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56화 (156/315)

# 156

156. 방심할 때, 아시잖습니까 (2)

어천수코스메틱의 박상구는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실제로는 어천수의 개처럼 굴며 일했었다.

그런 그가 경찰서에 들어서다 말고 서서는 치를 떨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경그룹은 악성고객에게서 직원들을 지키겠답시고 그룹 회장이 나서는 판국에?

“씨발.”

평소에 거친 말을 뱉는 타입이 아니어서 그의 욕은 어딘가 어설펐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경찰서의 현관 앞에서 박상구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무언가를 고민했다.

“두고 봐. 나도 자존심 있어!”

마침내 마음을 굳힌 박상구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두 번이나 조사를 받은 뒤였다.

지금 들러 간단한 추가사항만 확인하면 박상구의 조사는 오늘로 끝난다.

“저 왔습니다.”

“예. 앉으세요.”

그나마 안면을 익혔다고 담당 형사가 오늘따라 굳어 있는 박상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형사님. 오늘 진술할 게 더 있습니다.”

정면에 있는 책상 서랍을 정리하는 것처럼 뒤적이던 형사가 힐끔 시선만 들었다.

“우리가 유사제품 만들려고 한 건 전부 어천수 회장과 의논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말을 들은 형사가 슬쩍 형사반장이 있는 저 안쪽을 들여다본 뒤에 손짓으로 박상구를 불렀다.

“왜 그래요? 내가 보니까 덤터기 써서 억울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하면 오히려 박상구 씨 죄가 더 커져요. 어천수 회장이 밖에 있으면 돈이나 달라고 한다지만, 지금 구속 상태라 도움 될 게 없어요.”

사건이 커지는 게 귀찮다는 얼굴로 형사가 다독인 다음이었다.

“어천수 회장이 시켜서요. 지경화장품 이범준 노조위원장에게 돈 건네고 대신 미라클의 원료와 배합비율을 받기로 했었거든요. 그것도 적어주십시오.”

빠르게 형사 반장의 자리를 살폈던 형사가 마음이 급했는지 자신의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왜 그래, 진짜! 그거 터트리면 박상구 씨도 꼼짝없이 공법이야. 노조위원장? 그 양반에게 건넸다는 돈 말이에요. 당신이 건네줬을 거 아냐?”

“억울해서 그렇습니다. 어제 뉴스 보니까 도박으로 100억 원 이상을 날렸더라구요. 그래놓고 협박처럼 누구누구 줬다고 조건 걸듯이 진술한다면서요.”

“그래서?”

“이번 특허권, 영업방해, 전부 나더러 독박 쓰라고 해서 예! 형사님께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민사 들어오는 거 물어주는 조건이었거든요.”

형사가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을 하는데도 한번 높아진 박상구의 음성은 낮아지지 않았다.

“어제 구치소에 접견 다녀온 변호사가 그러는데 제가 저지른 일 때문에 민사 걸린 걸 왜 물어줘야 하냐고 했답니다! 도박에 100억, 정치인에게 50억씩 밀어준 사람이 독박 쓴 직원 민사비용을 몰라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어천수의 이야기가 나오자 형사들이 이쪽을 힐끔거렸고, 그토록 눈치를 살피던 형사과장이 상체를 든 채 박상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에 변호사비로 줬다는 30억 원도 확인해 보세요. 그거 풀려나는 조건으로 변호사 통해서 정치인에게 넘겼답니다. 그리고 제가요. 지경화장품 노조위원장에게 5천만 원 줬구요.”

“박상구 씨!”

말을 뱉어낸 박상구를 저쪽에 떨어져 있는 형사 반장이 불렀다.

“그거 증거 있어?”

“이범준 노조위원장에게 돈을 건네줄 때 녹음해 놓은 게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형사반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변호사비로 30억 원 줘서 정치인에게 넘겼다는 건? 그것도 증거 있어요?”

“어제 구치소에 접견 다녀온 변호사가 전화에 대고 화내는 걸 들었습니다. 누구는 정치인 이름 팔아서 변호사비 30억 원 받아먹는데 자기는 접견 다니면서 택시비 받고 끝내라는 거냐고….”

말끝에 고개를 떨구는 박상구를 형사반장이 묵묵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거기 노조위원장? 녹음해 놓은 건 어디 있어요?”

“여기 가져왔습니다.”

박상구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몇 번 두드린 뒤에 바로 볼륨을 높였다.

[솔직히 이거 가지고 원재료와 배합비율을 다 알려달라는 건 곤란하잖아.]

닳고 닳은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고,

[우리 회장님 아시잖아요. 일단 원재료와 배합비율 넘기고 미라클 판매 시작하면 바로 넘어와요. 지경보다 대우 제대로 해드릴게.]

익히 아는 박상구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래도 3천만 원은 더 줍시다.]

[아 참! 5천도 겨우 결재 받았다니까요. 이범준 위원장님이라 그나마 우리 회장님이 결재한 거구요.]

