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 회장은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야 (3)
늦은 밤이었지만, 공항까지 함께 가겠다는 허선영을 말릴 수는 없었다.
입장을 바꾸면 천중명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서였다.
“또 일 생각했죠?”
“보였어?”
길가에 세워진 할로겐등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승용차 안으로 들어왔다가 빠르게 밀려나고 있었다.
“눈빛이 달라져요. 그럴 때 멋있어 보이는 거 알아요?”
허선영이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뻗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있는데도 상체를 기울여 천중명의 볼에 입술을 찍어놓고 자세를 세웠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이렇게 위로해주는 허선영을 위해서라도 멋지게 일을 마치고 오고 싶었다.
‘사랑해.’
운전기사가 들을까 천중명이 입을 뻥긋거리며 마음을 전한 다음이었다.
“안 들려요. 뭐라고요?”
허선영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엉뚱한 대꾸를 꺼내놓았다.
손을 잡고서 아쉬움을 밀어내는 동안, 승용차가 출국장 앞에 도착했다.
갈아입을 옷 따위의 큰 가방은 이미 비서실 직원이 처리해 놓았을 시간이었다.
서류가방을 든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다가온 세 명의 팀장과 인사를 나눈 천중명은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유진교의 앞에서 무언가를 간곡하게 설명하는 박영철을 보고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와이파이 망 개방으로 내일 당장 자이로텔레콤이 문을 닫는 것도 아닐 텐데 출국을 앞둔 유진교를 붙들 만큼 급한 일이 뭐가 있을까?
그래! 그것도 네 사정이겠지.
워낙 출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참이어서 다른 여유가 없었다. 급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유진교에게 매달리는 박영철을 두고 천중명은 데스크로 향했다.
퍼스트 클래스는 줄을 서지 않아서 좋았다.
여권을 제출하고 티켓을 받은 천중명은 바로 허선영에게 몸을 돌렸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들어가.”
“올 때 꼭 연락해줘요. 공항에 나와 있을게요, 영화에서 보면…, 알죠?”
천중명에게 밝은 모습을 주려는 것도 있었고, 지난번 삼중호텔 일 이후로 부쩍 자신감을 얻은 모습이어서 나쁘지 않았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 할 시간이어서 천중명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천 회장…님.”
뜻밖에도 축 처진 얼굴을 한 송중대가 천중명의 앞으로 다가왔다.
“천 회장님!”
뒤늦게 이쪽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유진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박영철이 급한 걸음으로 뛰어왔다.
“나오셨습니까?”
두 사람의 뒤에서 유진교까지 인사를 전하고 있어서 출발을 앞두고 확실히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바쁘니까 용건이 있으면 비서실에 메모 남겨둬.”
“잠시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천 회장님. 다른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려 달려드는 모습에 천중명은 짜증이 불쑥 올라왔다.
“코리아클럽 회원이랍시고 불러서 멋대로 굴더니 이제는 비행기 출발시간 15분을 남긴 사람을 붙잡아? 너희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회장님. 들어가셔야 합니다.”
천중명의 반응을 본 데다, 실제로 비행기 탑승에 늦을 것을 염려한 유진교의 재촉이 있었다.
천중명은 곧바로 출국게이트로 몸을 돌렸다.
“탑승하기 전에 전화 한 통만 부탁합니다! 돌아오는 대로 와이파이 망 개방에 따른 협의를 하겠다는 한마디면 됩니다.”
“천 회장! 전화 한 통 해줄 수 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뭐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망신을 주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잘나갈 줄 알아?”
박영철의 안타까운 바람을 짓밟은 송중대의 고함에 천중명은 출국게이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결국, 몸을 돌린 천중명 앞에서 두 인간이 기대, 서운함, 불안함을 뭉뚱그린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일이 꽉 막힐 때가 있다. 누구나 그래.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너희도 마찬가지고.”
천중명은 냉정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원숭이에 비교할 정도로 잘난 사람들이니까 내게 매달리지 말고 너희 능력으로 풀어 봐. 일이 생겼다고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건 원숭이도 하는 일이잖아?”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어!”
마지막까지 자존심 한 조각을 움켜쥔 송중대의 대꾸였다.
“불행한 환경에서 세상이 던진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런 이들을 존중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계속 생겨날 거다.”
두 인간이 더는 말을 붙일 엄두가 안 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회장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유진교의 권유에 천중명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에 출국 수속을 마치고는 고개 돌릴 겨를 없이 탑승구에 들어섰다.
출발시간이 임박해서 그런지 천중명과 유진교, 팀장들이 탑승한 직후에 비행기의 문이 바로 닫혔다.
“도착해서 뵙겠습니다.”
