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51화 (151/315)

# 151

151. 그 정도는 걸어야 서로 공평하지 (3)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는 평창동 저택의 정원 안쪽이었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그곳에서 조승필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유학을 통해 미국의 기업에서 붙잡았을 정도로 실력을 갖췄고, 사촌 형이 장관일 만큼 집안 든든한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지금은 아예 고개까지 흙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계열사 회장이 대단한 직책이구나? 직원들이 굽실거리니까 종놈이 주인을 물어뜯으려 들다니? 그게 배웠다는 놈이 취할 자세냐?”

“총수님! 제가 직원들을 부리다 보니 본분을 망각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총수님께서 내려주신 것인데 제 것인 양, 버릇없이 굴었습니다!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흐허하하.”

어쩌면 웃음마저 저토록 매몰차고 냉정한지 오지은은 뱀 앞에서 굳어버린 생쥐처럼 그저 오돌오돌 떨기만 했다.

“더럽고 추악하게 시작했고, 그렇게 버텨서 여기까지 왔다만 세상이 바뀌었지. 그렇다고 해도 말이다. 과거 사람인 내게 네놈 따위는 그저 종놈이야. 내가 언제고 발목과 손목을 잘라서 개먹이로 줄 수 있는 종놈.”

“총수님! 잘못했습니다!”

“그런 놈이 내가 임명한 신임회장에게 대들더니 이제는 둘째 놈의 목숨을 담보로 흥정을 걸어? 장관? 독재자의 총애를 받던 시절에나 장관이 무섭지. 너도 나에게 대드는 세상에서 내가 장관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말을 마친 천호득이 흔들리는 고개를 살짝 틀어서 오지은을 노려보았다.

“끅.”

주름에 눌린 눈꺼풀 아래에서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천호득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오지은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토해냈다.

“더러운 년.”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다면 죽기 직전에 느끼는 공포가 아닐까. 몸이 찢길지, 토막 날지,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려 으스러질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현실에 나타났을 때의 공포 말이다.

욕을 들은 직후에 오지은의 몸뚱이가 불쌍할 정도로 처참하게 떨었다.

재벌의 진짜 힘이 이런 거였나?

방송에 휠체어 타고 아픈 척 굴복하는 모습을 보았던 오지은은 문득 과거의 천중명이 천호득의 전화를 받으며 떨어대던 모습을 떠올렸다.

후다닥!

오지은은 그제야 바닥에 무릎을 냅다 꿇었다.

“살려….”

“내가 너 따위를 죽이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오지은의 바람을 천호득은 단박에 싹둑 잘라버렸다.

거기까지였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천호득의 앞에서 몸을 굽힌 조승필과 오지은은 왕 앞에 끌려온 대역 죄인들처럼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조 회장.”

“예! 총수님!”

“누가 보면 오해하겠다. 자리에 앉아.”

“총수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내 자식 둘을 한꺼번에 죽이려 했으니. 어쨌든 앉아.”

마른침을 삼키며 조승필이 쭈뼛쭈뼛 철제의자에 앉았다.

“가서 조철행 장관을 만나. 다음 주까지 장관직에서 물러나면 더 큰 불상사는 없을 거라고. 그리고 너는 미국으로 가서 앞으로 10년은 이 땅에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내가 그 정도는 살아 있을 것 같으니까.”

“예, 총수님. 감사합니다.”

아직 바닥에서 몸을 떨고 있는 오지은을 향해 천호득이 고개를 돌렸다.

“저 더러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인데. 애비가 구치소에 있으니 쫓아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윤 실장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게 하고 싶지도 않으니, 원.”

시선을 돌렸다가는 큰 불똥이라도 튄다는 것처럼 조승필은 아예 오지은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큰 애야.”

“예에, 총수님.”

천호득이 부르고, 장만섭이 답을 하자 조승필은 마른침을 삼켰고, 바닥에 엎드린 오지은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저 물건을 용인의 둘째 놈에게 가져다주고 와.”

“예에. 총수님.”

“너는 둘째 놈과 용인에서 지내. 혹시 애비를 보고 싶거든 윤 실장과 다니고, 억울해서 신고를 하든, 외부에 도움을 청하든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아닙니다, 총수님.”

“이제 그만 저 더러운 몸뚱이를 내 집에서 치워.”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엎드려 있는 오지은을 향해 장만섭이 다가가서는 배에 손을 넣어 냅다 들었다.

“끼윽!”

옆구리에 오지은을 끼운 장만섭이 천호득의 뒤를 돌아 정문으로 걸어간 다음이었다.

“조 회장.”

“예, 총수님.”

“왜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해?”

