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 회장은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야 (1)
2주일이 날아가듯 흘렀고, 그사이 지경그룹은 언론매체를 통해 ‘클린 지경’을 발표했다.
지경의 제품을 구매하고, 60일 이내 고객의 과실이 아닌 불량이 발생한 경우, 100퍼센트 신제품으로 교환해주는 제도였다.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났다.
“아니, 지경그룹은 상생이라는 걸 몰라? 이 시장 혼자 처먹겠다고 달려들다가 목이 막혀 뒈질 수 있다는 건 생각 안 하나?”
경쟁사와 동종업체의 볼멘소리가 현장과 아는 이들을 통해 공공연히 들려왔다.
그러나 실제로 고객들과 현장직원들에게 더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부당한 요구를 하는 ‘악성고객등록’ 제도였다.
- 야! 너 죽고 싶어?
“고객님. 지금 하신 말씀은 모두 녹음되고 있습니다. 폭언을 삼가시고, 원하시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야, 이 쌍년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고객님.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 이상 욕설이나 폭언을 하시면 상담을 중단하고, 지금 녹음되는 내용을 협박과 모욕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것들이 진짜 고객 알기를 개똥으로 아나? 너, 이 쌍년! 거기 어디야? 내가 달려가서 아주 죽여 버릴 거니까 거기 있어! 아냐, 아냐. 그전에 일단 거기 책임자 바꿔!
“고객님은 3회 이상 욕설과 모욕, 협박한 혐의로 상담을 중단합니다.”
통화를 끊은 상담원이 뒤로 물러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놀란 가슴을 진정할 때였다.
그녀의 등 뒤로 내용을 함께 듣고 있던 팀장이 다가왔다.
전 같으면 불벼락이 떨어지고, 인사고과에 감점과 함께 사흘간 재교육에 들어갈 응대였다. 물론, 재교육 기간은 급여에서 제외된다.
그런데 지금은 팀장이 상담원을 향해 엄지를 세워 보이고 잘했다며 칭찬을 건네고 있었다.
“불량고객으로 등록해서 전문 상담부서에 넘겼으니까 안심해. 그쪽에서 서비스 신청 부분을 확인해서 처리할 텐데, 법무팀에 넘길지, 아닐지만 결정해줘.”
“팀장님. 정말 우리…, 이래도 되는 거예요?”
상담원의 놀란 질문에 팀장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회장님의 특별지시잖아. 상담직원들이 더는 인격을 팔지 말라는 지시. 어떻게 할까? 법무팀에 넘겨, 아니면 이번 건은 전문 상담사에게 넘기고 끝내?”
“고소 안 할래요. 이 정도만 해도 저 절대 상처 남는 거 없어요.”
팀장의 다독임을 받은 상담원이 다음 통화를 위해 헤드셋을 머리에 걸었다.
분위기가 확실히 전과 달랐다.
매뉴얼에 정해진 친절과 달리 지금 통화가 연결된 상담원들은 고객들의 불만에 열과 성을 다해 매달리고 있었다.
“네, 고객님. 많이 불편하셨겠습니다. 말씀해주신 카드 사용기록과 성함 확인했습니다. 52일 지난 제품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무상 교환 대상이십니다.”
- 이걸 굳이 바꿀 필요 있어요? 기사분만 보내주세요.
“아닙니다, 고객님. 오늘 중으로 신제품을 배송해서 고객님의 불편을 최소화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럴 필요까지 없다니까요. 나는 제품에 만족해요. 그러니 기사분만 보내주세요.
고객 중에는 신제품 교환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
지경백화점의 고객상담실 과장은 매장의 요청으로 급하게 4층 숙녀복 코너로 달려왔다.
“이거 못 바꿔줘?”
“고객님. 6개월 전에 구입하신 의류입니다. 이미 세탁하셨고, 얼룩까지 번진 상태라 교환이 어렵습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여기에서 한 달에 얼마를 팔아주는 줄 알아! 야. 너 같은 새끼하고 말도 하기 싫으니까 여기 상급자 불러와!”
지금까지 숱하게 이런 클레임을 제기했던 이 여자 고객은 이미 매장 직원들 사이에 ‘개장시간의 저주’로 불렸다.
개장과 동시에 첫 손님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양손에 두 달, 혹은 반년 전에 구입한 제품을 가득 들고 와서는 늘 이런 식으로 환불을 요청했다.
이 여성 고객의 횡포는 식품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일을 한 박스 사가서는 통상 한 달 정도 뒤에 한 개나 두 개 남은 것을 가져와 썩어서 버렸다며 환불을 요청하는데 거부하면 고성과 욕설, 패악을 부려서 뜻을 이루곤 했었다.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서 보상도 없이 교환만 해준다는 거야!”
여자 고객이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지른 뒤였다.
