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 그 정도는 걸어야 서로 공평하지 (2)
점심과 오후의 중간이었다.
노크가 있은 뒤에 결재판을 든 최만호가 들어왔다.
“회장님.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앉아서 하시죠. 시원한 미숫가루 어떠세요?”
“감사합니다.”
천중명이 부속실 직원에게 미숫가루를 부탁한 다음이었다.
“어천수 회장이 구속됐습니다.”
부속실 직원이 나가기 무섭게 최만호가 보고 내용을 꺼냈다.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정치권의 스캔들로까지 번지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어천수 회장은 당분간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부속실 직원이 미숫가루를 가져오는 바람에 잠시 보고가 끊겼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마침 나른하던 참이었다.
천중명은 최만호와 함께 미숫가루를 시원하게 마셨다.
“어천수는 그 정도면 된 거 같고, 매장에서 우리 매니저를 괴롭혔던 여자들과 박상구라는 연구원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일부터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혐의는 우선 영업방해인데 고의성이 입증되면 특허권 침해를 목적으로 했던 것으로 묶을 예정입니다.”
“처벌이 세지는 않겠군요.”
“김민희 매니저가 모욕죄나 협박으로 고소하지 않는 한, 더 큰 처벌은 어렵습니다. 다만, 민사의 경우에는 전체 매출 대비 이미지 훼손으로 처리해서 개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을 청구하였습니다.”
최만호와 법무팀이 최선을 다해 얻어낸 결과였고, 이 이상 무언가를 요구하기 어려웠다.
“고생했습니다.”
천중명은 짧은 인사로 최만호와 법무팀이 만들어낸 결과를 받아들였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악성 고객에 대한 대비책입니다.”
그런 뒤에 화제를 바꾸는 것처럼 최만호는 들고 온 결재판을 천중명이 보기 좋도록 펼쳐주었다.
10분쯤 보고서에 집중했던 천중명은 입술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늘 이렇다.
현장직원들의 고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임원들은 늘 고객, 고객, 그 빌어먹을 놈의 악성 고객의 감정을 다치지 않는 선에서 고민한다.
혹시나 그룹이미지를 망쳤다는 책임을 뒤집어쓰지는 않을까, 너무 강력한 대책을 올렸다가 부작용이 생기면 공연히 문책을 받지는 않을지 그걸 먼저 고민한다.
염병할 관례도 문제였다.
지금껏 현장직원들이 감당했던 몫이니까.
못 견딘 직원이 빠져나가도 새로 들어올 사람은 많으니까.
이런 건 역시 회장이 책임지는 것이 좋았다.
마음을 굳힌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적힌 대책은 현장직원들의 고충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이 정도로 신경 쓰고 있다고 생색내는 수준을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다시 보강해서 올리겠습니다.”
“보강하기 전에 기본적인 선을 정하죠.”
천중명은 우선 결재판을 덮었다.
“먼저 우리 그룹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품질 기준을 강화하겠습니다.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부분까지 현장과 서비스 담당 직원들이 감당하는 구조로는 절대 불합리한 클레임을 근절하지 못합니다.”
어느새 메모장을 꺼내 든 최만호가 천중명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고 있었다.
“전자제품을 기준으로 하지요. 고객의 과실이 아닌 경우, 교환할 수 있는 기간이 어떻게 됩니까?”
“7일 이내 교환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을 60일로 변경하세요.”
천중명의 지시가 어지간히 놀랍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놀라서 고개를 든 최만호의 표정이 그랬다.
“제품을 구입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고객의 과실이 아닌 고장의 경우, 100퍼센트 무상 교환하겠습니다.”
“회장님. 교체 기간만큼은 기획팀에서 다시 검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산파트의 품질관리 기준을 높이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60일입니다. 그 수준에 이르도록 품질을 높이세요.”
천중명은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인터넷은행과 쇼핑몰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지금대로라면 고객을 응대하는 부서의 직원들이 배송과 제품의 불량에 관한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나는 그런 구조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시 고개를 숙인 최만호가 천중명의 말을 빠르게 적고 있었다.