“총수님께 받았던 것들을 회장님께서 거둬 가시니까 어떡해서든 총수님을 뵈면 혹시 기회가 있을까…. 제가 그만 어리석었습니다.”

고개를 떨군 조승필을 천호득이 조용하게 바라보았다.

정장 차림의 무릎과 팔꿈치에 잔디가 짓눌려 물이 들었고, 가슴과 팔뚝에는 작은 풀들이 매달려 있었다.

“미국으로 가. 가서 사업을 시작해. 내가 도움을 줄 테니까.”

“절대 지경전자와 관련되는 회사나 경쟁사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은 거둬주십시오.”

조승필은 천호득의 권유에 담긴 뜻을 단번에 알아채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럼 이제 살아서는 못 보겠군. 건강하게 지내고. 가끔 안부 전하세.”

“총수님. 부디 강녕하십시오.”

대역죄에서 사면 받은 죄수처럼 몸을 일으킨 조승필이 천호득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받들 듯이 잡았다.

그가 숨 막히게 정원을 빠져나간 뒤에 천호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은 애야.”

“예, 총수님.”

“개인비서가 꿈이라고 했었는데 이걸 보고도 계속 일하고 싶으냐?”

“저는 그저 총수님을 모실 뿐입니다.”

대답이 기특했는지 힐끔 시선을 주었던 천호득이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세상이 바뀐다. 꽉 움켜쥐고 있으면 한두 세대는 버티겠지. 공룡이 그랬다지? 힘만 믿고 설치다가 한 번에 없어졌다고?”

송달순이 아니라 마치 천중명에게 전하는 말처럼 들렸다.

“신임회장은 둘 중 하나일 게다. 그룹을 바꾸던가, 조승필처럼 남아있는 기득권이나 바뀌는 세상에 밀려 사라지든가. 그러니 이런 일은 내가 하는 게 맞겠지.”

천호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송달순을 보았다.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고 싶구나.”

“준비해오겠습니다, 총수님.”

송달순마저 안으로 들어간 바람에 천호득 혼자 남았다.

“배진규가 무척 좋아하겠군.”

천호득은 뜬금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는 쏟아지는 햇살에 시선을 주었다.

“회장이 하는 일에 도움도 될 테고.”

조철행이 물러날 자리에 천호득이 넣고자 하는 다음 대 장관의 이름이 배진규였다.

**

화장품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이중성이다.

그런 그가 오승환 영업이사가 흥분해서 들고 온 공문을 냉정한 얼굴로 내려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단순히 독점권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기본 매출을 보장한다는 제안입니다. 그것도 1년에 5천억 원입니다.”

이중성의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흥분을 억누른 오승환이 공문에 담긴 내용을 강조했다.

“우리 제품은 이미 중국에 유통망이 있어. 그걸 전부 무시하고 독점권을 달라는데 고민이 없어?”

이중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의 정책이 바뀌었다는 말 한마디면 계약 자체가 없어지는 나라가 중국이야. 현지법인도 반드시 중국법인과 지분을 나눠야 하고. 이깟 공문 한 장으로 지분이 포함된 중국진출 건을 회장님께 보고드릴 수는 없어.”

이중성의 말이 갑갑했는지 오승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미라클은 이미 품질을 인정받았으니까 우리는 중국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현지 공장을 설립하고, 그쪽에 치중해서 중국에는 완제품만 판매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화장품의 사이클을 아시잖습니까? 앞으로 1년 안에 미라클의 경쟁제품이 나올 테고, 3년이면 매출이 반으로 줄어듭니다. 중국에 보내는데 드는 수송비와 기간, 생산량도 생각해 주십시오.”

오승환의 말에도 이중성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 사이클이 문제라는 거지. 공장을 설립하는 데 최소 6개월은 걸리지. 그 안에 미라클과 똑같은 용기에 이름까지 같은 제품이 나와. 심지어 내용물도 비슷하게 만든 제품이.”

이중성은 공문을 아예 오승환 앞으로 밀어냈다.

“똑같은 제품에 중국어 글자가 들어 있으면 특허권 침해가 아니라고 하는 나라가 중국이야. 유명 화장품 회사 중에 중국에 현지 회사가 있는지 확인해 봐.”

이중성은 아예 못을 박는 듯한 얼굴로 오승환을 바라보았다.

“중국시장은 신기루와 같아. 처음에는 남는 것이 없어도 매출이 좋으니까 달려들고, 나중에는 유지비와 복제품에 시달려서 건진 것 없이 철수하는 시장. 우리처럼 사이클이 짧은 제품은 절대 들어가서 안 되는 시장이 바로 중국이야.”

“알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경화장품의 결정권자는 이중성이어서 오승환은 결국 공문을 받아들었다.

**

조양회의 보고를 받은 양서평이 눈가에 버럭 짜증을 올려놓았다.