“고객님은 이 시간 이후로 지경그룹 계열의 어떤 제품도 구입하실 수 없으며, 카드, 보험도 가입하지 못하십니다. 이점을 분명하게 통지해 드립니다.”
“너,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어?”
“더 욕을 하시면 경찰을 부르고,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 미친 새끼가! 너, 이 새끼야! 몇 살이야? 너는 집에 어른도 없어? 하기야 그렇게 못 배워 처먹었으니까 이런 일이나 하겠지!”
고객상담실 과장은 벨을 눌렀다.
“경찰 불러주세요.”
“오냐! 불러라, 불러! 이 새끼야!”
화악! 퍼억!
분이 터진 여자가 쇼핑백을 휘둘러 고객상담실 과장의 얼굴을 때렸다.
“저기 보시면 CCTV 카메라가 있습니다. 고객님을 폭행죄와 모욕죄로 고소하겠습니다.”
“하! 나, 이것들이 진짜!”
여자가 달려들려 할 때였다.
상주했던 것처럼 정복 경찰 두 명이 들어왔다.
“아휴! 잘 왔어요! 이 사람이 지금 나를 고소한다고 겁주고 얼마나 무섭게 구는지…!”
여자가 경찰을 향해 하소연할 때였다.
“과장님. CCTV 녹화본 넘겨주시고, 고소장 작성해 주세요.”
여자의 하소연을 듣는 경찰 옆에 서 있던 다른 경찰이 고객상담실 과장에게 능숙하게 요청을 건넸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온갖 패악을 부리던 여자가 멍한 눈으로 경찰과 과장을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문 것이 말이다.
**
초기 반응에 관한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최만호가 멋쩍은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클린 지경’ 시행 일주일 만에 지경전자와 백화점, 화장품, 의류 등, 지경그룹 계열사의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물론 구매한 날로부터 60일 이내 불량제품을 무상으로 교환해주는 시스템으로 인한 매출 상승이었는데 당연하게 그만큼의 손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평가는 최만호의 염려를 확실히 벗어난 것이었다.
당연하게 부작용도 있었다.
생산부서에서는 불량품의 교환 기준이 너무 높다는 항변이 계속 올라왔고, 부당하게 불량고객으로 등록되었다는 억울한 사연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기도 했다.
[엄마랑 가서 옷을 샀는데요.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직원이 계속 투덜대는 거예요. 그래서 항의했어요. 그랬더니 대뜸 불량고객으로 등재한다고 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당연하게 매장 직원을 통해 당시 상황을 보고받았고, 영상을 확인했는데 대개는 진상고객의 마지막 발악으로 판명 났다.
보고서를 넘기는 최만호가 다음 내용을 읽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진상고객들이 몰려간 다른 기업들이 대책을 세우기 위해 골머리를 썩인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경백화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백화점은 고객상담실 직원 두 명이 사표를 던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놀라운 것은 진상고객의 일정 숫자는 몇 십억 원하는 아파트에 사는 교수, 의사, 변호사 부인들이라는 분석이었다.
도대체 그 정도 살면서 왜 추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지?
“악성 고객은 끝까지 악성 고객이다?”
다른 곳으로 몰려간 진상고객들의 행패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최만호는 천중명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신기하기도 했다.
젊은 회장은 어떻게 현장의 고충을 그렇게 이해하고, 또 이런 방안을 지시했을까?
“날이 갈수록 성장하시니 내가 회장님을 끝까지 모실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보고서를 덮으며 그는 유진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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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명은 2주가 넘어서야 박승양을 접견실로 불러 마주했다. 그는 얼굴이 핼쑥했고, 눈이 퀭해서 오래 아팠던 사람처럼 보였다.
“어디 안 좋으셨습니까?”
“하아. 천 회장님. 2주가 넘었어요. 그동안 돈이 자꾸만 나를 꼬드겨서 하루도 잠을 편하게 자본 적이 없습니다.”
고해처럼 쏟아낸 박승양의 탄식을 들으며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이렇게 말씀해주신 게 고마워서 그렇습니다.”
“내가 우리 천 회장님 사람이 됐다고 혼자서 얼마나 다짐했는지 모르시지요?”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물 박승양답게 그는 은근슬쩍 천중명에게 부담을 건넸다.
“천 회장님. 나 말이오. 이번에 지경전자 공모 때 돈을 좀 넣어볼까 하는데 어떻소?”
“제가 어떻게 하시라고 말씀드리면 법에 걸리지 않습니까?”
“에이! 작전이 아닌데? 가격을 낮춰 주는 것도 아니어서 상관없습니다. 솔직히 명동에서는 1조 원을 굴릴 곳을 찾기가 힘드니까요. 아 참, 천 회장님.”
박승양이 아무도 없는 접견실인데도 상체를 기울여가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기업을 상대로 돈을 돌리던 게 있는데 금액을 높였더니 제법 큰 회사들이 달려듭니다. 앞으로 그쪽 사정을 적당하게 넘길 테니까 혹시 정보가 필요한 기업이 있으면 미리 말씀하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야, 뭐 무늬만 회장이지요. 그나저나 돈을 어디로 보내드릴까?”