팀장 세 명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천중명과 유진교는 퍼스트 클래스로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자.
천중명은 국제선도 처음이었지만, 퍼스트 클래스는 더더욱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평창동 저택과 집무실, 삼성동 빌라의 화려함을 경험한 덕분에 태연한 척했다만, 만약 몸이 바뀐 직후에 바로 퍼스트 클래스에 올랐다면 촌티를 냈을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승무원이 천중명과 유진교를 맞아주었는데 대략 10개의 좌석에 두 명의 승객이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당장 보이는 승무원만 세 명이어서 거의 일대일 대응 수준이었다.
좋다, 돈이라는 건.
한쪽에 거꾸로 매달려 조명을 받는 와인 잔, 둥그런 칸막이로 감싸 다른 승객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좌석, 길게 눕고도 남을 널찍한 공간까지.
좌석에 앉은 천중명은 옆에 놓인 주머니에 시선을 주었다.
유진교가 거침없이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열어 실내화로 갈아 신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마치 익숙한 척 그를 따라 실내화를 꺼냈다.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 있는 건지.
그런데 어떻게 그걸 또 꺼내서 확인할 수 있겠나.
“구두를 보관하겠습니다.”
승무원 두 명이 다가와 천중명과 유진교의 구두를 사물함의 아래쪽에 넣었고, 다시 담요와 내복처럼 생긴 옷을 가지고 다가왔다.
저걸로 갈아입으라고?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잠옷 모양이었다.
“커튼 안에서 갈아입으시는 동안, 주무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살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지금 잘건 아니고, 나중에라도 잠시 눈만 붙일 테니까 그 옷은 필요 없어요.”
유진교가 세련되고 능숙하게 거절하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같은 의미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필요하시면 언제고 말씀해 주세요.”
세상 참.
어쩌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건지.
우우우우웅.
국제선 비행기는 엔진 소리부터 국내선과 다른 느낌이었다.
가벼운 음료와 견과류를 먹었고,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이동하는 동안 승무원들이 비상시 요령을 설명해주었다.
비싼 만큼 좀 더 집중해서 봐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박태곤 회장이 어떤 식으로든 와이파이 망에 관해 의논하겠다는 답을 가져오라고 한 모양입니다. 제게 전화라도 한 통 넣어주거나 귀국 후에 의논해 주겠다는 약속을 달라고 매달렸었습니다.”
팀장들이 준비한 자료를 꺼낸 천중명은 뒤늦게 시선을 주었다.
“평창동에서 받은 전화로 내용은 대강 짐작했습니다. 총수님께서 박태곤 회장의 성격이 불같다고 하시며 웃으시던데요?”
“박태곤 회장이 총수님께 대들었다가 두 번에 걸쳐 사과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언제고 무용담을 들을 날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하여간, 다른 그룹의 총수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천호득과 충돌했었다는 사연이 나온다.
“박영철 부회장에게는 회장님과 의논한 뒤에 답을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잘하셨어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승무원들이 음료수 잔을 치웠고, 활주로를 달린 비행기가 한참을 올라간 뒤에 안정을 찾았다.
천중명은 테이블 위에 자료를 펼치고는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유치하지만, 슬쩍 왼편의 유리창도 보았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둥그런 칸막이 안에 앉아 개인 조명에 의지해 서류를 살피는 경영인, 정장 바지에 팔을 걷은 셔츠를 입은 천중명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두 명의 승객이 눕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리온자동차는 안전시설과 차체 강성에 관한 한 손꼽히는 회사였다. 그러나 고루한 디자인과 잦은 고장, 시장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모델 생산 탓으로 트럭이 벌어들이는 수입을 까먹으며 버티는 형편이었다.
중국의 거양자동차의 목적은 리온이 지닌 노하우와 기술이었다.
그들은 인수 비용을 좀 더 비싸게 지불하더라도 부담이 없었다. 빼낸 기술을 이용해 중국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며 배 터질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기술이 빨린 리온이 무너지는 거, 상관없다.
사악한 짓이라고 욕먹는 것도 두렵지 않다.
중국의 내수가 워낙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어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술을 빼갈 수 있으면 상관없다는 투였다.
지경그룹은 상황이 달랐다.
인수 후에도 리온의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리온의 정상화를 통해 블루크루드를 생산하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살피던 천중명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본부장님. 우리가 거양자동차를 밀어내고 리온을 인수하면 실제로 중국시장이 막힐 위험이 있다고 보십니까?”
“중국은 원래 그런 시장입니다. 어느 한구석이라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온갖 트집을 잡아 시장 진입을 막았고, 이미 그런 사례들이 꽤 있습니다.”
“그렇군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주었다.
