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 회장은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야 (2)
문광그룹 송중대는 급한 걸음으로 부친인 그룹 총수의 집무실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다섯 명의 부속실 직원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송중대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똑똑똑.
부속실 직원이 노크하자 송중대는 얼른 재킷을 살핀 뒤에 앞의 단추를 잠갔다.
차남인 탓에 후계자 경쟁에서 불리한 데다, 장남인 형이 승승장구하고 있어서 이렇게 불러줄 때 반드시 뭔가를 보여야 했다.
“부르셨습니까?”
“앉아.”
송중대는 이미 소파에 있던 법무팀장과 눈인사를 하고는 그의 맞은편, 상석에 앉은 총수 송평길의 오른편 앞에 앉았다.
법무팀장이 있는 자리?
계열사 대표회장이나 그룹 부회장 자리라도 주려나?
송중대는 일부러 표정을 무겁게 누르고서 송평길이 건넬 말을 기대했다.
“너, 천중명 회장과 안면이 있다고 들었다.”
“예?”
퍼뜩 시선을 들었던 송중대가,
“예, 코리아클럽에서 한 번 만났습니다.”
하고는 삼중호텔에서 만났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삼중호텔에서도 만났었다고 하던데?”
“예. 그때도 봤습니다.”
송평길의 나직한 질문에 송중대가 화들짝 놀라 답을 꺼냈다.
“정안규라고 다음번 총리로 떠오르는 의원을 후원했는데 하필이면 어천수라는 망나니와도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정안규 계좌를 조사하다가 우리 쪽이 드러났다.”
기대와 전혀 다른 내용에 송중대는 숨이 턱 막히는 상태에서 부친인 송평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듣자 하니 삼중호텔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도대체 어떤 인간이 아버지인 송평길에게 이런 말을 전했을까? 박영철과 윤세계는 아닐 테니까 의심이 가는 사람은 윤병지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번 일을 조용하게 넘기려고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만, 다른 무엇보다 지경그룹의 법무팀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그걸 먼저 해결해야 한다. 너, 말을 듣고 있는 거냐?”
“예? 예, 총수님.”
송평길의 날 선 질문을 받은 송중대가 얼른 잡생각을 떨쳐냈다.
“지경그룹 법무팀이 반걸음만 물러나 주면 어떡해서든 수습될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천호득 명예회장을 만나는 것도 생각해 봤다만, 그분은 신임회장 관련된 일에는 입도 떼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말끝에 송평길이 한숨을 내쉬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일이 공교롭게 되려고 하필이면 오늘 천 회장이 자정 비행기로 출장을 간단다. 그러니까 그 전에 만나 봐.”
쭈뼛대는 송중대를 송평길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윤병지 부회장에게서 말 들었다. 천 회장 앞에서 건방을 떨었다지? 그러니 그 일부터 사과하고, 무릎을 꿇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든 이번 일로 능력을 보여 봐.”
지시를 내린 송평길이 번득하는 눈길을 곧바로 던졌다.
“내가 검찰에 불려 나가 망신을 당하길 바라는 게냐? 아니면 이 나이에 새파랗게 어린 천 회장에게 매달리는 것을 보고 싶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답이 없어?”
“그게….”
고개를 떨군 송중대를 송평길이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못난 놈. 천 회장 같은 사람과 친분을 쌓고 이럴 때 아쉬운 소리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라고 코리아클럽에 보내놨더니, 엉뚱하게 잘난 척하다가 오히려 적으로 만들어?”
“죄송합니다.”
“만에 하나, 내가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는 일이 생긴다면 너는 아예 그룹 근처에도 못 오는 것으로 알아.”
송중대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가 매서운 송평길의 눈빛을 얻어맞고는 다시 떨어트렸다.
“밖에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천 회장의 비행시간을 알려줄 게다. 이제 4시간 남았으니 전화로 매달리든, 공항에 나가든, 알아서 하고, 자정 전에 결과를 알려. 결과가 안 좋더라도 반드시 전화해.”
“예.”
“나가 봐.”
고개를 좀 더 숙여 보인 송중대가 목에 칼을 찬 죄인처럼 송평길의 집무실을 나섰다.
“전무님. 비행기 시간표입니다.”
부속실 직원이 건네주는 메모를 받아든 송중대는 딱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중명의 협조를 못 받으면 후계자에서 제외되는 상황이라니?