대화의 끝에서 박승양은 참고 참았을 질문을 꺼내놓았다.
“여기 황성규라는 계좌로 2천억 원을 보내주시고, 부탁드리는 두 곳으로 1천억 원씩, 나머지는 박 회장님이 가지고 계셨으면 싶습니다.”
“뭐를? 돈을?”
“예.”
박승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탁자에 놓인 계좌번호와 천중명을 번갈아 보았다.
“1천억 원은 이명선 과장 일임매매 계좌에 넣어주시고, 나머지 1천억 원은 한알저축은행 김도정 부장이 힘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것도 내 이름으로 하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맛있는 꽈배기를 먹은 뒤에 입가에 묻은 설탕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박승양은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내가 돈을 가지고 사고 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현금을 보관하고 굴리는 면에서는 회장님이 저보다 한 수 위이신 거로 압니다.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청하게 될 것 같으니까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천중명의 답을 들은 박승양이 시선을 테이블로 뚝 떨어트린 뒤에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졌네. 나는 아예 상대가 안 되는 거였어.”
“예?”
“아닙니다. 그냥 나 혼자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박승양이 이제껏 지니고 있던 마지막 욕심을 모두 털어내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오후 5시경에 천중명은 평창동의 저택에 들어섰다.
여름의 문턱에 선 계절이어서 제법 후끈한 날씨였는데도 천호득은 정원에 있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바쁘니까 다녀와서 들르라는 데도.”
“어쩌면 오래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안 뵙고 가요? 건강만 괜찮으시면 모시고 갔으면 싶었는데요.”
“흐헤헤헤.”
천중명의 말이 기특했던 모양인지 천호득이 특유의 웃음을 피워냈다.
“왜 그러고 있어. 앉아. 몸은?”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덥지 않으세요?”
“그래. 뭐 시원한 거 한잔할까?”
“예, 제가 지시할게요.”
송달순에게 시선으로 지시한 천중명이 천호득의 곁에 앉았다.
“중국에서 적극적으로 나온다면서?”
“가격을 세게 부르는데 그쪽은 기술만 빼갈 우려가 있어서 저울질하는 모양입니다. 이번 출장에서 인수의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며칠 사이에 천호득의 고개가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그냥요. 자주 못 봬서 그런지 이런 시간이 아쉬워요.”
가볍게 웃은 천호득이 천중명의 손을 다독여 줄 때 송달순이 메이드와 함께 음료를 놓아주었다.
“마셔.”
“아버지도 드세요.”
천호득은 잔에 꽂아놓은 빨대를 이용해 음료수를 마셨고, 천중명은 잔을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사업은 리듬이 있어. 몰아칠 때 사정없이 밀고 나가야 하지만, 그러다가도 움츠릴 때면 바싹 엎드리는 인내도 필요해.”
“예, 아버지. 그리고 말씀 들었습니다.”
“뭘?”
돌아온 천호득의 시선을 받은 천중명은 시선을 떨궜다.
“형 이야기?”
“예. 조승필 회장을 직접 상대하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윤 실장도 나이를 먹었어.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야.”
“잠잠한 게 수상한 데다 조철행 장관이 급작스럽게 사의를 표명했는데 물어볼 곳이 윤 실장밖에 없었습니다.”
“흐음.‘
탄식 같은 숨을 쏟아낸 천호득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과거는 과거를 살았던 사람이 가져가는 게 맞지. 마침 내가 키웠던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어서 덕을 본 것도 있고. 이제부터 새로운 시대야. 외국의 유명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는 시대.”
천호득은 몇 십 년 전을 들춰보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에는 외국에 있는 회사를 인수하려면 우선 정권에 매달려야 했고, 집어줘야 했고, 심지어 여자를 건드린 뒤처리까지 해주곤 했었다.”
말을 마친 천호득이 과거에서 시선을 돌려 현재의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회장은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야. 형을 살려준 것도 고맙고, 지경의 미래를 기대하게 해준 것도 고마워.”
갑자기 변해 버린 천호득의 모습이 솔직히 낯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겁이 날 정도였다.
천중명은 말없이 일어나 천호득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출장 다녀와서 바닷가에 한 번 모시고 갈게요.”
“또 칼질하는 걸 보라고?”
“설마요. 이번엔 재미있게 지내다 와야죠.”
“흐헤헤헤헤.”
천중명의 손길이 만족스러웠는지 천호득의 웃음이 길게 늘어졌다.
“조심해서 다녀와.”
“예, 아버지.”
오늘 밤 자정에 리온자동차 인수팀과 비행기를 타면 13시간 후에는 스웨덴에 도착한다.
블루크루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천중명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출장이고, 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