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 그 정도는 걸어야 서로 공평하지 (1)
본사의 집무실에 도착한 천중명은 책상에 올라온 메모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 9시가 되기 전이다.
그런데도 자이로텔레콤 박영철을 시작으로 줄줄이 통화를 원하는 이름들이 있었다.
연필을 들고 목록을 살피던 천중명이 픽 웃으며 메모 내용을 살폈다.
어천수?
[의논할 사항이 있음.]
“주접을 떤다.”
메모 내용도 그렇고, 심지어 남겨놓은 번호마저 비서가 받을 게 뻔한 일반전화 번호여서 천중명은 거친 표현을 뱉었다.
노력 이상으로 운이 터진 것도 있겠다만, 남대문 좌판에서 시작해 사업을 일군 것만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 고생을 해서 성공했다면 누구보다 더 직원들을 챙기고, 보다 단단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사업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정치인, 검사와 어울려서 원정 도박에 몇 십억 원의 회사 돈을 날린 어천수의 정신머리를 천중명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알량한 성공에 자만해서 비서실 전화번호를 적어놓는 기개라니.
천중명은 먼저 자이로텔레콤 박영철의 이름 뒤편에 체크하고, 이어서 어천수의 이름 뒤에는 시원하게 가위표를 그려 넣었다.
아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였고, 앞으로 이 메모는 올리지도 말라는 지시였다.
전화 메모를 살핀 천중명은 그 옆에 놓인 보고서에 시선을 주었다. 인터넷 은행 설립 보고서만 해도 3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다.
툭하면 전화해서 부족한 점을 질문하는 천중명을 익히 아는 직원들이라 최종안을 살피고, 살핀 뒤에 부서별 결재를 거쳐 올린 보고서였다.
이런 보고서를 어떻게 한 글자라도 허투루 보겠나.
회사 내부통신망에 접속해 급한 연락들을 살핀 천중명은 연필을 들고서 보고서의 첫 장을 넘겼다.
오늘도 확인해야 할 보고서들부터 결재할 서류들까지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
어천수는 원정도박을 함께할 정도로 관계가 좋았던 정안규의 전화번호를 심오한 표정으로 눌렀다.
“이것들이 돈을 처먹을 때는 회장님, 회장님, 하더니 죽게 생기니까 꼬리를 빼겠다고? 아무렴 내가 독박 쓰고 죽을 것 같아?”
그가 혼잣말을 뱉어낸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아침인데도 지칠 대로 지친 정안규의 음성이 넘어왔다.
“아이고, 의원님. 많이 힘드십니까?”
어천수의 음성이 홱 바뀌어 있었다.
- 그렇지 않아도 전화할 참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저곳에 알아봤는데 지경그룹 법무팀을 상대로는 버겁거든요.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전화 부탁한다고 연락은 해 놨는데 당최 연결될 방법이 없어서요.”
- 허어!
정안규의 탄식을 들은 어천수가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지금 백방으로 연락 닿는 곳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혹시 줄이 닿으시면 천 회장을 만날 수 있게 도움을 주십시오. 그건 그렇고 오늘 조서 받으러 가는 건 어떻게 할까요?”
그러나 정작 나온 어천수의 음성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 일단 조서는 받으세요. 그리고 나도 알아볼 텐데 혹시 천중명 회장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무릎 꿇고 빌어요. 안 그러면 우리 다 죽습니다.
“예, 의원님.”
통화를 마친 어천수는 액정을 확인한 뒤에 사납게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지경그룹, 이 새끼!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수법도 쓰고, 베낄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뭐가 있어. 저는 뭐, 깨끗하게만 살아? 에이, 더러워서 나도 그룹을 만들든가 해야지!”
짜증을 뱉어낸 어천수가 팔을 뻗어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박상구는 어떻게 됐어?”
[계속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연락이 안 되면 다야! 누굴 보내든가, 찾아가든가 해야 할 것 아냐!”
강남스퀘어에 보냈던 연구원 박상구가 출근은커녕, 전화조차 받지 않는 것이 어천수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한 새끼라도 제대로 된 게 있어야 회사가 돌아가지! 어떻게 된 게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다 해야 돼! 이게 회사야! 너희는 다 월급만 바라는 버러지냐고!”
시장판을 떠돌며 생겨난 그의 생존 본능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어서 어천수는 더욱 더 직원을 다그쳤다.
**
용인을 나선 천호득은 곧장 서초동에 위치한 복집으로 향했다.
이제 겨우 오전 10시 30분이었다.
그런데도 중년을 넘긴 사장이 문 앞에 서 있다가 천호득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총수님.”
“오랜만이네. 장사는 잘 되고?”