금액과 이름이 연달아 나온 직후였다.

“야! 가서 지경화장품 노조위원장 긴급체포해! 말 새나가지 않게 조심하고! 그리고 박상구 씨는 이리 와요. 나랑 커피나 한잔하지?”

수갑을 챙긴 형사 세 명이 급하게 움직이면서 형사과의 분위기가 단박에 바뀌었다.

**

심복 곽대출 이사와 친분을 쌓아볼까 싶어 전화했던 박승양은 오산에 있다는 말에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곽대출이 있다는 현장에 들어간 박승양은 제대로 아는 척도 못 한 채 구석에서 눈치를 살폈다.

“너무하는 거잖아!”

곽대출이 당장에라도 앞에 서 있는 직원의 눈알을 뽑을 것처럼 무서운 눈을 하고 있어서였다.

“감리라는 게 뭔지는 알아? 아냐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떨군 직원 앞에서 곽대출은 잠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장님이 우리 지경그룹의 회장님이 됐다고 칩시다. 하루 20시간 가까이 일하고, 현장 직원들이 진상에게 시달린다는 말 한마디 듣고 화장품매장에 달려가겠어요?”

감리직원뿐만 아니라 이곳 현장을 담당한 지경건설 직원들조차 고개를 떨군 채 있었다.

“나 같아도 그래! 13시간 비행기 타고 가서 자동차회사 인수에 매달리느니 좋은 거 입고, 멋진 곳 찾아다니며 놀겠어! 그런데 왜 저렇게 힘겹게 일하시는지 알아!”

곽대출이 홱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애꿎은 박승양이 움찔했다.

그 정도로 곽대출의 눈이 매서웠다.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드시겠다고! 어떤 힘겨움과 어려움이 있어도 직원이 우선이라고 저렇게 뛰어다니신다고! 그런데 이따위 짓을…!”

이번에 곽대출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손이 나갈 뻔한 걸 초인적인 의지로 참아낸 것이 분명했다.

“후-!”

숨을 길게 내쉰 곽대출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주 과장? 여기 오산 현장인데 기획실장님께 보고해서 여기 직원 숙소 건설 현장 소장, 감리과장, 형사고발하고, 민사 청구까지 법무팀에 맡겨.”

답을 들었는지 곽대출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초상집 같은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용인에서 그 난리가 벌어졌던 걸 누구보다 잘 알 만한 분들이 이따위 건물을 힘들게 일하는 직원들에게 떠넘기려 했다니….”

고개를 저은 곽대출이 계단을 향해 움직이자 그 뒤를 박승양이 얌전히 따랐다.

**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허벅지 위에 두 손을 모은 이관수의 등을 그의 부인이 쓸어주었다.

“여보. 우리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지금까지 다 합치면 이런 일, 오십 번은 족히 채운다.

개발계약서 쓰고, 송금해준다고 하다가 차일피일 연기된 후에 느닷없이 다른 이름을 달고 이관수가 개발한 바로 그 제품이 나오곤 했다.

소송도 서너 번은 했었지, 아마.

끝없이 이어지는 재판, 2심, 대법원, 마지막에는 변호사비를 구하지 못해 직접 뛰어다니다가 그것도 손 놨다.

남편의 힘 빠진 등을 쓸어주면서 부인은 터져 나오는 숨소리를 죽였다.

이런 사람인 거 몰랐나?

술이나 노름으로 인생 망친 것도 아니고, 열심히 개발에 매달린 게 죄라면 죄인 건데 그거면 됐지, 뭐.

미국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큰돈을 벌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허벅지 위에서 맞잡은 이관수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부인은 자꾸만 어제 일을 떠올렸다.

지경그룹의 계열사인 지경전자라니까 솔직히 기대했었다.

심지어 회장도 만났다지 않던가.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흐를수록 이번에도 한여름날의 꿈처럼 헛된 기대를 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당신이 개발한 제품이 지경그룹 회장님도 탐낼 만큼 좋았는데 개발비가 너무 드니까 부담스러우실 수 있어, 여보.”

다독이는 아내의 말에 이관수가 서글프고 아쉬움 가득한 눈을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냥 1억 원만 주시고 마음대로 처분하랄 걸 그랬나?”

복학하는 아들의 등록금, 대학에 진학하는 고3 둘째의 입학금,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전세금, 남편은 계약서를 들고 온 뒤로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우리 복이 아닌 거지, 뭐. 당신 정말 열심히 했잖아.”

이제 남편은 여기저기 공장에서 오는 단순한 제품 생산 기계를 만들어주며 잔돈이라도 벌어야 한다.

슬프게 웃은 이관수의 손에서 떨림이 사라졌다.

그가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였다.

띠리링.

그리고 바로 그때 이관수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퍼뜩 부인을 보았던 이관수가 얼른 휴대 전화기를 열었다.