“뭔가 잘못 전달된 건 아니겠지?”

“분명하게 최소매출까지 보장한다고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제안을 거부해? 지경의 회장이란 인간은 경영을 모르는 미친 사람인가?”

“천중명 회장은 내용조차 모릅니다.”

붉은색 천이 기다랗게 늘어진 원형 테이블에 앉았던 양서평이 의아해하는 의미의 시선을 던졌다.

“지경화장품에 먼저 오퍼를 넣어서 그 계약을 선물로 준비하려 했었는데 그쪽 대표가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제품 사이클이 짧아서 공장을 설립할 때쯤이면 경쟁사의 제품이 나올 테고, 또 우리 시장에서 나올 복제품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이었습니다.”

양서평이 고개를 갸웃한 뒤에 다시 서 있는 조양회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이클이라니?”

“화장품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나서 3년이면 경쟁제품이 등장해서 매출이 떨어집니다. 물론 롱런하는 제품이 있기는 한데 대개는 그렇습니다.”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르며 양서평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털어냈다.

“어떻게 하자고? 생각해 둔 방법이 없어?”

“아무래도 부총재님께서 직접 한국을 방문하시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한국의 정치권 인사에게 약속을 부탁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허허, 참.”

어처구니없어하는 양서평의 탄식을 끝으로 침묵이 길게 흘렀다.

**

하루를 비웠던 만큼 일이 많았던 천중명은 오후 늦게 달려온 기용도와 악수를 나눈 뒤에 소파를 가리켰다.

40대 초반의 그는 자연스러운 머리 스타일에 편해 보이는 정장 차림이었다.

“앉으세요.”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줄 때까지 고생이 많다, 최근 임직원들의 동향은 어떠냐,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일인데 전화로는 어렵다고 한 건지 이제 내용을 들어볼까요?”

천중명의 요구를 받은 기용도는 먼저 들고 온 가방에서 결재판을 꺼냈다.

“회장님. 이관수 개발자의 나노셀룰로오스 배터리에 관한 연구소의 분석과 개발계획서, 그리고 개발비용 신청서입니다.”

“그게 벌써 나왔습니까?”

천중명은 놀란 심정으로 그가 내민 결재판을 들었다.

보고서 작성이라는 게 말이 쉽지, 신사업에 관한 내용은 일주일이 꼬박 걸리고, 그 기간을 단축하려면 호텔을 잡아 합숙 느낌으로 작성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결재판을 펼쳐 내용을 살피던 천중명이 고개를 들었다.

하루 만에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고서는 꼼꼼했다.

“연구비로 우선 2천억 원이 들어간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부연설명을 하려던 기용도가 2천억 원의 용도를 살피는 천중명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요?”

“결재해 주시면 먼저 이관수 개발자와 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 뒤에 해외에 특허를 신청할 예정이고, 가능하다면 상장 전에 이 내용을 발표하고 싶습니다.”

“부사장님. 나는 주식으로 한탕을 하겠다는 생각 따위 없습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결국, 주가가 빠질 때 누군가의 손해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여 천중명의 지적을 받은 기용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주가를 욕심낸 것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노린 것은 해외에서 들어올 자금이었습니다. 해외투자자들에게 우선주를 배정하면 의결권에 상관없이 자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부사장으로는 최고의 인재라던 최만호의 추천이 떠올라 천중명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다음으로 이 제품이 상용화되면 앞으로 20년은 지경전자의 세상이 됩니다. 이 제품이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의 고민을 해결할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플렉시블 스마트폰 말인가요?”

“그건 극히 일부분입니다.”

천중명의 시선을 확인한 기용도가 얼른 말을 이었다.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메모리의 생산입니다. 이렇게 반액체 형태로 된 메모리를 생산할 힌트를 얻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기용도의 말을 들으며 천중명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얼마만큼의 수익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기용도의 눈에 타오르는 열정의 반만큼이라도 성과를 낸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 수준이겠구나 싶었다.

“회장님. 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결재를 부탁드립니다. 반드시 상상에서나 있던 메모리와 배터리로 세계 시장을 움켜쥐겠습니다.”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임원의 눈빛을 천중명은 처음 보았다.

“자신 있습니까?”

“특허권 사용료로 현재 메모리 판매금액을 넘어서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회장님.”

천중명은 숨을 들이마신 뒤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관수나 기용도, 두 사람 모두 지닌 의지와 열정이 다를 건 없었다.

기용도가 지켜보는 앞에서 천중명은 협탁 옆에 있던 만년필을 집었다.

사각. 사가각. 사가각.

“결재했습니다. 어디 멋진 결과를 가져와 보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말 좋았던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용도가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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