“각 매장과 부서 책임자의 판단으로 불량고객을 등재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습니다. 인바운드의 경우, 욕설, 폭언, 성희롱 등, 상담원을 모욕한 고객의 전화번호와 IP를 등록하고, 해당 고객이 전화를 걸어오면 경고메시지를 먼저 들려주도록 제도를 마련하세요.”
지시를 받아 적던 최만호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매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빈 용기를 가져와 반품을 요구하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의 경우, 전화번호와 인적사항을 확인한 후에 반품 처리하고 그 고객을 불량고객으로 등재하겠습니다.”
“불량고객은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는지 생각해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지경그룹 전 계열사에서 제품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신용카드, 보험가입을 포함합니다.”
메모하던 최만호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빠르게 펜을 움직였다.
“인터넷은행과 쇼핑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송과 불량은 100퍼센트 우리 책임, 그러나 소위 진상고객의 경우 역시 불량고객으로 등재하겠습니다.”
“역시 지경그룹의 제품을 구매하지 못하도록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개방한 와이파이 망의 사용도 본인 이름으로는 회원가입을 하지 못하게 처리하세요.”
메모를 마친 최만호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이번 지시는 후폭풍이 만만치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매장에서 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폭력을 사용하면 무조건 경찰에 고발하고, 기물파손과 구타 등의 범법행위를 한 고객은 우리 법무팀이 형사와 민사소송을 진행하면 됩니다.”
“지경의 이미지가 단기간에 급속도로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최만호의 염려에 천중명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악성고객은 영원히 악성고객일 뿐입니다. 부당한 요구로 목적을 이룬 고객은 더 악한 고객이 됩니다.”
천중명은 단호한 표정과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소위 진상고객의 횡포와 부당한 요구에서 우리 직원을 지켜야 합니다. 그 대신 선량한 대다수 고객을 더욱 친절하고 진심 어린 서비스로 대하도록 시스템을 보완해야 합니다.”
대강 지시를 마쳤다.
남은 것은 최만호의 몫이어서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천중명은 남은 미숫가루를 마셨다.
“회장님. 고객 클레임 중에는 과실을 증명하기 모호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무조건 우리 잘못입니다. 그리고 절대 그런 문제를 담당 직원의 책임으로 넘기지 마세요. 1년은 마이너스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1년도 지경이 버티지 못한다면.”
천중명은 숨을 나직하게 들이마신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룹을 운영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천중명의 뜻이 확고한 것을 알게 된 최만호가 굳은 표정으로 메모들을 살폈다.
“말씀해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 회장님.”
최만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어깨가 무거울 텐데 그는 그나마 꿋꿋한 태도로 집무실을 나섰다.
엉뚱한 요구로 들렸을지 모른다.
철없는 회장이 세상을 향해 너무 강한 돌직구를 던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장직원은 천중명의 요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온갖 추악한 진상고객의 요구에 시달린다.
진상고객을 거부하면 손해가 막심하다고?
천중명은 픽 웃었다.
진상들은 죽지 않는다.
다만, 지경그룹에서 사라진 뒤에 그들을 받아주는 곳으로 몰려갈 뿐이다.
고객을 상대하는 아르바이트만 해 봐도 다 아는 일이었다.
그렇게 죽이네, 살리네 하던 진상들이 경찰만 오면 피해자인 양, 비굴한 표정으로 변한다.
또한,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강하게 상대하는 점주이지 절대 고개 숙이는 아르바이트생은 아니었다.
천중명은 힘겹게 일어나 창으로 걸었다.
김민희 씨.
당신의 피눈물 나는 그 인내와 회사를 위해 무릎을 꿇겠다는 태도를 보고 결심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시원하고 후련하게 갚아주지는 못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김민희 씨처럼 애써 주는 직원들이 진상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천중명은 그렇게 집무실의 창을 향해 서서 길게 늘어선 빌딩들을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
지경전자 기용도 부사장은 외부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연구실로 달려왔다.