얼마나 애걸복걸 매달려야 천중명이 그 무서운 눈길을 접고 법무팀에 지시를 내려줄까?
총수인 송평길이 말을 바꾸는 일은 없다.
그것도 법무팀장을 앞에 두고서 뱉은 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엘리베이터에 탄 송중대는 손으로 문을 짚고서 속에서 터져서 나오는 서러운 울음을 억지로 참아냈다.
**
노크도 없이 박영철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너는 뭐하는 물건이야!”
이렇게 들어올 사람, 그의 부친인 박태곤밖에 없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다른 그룹의 총수들과 달리 박태곤은 임원들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찰 정도로 불같은 성격이었다.
“천 회장과 얼마든지 의논할 수 있다며! 그런데 어떻게 지경그룹의 유진교 본부장조차 우리를 만나주지 않다가 느닷없이 유럽에 출장을 가냐고!”
박태곤의 뒤에 서 있는 임원들은 이미 한바탕 곤욕을 치렀는지 붉어진 얼굴을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말해 봐! 어떻게 된 거야!”
박태곤의 고함이 박영철의 집무실을 터트릴 것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천 회장이 유진교 본부장과 의논하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미친놈! 천하에 쓸모없는 놈!”
이런 거친 말에 반항하는 거, 박영철의 삶에서는 아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기껏 만나서 송중대 같은 멍청이 때문에 일을 망쳐놓고도, 뭐? 유진교 본부장을 만나라 그랬다고?”
박영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야, 이 멍청아! 부회장이 그냥 집무실 깔고 앉아 놀라고 준 직책이냐? 고객이 줄줄이 빠져나가는데 책상에 앉아서 뭘 하고 있던 게야!”
고함을 버럭 지른 다음이었다.
하필 그때 모니터에서 ‘아이고, 이를 어쩌나!’ 하는 효과음이 가느다랗게 들렸다.
눈이 뒤집힌 박태곤이 대번에 달려들어서는 움찔한 박영철의 책상 모니터를 홱 돌렸다.
“에이, 이 천하에 쓸모없는 물건아!”
서글프게도 모니터에서는 부채를 든 멧돼지가 박영철이 제한 시간을 넘겨 자동으로 던진 똥광을 먹고 있었다.
[아싸! 오광입니다!]
멧돼지가 기분 좋게 탄성을 쏟아낸 직후에,
“에이! 이 버러지야!”
휘익! 콰다당!
박태곤이 모니터를 들어서는 소파의 테이블로 집어 던졌다.
“가! 가서 천 회장에게 매달려서 어떤 답이든 받아와! 함께 출장 떠나기 전에 유진교 본부장이라도 만나고 오라고!”
손을 들었던 박태곤이 차마 임원들 앞에서 손을 댈 수는 없었는지 몇 번이나 꿈틀하다가 팔을 내렸다.
“만약, 내가 가서 천 회장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이면 네놈의 그 잘난 부회장 자리 평생 없는 줄 알아!”
씹듯이 말을 뱉은 박태곤이 바람에 날리는 불처럼 돌아섰다.
**
30분쯤 뒤에 도착한 허선영까지 네 사람이 함께 식사했고, 차도 마셨다.
“이제 나가봐야지 않니?”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뭐 하러 미리 가 기다려?”
“선영이도 왔는데 두 사람 시간도 있어야지요.”
이은명의 말을 들은 천호득이 홱 허선영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들른 거라 두 분을 더 오래 뵙는 게 좋습니다.”
그런 뒤에 허선영의 답을 듣자 보라는 듯이 이은명에게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천호득은 저런 고집스러운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린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본부장이라서 잠시만 받겠습니다.”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누른 뒤에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예, 본부장님.”
- 회장님. 윤병지 부회장이 회장님과의 통화를 간곡하게 청하고 있습니다.
“윤병지 부회장이요? 무슨 일인지는 물어보셨습니까?”
- 자이로텔레콤 박영철 부회장과 문광그룹 송중대 전무가 꼭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화를 주시면 말씀드리겠답니다.
출장을 앞두고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굳이 불편할지 모를 통화를 할 이유가 있을까?