그리고는 문자 확인을 위해 버튼을 한 번….

“으어어-!”

설마? 진짜 지경전자가? 그 큰돈을?

남편의 괴성을 들은 부인이 화들짝 휴대 전화기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마…안, 억?, 십어…억? 오십어…억? 어? 어어어? 어어?”

바보같이 뿌옇게 변한 눈을 문지른 두 사람이 이번엔 검지로 찍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니-임! 부사장니-임!”

이관수는 천중명과 기용도를 불렀고,

“여보? 여보! 이거 진짜지? 정말이지?”

그의 옆에서 부인은 자꾸만 똑같은 질문을 남편에게 던졌다.

**

점심을 먹은 천중명은 호텔의 작은 회의실을 빌려서 회의에 집중했다.

같은 말의 반복 같지만, 각 문장이 담은 의미가 다르고 뜻도 다르다. 그 미묘한 차이를 방심하거나 놓치면 소위 말하는 잘못된 인수를 하게 된다.

“재고 자산 파트 3권에 209페이지부터 내용을 파악해서 다시 정리해 봐요. 물건이야 없어질 수 있는데 그 관련한 기술특허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았어.”

“예, 본부장님.”

유진교가 지적한 사항을 팀장이 적었고,

“이쪽 관련 법규는 어떻게 돼 있어요? 재고 자산 표에는 표시되지 않았는데 계약서에 명기할 경우, 이걸 되찾아 올 방법이 있을까?”

“내일 현지 법무법인을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천중명의 질문을 신상훈이 메모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장인처럼 인수는 이렇게 한 가지, 한 가지를 모두 확인한 뒤에 그걸 다시 회계법인과 법무법인에 넘겨서 문서로 확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통상 회계법인과 법무법인은 계약서에 명기된 인수대금의 1에서 1.5퍼센트를 가져가고, 출장이나 상담에 들어가는 시간을 계산해서 자문료를 챙겨간다.

“후! 잠시만 쉬었다가 할까요?”

현지 시각 오후 3시 30분에 천중명은 연필을 내려놓고 테이블에서 상체를 세웠다.

“커피 좀 더 드릴까요, 회장님?”

“그보다는 이 근처에 산책할 만한 곳이 있을까?”

“호텔 앞 도로를 따라 대략 30분 정도 걸리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중간에 옛날 동화책에 나오는 모양의 오래된 성들이 있어서 경치도 나쁘지 않습니다.”

천중명의 질문에 신상훈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치안은?”

“이쪽은 크게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간혹 고등학생들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욕을 던지거나 아주 가끔 폭력을 행사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두려워서 산책을 못 할 정도는 아닙니다.”

안전을 염려한 유진교의 질문에도 신상훈의 답은 막힘이 없었다.

“잠시 걷고 싶은데 어떠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답을 한 유진교가 너희는 어떠냐는 의미로 팀장 셋을 둘러보았다.

세 사람은 산책에 드는 30분이 아까운 눈치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럼.”

눈치껏 일어선 신상훈을 따라 천중명과 유진교가 회의실을 나섰다.

호텔을 나선 뒤에 천중명은 커다랗게 숨을 들이켜서 시차를 핑계로 달려드는 피로를 떨쳐내고는 천천히 걸었다.

먼저 둘레를 남자 걸음으로 걸으면 대략 20분쯤 걸리겠지 싶은 공원이 나왔다.

“중국이 끝까지 승용차 부분을 가져가겠다고 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세요?”

결국, 걸으면서도 천중명은 인수팀 모두의 숙제 같은 문제를 꺼내 들었다.

“그것만큼은 회장님께서 방향을 주셔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블루크루드를 위한 인수라서 트럭 쪽이 우리에게도 더 유리하긴 하지만, 과연 리온자동차에서 승용차 부분을 제외하고도 매력이 있느냐는 데이터로 결정 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유진교의 답을 들은 다음이었다.

천천히 걷던 천중명은 산의 중턱에 있는 성에 시선을 빼앗겼다.

맑은 하늘, 짙은 나무, 그 사이에서 원통을 여러 개 세운 뒤에 꼭대기에 뾰족한 탑을 씌워놓은 듯한 성을 보자 마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중세 유럽의 어딘가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천중명의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저 성이 매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 돈으로 대략 12억 원 정도 합니다.”

“너무 싸지 않아요?”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회장님.”

신상훈의 답을 들으며 천중명은 다시 한 번 성에 시선을 주었다. 이래서 재벌들이 온갖 곳에 쓸데없는 콘도나 건물, 집 따위를 사는가 싶어서였다.

한순간에 넘어갈 수 있다, 이런 쓸데없는 유혹에.

그리고는 이 성의 유지비를 위해 비자금을 만들려고 할 테고, 비리와 손을 잡게 될 게 분명했다.

“후우. 공기 참 좋네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천중명은 잠시나마 가졌던 욕심을 길게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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