일병에서 갓 상병을 달았는데 위에 있던 선임들이 줄줄이 날아가 버려서 짬도 안 됐는데 느닷없이 부대 선임이 된 꼴, 기용도의 지금 모습이 꼭 그랬다.
그런 만큼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부사장의 소원이 이루어질 소식입니다.”
기용도를 맞이한 지경전자의 연구소장은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얼굴이었다.
“전화로 말씀드렸던 이관수 개발자이십니다. 이관수 개발자님. 이분이 우리 지경전자의 기용도 부사장이십니다.”
기용도는 궁금함을 누른 채 연구소장이 소개한 허름한 차림의 이관수와 인사를 나누었다.
조승필이었다면, 절대 이관수와 인사를 나누지 않고 보고서를 받아보았을 테고, 신제품만 가져올 방법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을 일이었다.
“부사장님. 이걸 한 번 보십시오.”
인사를 마친 기용도에게 연구소장이 비커를 내밀었다.
얼핏 보기에는 물에 오래 담가놔서 불어터진 화장지와 다르지 않았다. 밤톨 크기의 흐물흐물한 내용물을 들여다본 기용도가 궁금한 시선을 든 직후였다.
“펄프를 이용해 제작한 배터리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어떤 형태로도 변형이 가능한 배터리.”
눈을 껌벅인 기용도가 조심스럽게 비커를 들어서 내용물을 다시 살폈다.
“이론상 허점이 있었는데 그걸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보십시오.”
연구소장은 비커를 받아서 한쪽에 놓인 간이 실험대에 올리고 그 안에 침처럼 뾰족한 테스터의 끝을 꽂아넣었다.
달칵.
그가 스위치를 올리자 실험대 오른쪽에 있는 액정에서 파란색 선이 빠르게 위로 움직였다.
“어?”
“믿기십니까?”
“1.5볼트? 맞지요?”
홱 고개를 돌린 기용도를 향해 연구소장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 제품을 발전시키면 풀처럼 바르거나, 종이처럼 굳힌 배터리 생산이 가능합니다. 기용도 부사장님이 그토록 바라던 소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설명을 듣고 난 기용도는 소름이 끼친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볼을 짚은 그가 턱과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것이 그랬다.
“이걸 어떻게? 개발자님과는 어떻게 연결되신 겁니까?”
“회장님께서 소개해주셨습니다.”
“하아.”
탄성 같은 숨을 내쉰 기용도가 이관수에게 몸을 돌리고는 그의 양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이런 개발품을 가지고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야 그저 회장님께서 찾아가 보라고 하셔서….”
“그렇죠! 우리 회장님께서는 그런 분이시죠! 이런 걸 발견하고도 생색내지 않으시는 분! 직원들을 구하겠다고 타워크레인에 매달리고, 화장품 매장에 달려가는 그런 분입니다!”
이관수가 기대했던 것 훨씬 이상으로 기용도는 흥분한 모습이었다.
“아! 이거 충전은요?”
“보셨듯이 이미 그 정도 기능은 갖췄습니다. 형태를 갖추는 과정이 필요한데 예산을 배정해 주십시오. 여기 개발자님과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관수를 힐끔 본 연구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략 2천억 원 내외에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세계 시장을 선점하는 일입니다! 제가 회장님께 달려가서 바지를 붙들고라도 결재 받겠습니다. 시작하시죠.”
“그래야죠. 그전에 회장님께서 이관수 개발자님께 약속한 사항들이 있다니까 우선 들어보시고, 부사장께서는 회장님을 뵙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용도와 연구소장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관수는 아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
조승필은 오지은과 함께 평창동의 저택에 도착했다.
“보안을 위해 잠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를 맞은 사람은 직원 두 명과 서 있는 송달순이었다.
송달순이 지시하자 직원 두 명이 공항 검색대에서나 볼 듯한 휴대용 금속 탐지기를 들고 다가왔다.