짧게 고민했던 천중명은 마음을 굳힌 뒤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 모시고 저녁 먹은 참입니다. 지금은 사적인 청탁을 듣고 싶지는 않으니 일이 있으면 귀국한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답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종료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천호득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이로텔레콤 박영철 부회장과 문광그룹 송중대가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윤병지 부회장을 졸랐던 모양입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얼핏 보기에 천호득은 윤병지를 아는 눈치였다.
“늦은 시간이라 제게 연락할 방법을 찾다가 그리 연락한 모양입니다.”
천중명의 설명에도 천호득은 아직 미진한 눈빛이었다.
하기는 시시콜콜 모든 것을 보고받던 양반이 대강 뭉뚱그린 설명을 들었으니 갑갑함이 오죽하겠나.
“전에 코리아클럽에 갔을 때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 와이파이 망 개방과 관련해서 부탁할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뭔지 알겠다는 투로 천호득이 고개를 끄떡였다.
“박태곤의 성격이 불같아서 그럴 만하지. 그 나이에 회장에게 만나자고 매달리기는 그렇고, 지켜보자니 속은 터지고, 자식 놈 목을 졸라도 몇 번은 조르고 남을 인간이니까.”
설명처럼 말을 건넨 천호득이 느닷없이 “흐헤헤헤헤!”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회장이 말랑말랑했으면 벌써 손에 쥐겠답시고 달려들었을 인간인데 지금 속이 얼마나 터지겠나. 흐헤헤헤.”
분명 예전에 뭔가 안 좋은 일로 앙금이 있었지 싶은 천호득의 반응이었다.
박영철이야 그렇다 쳐도 송중대는 왜 윤병지에게 매달렸다는 거지?
박영철 혼자 조르기는 뭐해서 함께 갔던 건가?
두 인간을 떠올렸던 천중명은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그 잘난 놈들이 아무렴 천중명 없다고 사는 데 손톱만큼이라도 지장이 있겠나 싶어서였다.
**
윤병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연히 밤에 본부장님을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박영철과 송중대가 내용을 짐작하고는 방법이 없겠냐는 투의 간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본부장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혹시 이번 출장 기간이 어떻게 되나요?”
두 사람의 간절한 표정을 외면하지 못한 윤병지가 아쉬움 가득한 음성으로 유진교에게 질문을 건넸다.
“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통화를 마친 윤병지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잘게 고개를 저었다.
“일정조차 불투명한데 대략 일주일 전후로 예상하면 적당할 것 같다는 답이다.”
“아후-!”
손으로 머리를 감싼 박영철의 반응이 먼저 있었고,
“에이, 씨!”
심사가 뒤틀린 송중대의 거친 말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박 부회장이야 그렇다 치고, 송 전무는 무슨 일로 천 회장을 만나려는 거지?”
윤병지가 ‘그렇게 관계를 나쁘게 해놓았는데 만난다고 좋은 일이 있겠나?’하는 뒷말을 삼킨 채 질문을 꺼내놓았다.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그래. 굳이 아픈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겠지. 아무튼, 나는 먼저 일어나겠다.”
삼중호텔의 VIP 라운지에서 일어선 윤병지는 그 길로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어떡하지?”
“하아! 정말 너무하네!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하여간, 높은 자리에 가면 그 인간의 그릇을 알아본다더니 운 좋게 회장 자리 꿰차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몰라!”
송중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엔 박영철이 몸을 일으켰다.
“설마 공항에 가려고? 진짜?”
“그럼 어떻게 해? 우리 영감님 성격 몰라? 괜히 또 천 회장 불편해할 소리 할 거면 송 전무는 여기 있어.”
말을 마친 박영철이 급하게 출구를 향해 걸었다.
“하아. 어떻게 하지? 내가 정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야?”
혼자 남은 송중대는 보기 흉할 정도로 인상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
밤 10시 30분에 천중명은 평창동의 거실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천호득에게 이어 이은명에게 인사한 천중명은 장만섭과 송달순을 보았다.
‘부탁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허선영이 이은명에게 인사할 때였다.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천중명의 팔을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굳이 이유를 대라고 다그치면 그저 가슴이 시켰다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천중명은 자세를 낮춰서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을 안았다.
단박에 천호득의 타박이 날아올 거라 각오까지 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움찔했던 천호득이 팔을 돌려 천중명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조심해, 회장.”
“예, 아버지.”
예상하지 못했던 따뜻한 손길에 천중명의 가슴이 울컥했고, 이은명과 허선영이 눈시울을 붉힌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