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 방심할 때, 아시잖습니까 (1)
스톡홀름의 알란다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6시였다. 말이 스톡홀름이지 비행기로 시내를 통과해 40킬로미터를 더 가야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스톡홀름 상공을 날고 있어서 달랑 야식 한 번 먹고 내려야 하는 서운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러나 천중명이 그걸 표시할 수야 있겠나.
승무원이 다가와 자리를 빠르게 정리해주는 동안, 천중명은 일어나 있는 유진교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식사를 준비할 때 깨어났습니다.”
“깨워주시죠?”
“워낙 곤히 주무셔서요.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비행기가 커다랗게 몸통을 틀며 착륙을 준비했다. 13시간의 비행이 길기는 길었던 모양인지 손과 발이 부어서 구두를 신는 것이 꽤 불편했다.
기이이이잉.
커다란 엔진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왼편으로 기울어 방향을 틀 때였다.
마지막으로 좌석을 점검하는 것처럼 통로를 걸어온 여직원이 천중명의 옆에 서서는 진심이 묻어난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모시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어셋을 준비해줄까 하고 물었던 그 승무원이었다.
“동생이 지경그룹 계열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정직원이 되어서 동생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어느 계열사인지,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묻지 않았다.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드시겠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동생이 회장님 자랑을 많이 했었습니다. 언제고 꼭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모실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한 비행이었습니다.”
머나먼 스웨덴의 스톡홀름 상공에서 동생이 정규직이 된 것에 감사하는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이번 출장에서 좋은 성과 거두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회장님. 늘 건강하십시오.”
말을 마친 승무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에 앞으로 걸어갔다.
“이럴 때면 회장님을 모시는 일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본부장님은 힘들어서라도 싫으셨을 것 같은데요?”
“최만호 실장이 좀 힘겨워했지 저는 아닙니다.”
어쩐지 뻔뻔하게 느껴지는 유진교의 대꾸를 듣는 사이에, 바퀴를 아래로 내렸는지 묵직한 진동과 함께 제법 큰 소음이 달려들었다.
“이번 클린 지경의 발표 이후에 최만호 실장도 느낀 바가 컸던 모양입니다.”
커다래진 소음만큼 목소리를 높인 유진교가 최만호의 심정을 전해주었고, 그 뒤에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13시간의 비행을 마쳤다.
브리지에 비행기가 연결되었고, 순서에 따라 천중명과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위해 서 있는 승무원의 앞으로 걸었다.
“즐거운 출장 되십시오.”
승무원들의 인사에 웃는 얼굴로 답례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브리지를 향해 나섰다.
퍼스트 클래스, 비즈니스 클래스, 그리고 일반석의 순서로 내리는 바람에 팀장 셋이 뒤늦게 급한 걸음으로 브리지를 빠져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얼른 입국 수속부터 처리하지. 현지 팀장은?”
“입국 게이트 앞에 도착해 있다는 문자를 확인했습니다.”
출입국관리소에는 새벽인데도 입국자가 꽤 많았다.
그나마 앞서 내린 덕분에 다행히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회장님. 가방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커피를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 명이 다 들 수 있나요?”
“카트를 이용할 테니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과 제가 여기에 있으면 직원들이 오히려 불편합니다.”
출발할 때라면 비서실 직원들이 있으니 맡겼다 치더라도 함께 비행기를 탔던 피곤한 직원들에게 굳이 가방을 떠넘길 이유가 있을까?
천중명의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직 우리 기업은 회장님을 모신다는 의미가 각별합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서류가방을 드시는 것으로 직원들에 대한 존중은 충분히 보이셨습니다.”
유진교가 가르침 같은 조언을 건네고 있어서 더는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대신 회장님께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주시면 직원들은 그런 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유진교의 조언을 받아들인 천중명은 그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외국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흔히 듣는 미국이나 일본, 중국, 영국이 아니라 스웨덴이어서 어딘가 더 생소한 느낌이었다.
스웨덴에 도착한 첫인상은 스쳐 가는 모든 남자가 모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개성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청소하는 직원까지 갸름한 얼굴에 분위기 가득한 눈,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키, 금발, 그리고 천중명이 보아도 매력적인 코와 턱선을 지니고 있었다.
뭔가 지고 들어가는 느낌으로 시선을 돌린 천중명의 눈에 벽마다 걸린 커다란 사진들이 들어왔다.
유명한 사람들인 모양인데 딱히 아는 얼굴은 없었다.
‘디자인이란 게 무섭구나.’
곳곳에 배치된 사진들, 표지판, 글자체, 의자, 복도의 형태, 기둥까지, 공항은 얄미울 정도로 깔끔하고 부러울 정도로 여러 가지 디자인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쪽입니다.”