이렇게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날인만큼 조승필은 말없이 팔을 가볍게 벌려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가죽가방은 가져가셔도 됩니다. 대신 휴대전화기는 여기에 넣어주십시오.”
대화를 녹음하려던 조승필과 오지은의 계획은 송달순의 한마디로 깨끗이 무산되었다.
여기에서 반항하면 방문의도가 불순하다고 자백하는 꼴이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휴대전화기를 맡긴 두 사람은 송달순의 안내를 받아 마당의 안쪽으로 향했다.
동양화에서 뽑아다 놓은 듯한 소나무들 앞에서 거대한 덩치의 장만섭이 있었고, 그의 앞을 지나자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이 보였다.
“총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인사하는 조승필을 힐끔 본 천호득이, “이리와 앉아.”하고는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대교건설 오상구 회장의 따님 오지은 양입니다.”
“오지은입니다.”
오지은이 나름 공손하게 인사했는데 천호득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휠체어 앞으로 뿌리 근처를 뚝 자른 테이블이 있었고, 맞은편으로 예술작품이지 싶은 철제의자가 세 개 있었다.
조승필과 오지은은 조용하게 움직여 곡선으로 이루어진 철제의자에 앉았다.
‘재벌은 재벌이구나.’
그래도 대교건설 외동딸로 살았던 오지은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평창동 저택을 보고는 기가 팍 죽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테이블만 해도 그렇다.
그냥 잘라다 놓은 게 아니라 뿌리가 제대로 땅에 박혀 있어서 저걸 먼저 심고서 밑동을 자른 건지, 아니면 잘라 와서 뿌리를 심은 건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뻑뻑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 송달순이 메이드와 함께 와서 세 사람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차 들어.”
“예, 총수님.”
조승필이 잔을 들자 오지은이 손을 뻗어 찻잔을 잡았고, 두 사람이 예의상 한 모금씩 차를 마셨다.
“조승필 회장.”
“예, 총수님.”
두 사람이 차를 마시기를 기다렸던 천호득이 반항하기 어려운 음성으로 조승필을 불렀다.
“혹시 신임회장이 사실은 내 아들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하려고 저 더러운 여자아이까지 데려온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런 뒤에 천호득은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불쑥 꺼내놓았다.
조승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지?’
의문을 떠올린 직후였다.
그의 뇌리에 퍼뜩 윤만석의 이름이 피어났다.
천호득이 지시라면 내용에 상관없이 어떤 일이고 서슴지 않고 해내던 윤만석을 말이다.
‘용인에 있다고 했었는데!’
조승필의 반응에 상관없이 천호득은 흔들리는 고개로 그를 노려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신임회장이 아직 어리고, 독단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 그렇다고 해서 계열사 회장이 오너 집안의 일에 끼어들 정도로 내가 얕보인 줄은 몰랐다.”
오지은이 시선을 떨어트릴 정도로 천호득의 눈매는 매서웠다.
“그래도 조철행 장관의 얼굴을 봐서 기회를 주마. 어디 신임회장이 내 아들이 아니란 증거를 내놔 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조승필은 굳어버린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증거라….”
천호득이 조승필의 다리 위에 놓인 얇은 가죽가방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 뒤에 그는 또 사악해 보일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그려냈다.
“그게 신임회장이 가짜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조철행 장관은 구속될 테고, 너는 미국에 있는 네 자식 연놈들의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될 게다. 저 더러운 계집아이는 오늘 이후로 더는 몸뚱이를 못 놀리게 될 게고.”
독하기 그지없던 전성기 천호득의 모습이었다.
“내 둘째 놈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질을 쳤으면 그 정도는 걸어야 서로 공평하지.”
조승필은 아예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어서 증거를 내놔 봐.”
광기마저 담긴 눈빛으로 천호득이 재촉했고,
털썩.
“총수님!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모양입니다!”
그 직후에 조승필은 몸을 던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증거를 보자는데 왜 그렇게 나와? 왜? 자신이 없어?”
“총수님!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지경그룹을 입에 올리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오지은은 아예 생각이 멈춰서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조차 못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