. 자. 술이나 들자고.”

허세직이 거만하게 내민 술잔에 정안규가 잔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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