외국의 풍경에 익숙한 척, 주변을 살피는 천중명을 유진교가 불렀다.
“긴 여행에 고생하셨습니다. 현지 책임자 신상훈입니다.”
그리고 유진교의 앞에서 깔끔한 인상의 현지 팀장 신상훈과 함께 나온 직원 두 명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방 주십시오.”
그가 손을 내미는 것을 유진교가 눈짓으로 말렸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가 출발하고 싶은데 적당한 곳이 있을까? 안에서 트렁크를 찾아 나오면 함께 먹을 예정이니까 세 명이 더 앉을 만한 자리가 필요해.”
“제가 모시겠습니다. 자네들은 여기에서 기다렸다가 팀장들과 함께 앞쪽 라운지로 와.”
지시를 마친 신상훈이 안내하듯 방향을 가리켰고, 천중명과 유진교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걷는 내내 천중명은 처음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 세련된 디자인과 조화가.
이런 면은 아무리 독촉한다고 해도 단기간에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더 부러웠는지 몰랐다.
2분쯤 이동한 신상훈은 물결치듯 휘어진 공간의 안쪽에 있는 라운지의 소파를 선택했다.
“커피만 주문하면 되겠습니까?”
“샌드위치는 직원들이 나오면 그때 주문하고, 지금은 커피만 부탁해요. 그리고 내가 사기로 한 거라서 이 카드로 계산해주고.”
유진교를 슬쩍 보며 의견을 물었던 신상훈이 공손하게 카드를 받아들고 안쪽으로 움직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눈이 따가웠는데 힘들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는 동안, 팀장 세 명과 현지 직원 두 명이 두 대의 카트를 끌고서 소파로 다가왔다.
천중명의 개인카드로 그들이 마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한 뒤에 다 같이 앉았다.
“호텔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세 시간가량 이동해야 해서 리무진 버스를 준비했습니다. 승용차에 앉아 계시는 것보다는 좌석을 눕힐 수 있는 버스가 오히려 좀 더 편안하실 겁니다.”
유진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상훈의 판단이 현명한 것임을 인정해주었다.
커피는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쓴맛이 강했고, 샌드위치 역시 상상 이상으로 별로였다.
하긴, 공항에서 맛있는 음식을 기대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인수와 관련한 이곳 분위기는 어떤가요?”
정말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천중명이 질문했고,
“중국은 승용차 파트만 인수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리온자동차도 어차피 트럭판매에서 이익이 나오는 상황이라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신상훈이 빠르게 답을 했다.
“우리에게는 불리한 전개로군.”
말을 들은 유진교가 느낌을 내놓았고,
“스웨덴의 현실도 우리에게는 불리합니다. 잔업이나 야근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의 정서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얼마를 버느냐보다 어떤 삶을 사느냐를 중시한다고 보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이번에도 신상훈이 그에 맞는 답을 했다.
대강 쉬었다.
“이제 출발하죠?”
“예, 회장님.”
천중명의 의견에 유진교가 답을 하면서 일행이 모두 일어서 공항 밖으로 움직였다.
버스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커다란 가방을 화물칸에 싣는 동안 천중명과 유진교가 먼저 올랐는데,
“안녕하시요?”
스웨덴 사람이 분명해 보이는 기사가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눈인사를 건네는 천중명의 뒤에서 유진교가 우리말로 답을 하고는 중간 자리에 앉았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천중명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디자인이 생활 곳곳에 깔린 나라에서 생산한 자동차가 디자인에 실패해 영업실적이 엉망이고, 소위 말하는 ‘잔 고장’이 많다는 오명을 얻은 것이 그렇다.
버스가 출발했다. 비행기와 달리 버스 안에서 서류를 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천중명이 의자를 뒤로 눕히고 잠을 청하자, 잠시 뒤에 유진교, 이어서 팀장들이 의자를 눕히는 소리가 순서대로 들렸다.
**
곤란한 상황에 놓인 정안규는 그래도 아직은 아쉬운 소리가 통하는 후배 검사와 마주 앉았다.
서초동의 ‘어부와’라는 횟집 안쪽 방이어서 딱히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말과는 달리 후배 검사는 대구탕을 절반이나 남겼다.
“선배님. 어천수가 자동응답기 수준입니다.”
그런 뒤에 후배 검사가 결국 말을 먼저 꺼내놓았다.
“질문을 던지면 고민할 것도 없이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메모까지 증거로 내밀어서 어떻게 덮을 방법도 없습니다.”
“하아. 왜 그렇게까지 하지?”
“선배님이 조서 받으라고 했는데 바로 골인되니까 혼자 총대 메고 죽으란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같이 죽기 싫으면 얼른 손을 써라, 이런 느낌입니다.”