리온의 정상화에 얼마의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지, 또 투자했을 때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등 문제는 끝도 없었다.
보고서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천중명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이번엔 유진교가 상체를 기울였다.
“사업은 끝없이 앞을 막는 장애물을 헤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과정이라고 배웠습니다.”
“총수님이 그러시던가요?”
“그렇습니다.”
비행기에 타고나서 처음으로 둘이서 웃었다.
“회장님께선 지금껏 지경을 그렇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저는 이번 인수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그게 궁금합니다.”
“인수했다 치더라도 경영정상화에 실패해서 손 털고 나오면 능력 없는 회장 되기 딱 좋은데요?”
“회장님께서 그러실 리가 있습니까?”
둘이서 잠시 쉬는 것을 눈치챈 것처럼 승무원이 다가왔다.
“야식이 괜찮은데 어떠신가요?”
다시 한 번 솔직해지자.
일등석을 처음 타봤는데 먹는 것이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가볍게 먹는 건 나쁘지 않겠는데 본부장님은 어떠세요?”
“출출하긴 합니다.”
돋보기를 내려놓은 유진교의 답에 스튜어디스가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잔치국수, 동치미 국수, 육회비빔밥, 샌드위치 등이 있었고, 개별 메뉴마다 샐러드와 과일, 빵, 아이스크림이 함께 나온다.
이걸 야식이라고 부르나 싶었는데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었다.
“샌드위치가 좋겠네요.”
“나는 잔치국수로 합시다.”
천중명과 유진교의 주문을 받은 스튜어디스가 미소와 함께 앞으로 움직였다.
서류를 옆으로 내려놓은 두 사람은 야식을 즐기며 1927년에 설립되었다는 리온자동차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맛은 별로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야식을 먹은 지 한 시간쯤 지나자 이 고급스러운 좌석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회장님. 안 주무십니까?”
“이것만 보고요. 먼저 주무세요.”
“죄송하지만, 먼저 눕겠습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
한국시간으로 새벽 4시이니 충분히 피곤할 시간이었다.
승무원의 도움을 받은 유진교가 잠에 빠진 뒤에 천중명은 황성규에게서 받은 비장의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이번 협상에서 결정권을 지닌 세 사람에 관한 정보였다.
앤더슨, 에릭슨, 칼슨.
스웨덴에서는 ‘-sson’이라고 이름 뒤에 붙는 단어의 의미가 누구누구의 아들이란 뜻이니까 세 사람은 순서대로 앤더의 아들, 에릭의 아들, 카알의 아들이란 성을 지녔다.
이대로라면 천중명의 아들은 천슨이 된다.
발음이 별로여서 픽 웃은 뒤에 천중명은 다시 자료에 시선을 주었다.
피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당장 도착하면 만나야 할 세 사람의 특성을 머릿속에 담아두기 위해 천중명은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서류에 집중했다.
승무원 한 명이 앞의 손님 두 명과 유진교의 잠자리를 살피다가 고개를 든 천중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 피곤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잠시 눈을 붙일 생각입니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천중명이 눈을 붙이는 것이 몹시 반가운 듯 승무원이 움직였다.
양치를 위해 화장실에 들른 천중명은 이를 닦으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한쪽에 입을 헹구라고 놔둔 생수, 도대체 왜 여기 있는지 이유조차 모를 초콜릿, 가글, 향수, 예쁘게 접어놓은 수건까지 구경할 것은 많았다.
개운하게 입을 헹군 천중명이 나왔을 때 이미 침대로 변한 좌석 위에서 베개와 리넨 이불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천중명은 자리에 누웠다.
달각.
스위치를 누르자 퍼스트 클래스의 모든 공간이 어둠에 잠겼다.
엔진인지 바람인지, 아니면 에어컨디셔너의 소리인지 모를 소음 사이에서 나직하게 유진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천중명이 눈을 감은 직후였다.
“회장님.”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 승무원이 속삭이듯 천중명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바로 앞에서 승무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음을 줄여주는 이어셋이 있습니다. 드릴까요?”
유진교의 코 고는 소리가 천중명의 잠을 방해할까 염려됐던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답을 한 천중명은 다시 눈을 감았다.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풀리지 않는 긴장 틈으로 잠이 몰려들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비행을 위해 들어가는 적지 않은 비용은 그만한 성과를 얻어달라는 투자와 같았다.
지경그룹의 천중명, 유진교, 팀장 세 명과 현지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직원 세 명이 리온자동차의 앤더슨, 에릭슨, 칼슨을 얼만큼 설득하느냐의 대결이었다.
그것도 돈지랄을 해대는 중국의 거양자동차와 경쟁하면서 말이다.
‘재미는 있겠네.’
천중명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