시선을 떨군 정안규가 “쯧!” 하는 소리에 이어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선배님 계좌도 문제입니다. 송평길 회장이 나름 힘을 쓰고 있어서 크게 터지는 것을 막고는 있지만 지경그룹 법무팀이 워낙 끈질긴 게 문제입니다. 혹시 그쪽과 원한 산 일이 있으십니까?”
후배 검사의 질문을 받은 정안규가 독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허세직에게서 지역구를 넘겨받은 일이 있지. 그 구렁이가 어쩐지 쉽게 물러난다 했더니 지경의 회장과 짜고서 나를 이런 식으로 죽일 줄은 몰랐어.”
“어쩐지. 결국, 허세직 의원이 어천수를 때려잡는 척하면서 선배님을 제대로 찌른 거군요.”
“지경그룹 회장을 만나려고 박영철 부회장과 송중대 전무가 공항까지 뛰어갔는데 어젯밤에 스웨덴으로 출장을 갔지 뭔가. 완벽하게 짠 판에 갇힌 거야.”
듣기만 해도 갑갑하다는 투로 후배 검사가 머리를 긁었다.
“더 걸리시는 건 없습니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정치판만큼 확실히 먹히는 곳도 없어. 쥐꼬리만 한 세비 받아서 보좌관 월급에 지역구 행사, 개인사무실 운영하고 나면 어떻게 인심을 쓰겠나.”
정안규의 답을 들은 후배 검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더 나오면 진짜 큰일입니다. 자동응답기가 오늘은 또 어떤 걸 터트릴지 몰라서요. 그러지 마시고 허세직 의원을 만나보시지요.”
정안규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님. 어천수와 함께 출국하셨던 것은 우연히 일정이 겹쳤다, 그리고 자동응답기가 증거라고 내민 거야 메모밖에 없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 우선 이렇게 밀고 가시고.”
정안규의 고민이 답답했던지 후배 검사가 답을 내밀었다.
“지경그룹 법무팀만 한 발 빠지면 나머지는 문광그룹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먼 미래를 보시고 허세직 의원에게 한번 고개 숙이십시오.”
“그 구렁이가 뭘 요구할지 알아야지.”
“의원직 물러나겠다고 했는데 뜻밖에 동정하는 여론이 일어나니까 눈치 보고 있잖습니까? 선배님께서 복귀할 명분 만들어주시고, 다음번 총리로 밀겠다고 하십시오. 그런 뒤에 기회 보시다가 방심할 때, 아시잖습니까.”
마침내 정안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십시오. 자동응답기가 더 떠들면 이거 진짜 스캔들로 비화됩니다. 그때는 진짜 답 없습니다.”
“알았어.”
식어 버린 대구탕 위로 정안규의 답이 흘렀다.
**
꼬박 세 시간을 달린 버스는 베스트라예탈란드 주의 세브테 쇼핑몰 옆의 호텔에 도착했다.
그저 그런 소도시의 느낌이었는데 무엇보다 풍부한 녹지와 공원이 마음에 들었고, 그만큼 신선한 공기가 오랜 이동에 지친 천중명을 위로해 주었다.
“보고 드렸던 대로 공식 일정은 내일부터입니다. 오전 10시에 공장 견학과 간단한 미팅이 있고, 실무자 접촉은 오후에 따로 일정을 잡아놓았습니다.”
세브테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이라는데 전망은 좋았지만, 직원들 모두가 앉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좁았다.
“내일 공식 방문을 마치시면 스톡홀름에 제대로 된 호텔에 묵으시도록 예약해 놓았습니다.”
“협상의 윤곽이 나올 때까지 이곳에 묵을 테니까 스톡홀름의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실무진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좀 더 신경 써 줘요.”
천중명의 지시에 신상훈이 또다시 유진교를 향해 뜻을 묻고 있었다.
“회장님의 지시대로 해.”
“예, 본부장님.”
아무렴 고작 공장 견학이나 하자고 천중명이 그 먼 거리를 달려왔을까.
회장이란 그저 이렇게 와서 적당하게 관광이나 하다가 가는 사람이란 인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쉬워서 천중명은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 각자 방에 가서 씻고 충분히 더 쉰 다음 점심을 함께하면서 대책을 준비하지. 신 팀장은 중국 쪽 동향, 묵고 있는 숙소가 어딘지를 확인해 줘요.”
“예, 회장님.”
천중명의 지시에 유진교와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에서 거꾸로 8시간을 되돌리면 이곳 스웨덴의 시간이었다.
‘잘들 있겠지?’
자리를 비운 한국의 상황이 염려돼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로 시간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