“늘 같습니다, 총수님.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그리 모시겠습니다.”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한눈에도 오래되었구나 싶은 식당의 문턱을 넘기 위해 운전기사와 송달순이 휠체어의 앞뒤를 잡고 넘어선 다음이었다.
한쪽으로 비켜서 있던 주인이 문을 걸어 잠갔고, 운전기사는 그 자리에서 양손을 모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송달순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눈치껏 문을 잠근 주인을 따라 휠체어를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10미터쯤 좁은 통로를 지나자 작은 마당이 나왔고, 그곳을 둘러싼 것처럼 창호지 문을 단 방들이 이어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갈 일은 없었다.
마당 구석의 테이블에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일어서는 것을 본 송달순은 조용하게 휠체어를 그리로 밀었다.
어디서 분명 본 것 같은데 당장 누군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소?”
천호득은 키가 큰 남자를 편안하게 상대했다.
“너는 잠시 물러나 있어라.”
“예, 총수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송달순은 얌전한 태도로 운전기사가 기다리는 문 앞으로 움직였다.
‘이래서 장 비서를 데려오지 않았구나.’
좁은 통로에 들어서며 송달순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라면 차 맛을 봐야 한다고 버티거나 최소한 머뭇거려서 천호득을 망신스럽게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문 앞에 도착한 송달순은 손을 앞으로 모으고 운전기사와 함께 묵묵하게 기다렸다.
서초동에 이렇게 가정집을 개조한 복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밥을 먹지 않은 채 마당만 사용한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으며, 그룹의 총수는 참 많은 일을….
송달순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마른침을 조용하게 삼켰다.
‘검찰총장?’
안에서 본 키가 훌쩍 큰 남자는 분명 검찰총장이었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서초동의 햇살은 이른 아침에 보았던 용인의 그것과는 다르게 갑갑한 느낌으로 통로 앞의 마당에 담겼다.
신선함을 빼앗긴 바람이 마당에 들어왔다가 통로를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가자.”
천호득의 나직한 음성이 송달순과 운전기사가 서 있는 통로로 들어왔다.
신기하지?
저렇게 작은 목소리가 귀에 콕 박히는 것은.
빠르게 안으로 걸어간 송달순은 시선을 떨군 자세로 천호득의 휠체어를 움직였다.
그녀가 휠체어를 돌려 문으로 향하도록 검찰총장은 인사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
리온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한 팀이 구성되었다는 보고가 있었고, 점심시간에 맞춰 팀장 세 명과 유진교가 천중명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가 세 명을 차례로 소개한 다음이었다.
“도시락을 주문했는데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합시다.”
팀장들과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바로 옆에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
발전본부 본부장만 해도 숨이 막힐 판인데, 그룹회장까지 함께 하는 도시락이라니, 그것도 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쩌면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식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달리 시간을 뺄 방법은 없었다.
“점심이라도 편안하게 들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천중명이 농담 섞인 말을 건넸는데 팀장들은 감히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듭시다.”
세 명 모두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재였고, 그중 두 명은 아이비리그 MBA 출신이어서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중명은 앞으로도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단순히 인수합병이라고 부르지만, 절차나 인수방식에 따라 M&A, LBO, LOY 따위로 나뉜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셀 수없이 많은 변수가 있어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온자동차는 1인당 생산성이 크게 떨어져서 단순 근로자를 100퍼센트 고용하는 것은 향후 계속해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팀장 한 명이 보고한 뒤였다.
“그동안 세큘러 스태그네이션이 계속되는 바람에 인텔렉츄얼 어셋과 인텔렉츄얼 프러퍼티에 비해 휴먼 리소스가 너무 크게 떨어지는 점도 문제입니다.”
뒤이어 의견을 내놓은 팀장이 단박에 날카로워진 유진교의 눈치를 보며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표현을 바꾸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기침체로 지식자산과 지식소유권에 비해 기술진이 부족해졌다는 뜻이었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잘난 척이 아니라 평소 팀장들이 회의할 때 나누던 대화방식인 것처럼 보였다.
“기술진이 부족한 이유는요?”
“급여나 대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을 느낀 기술진들이 회사를 떠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천중명은 문득 곽대출을 떠올렸다.
나름 공부한 천중명도 이런데 곽대출은 얼마나 속이 썩었을까?
이렇게 떠드는 직원들과 회의를 하느니 삼합회 조직원과 맞붙는 게 그에게는 백번 속 편할 일이기는 하겠다.
그 뒤로 도시락을 다 먹는 동안, 말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팀장 세 명은 확실히 좀 더 조심하는 눈치였다.
“커피라도 편안하게 마시라는 의미로 도시락에서 마치겠습니다. 대신 본부장님께서 희생하시는 의미로 저와 커피를 드시죠.”
회의실을 나선 천중명은 집무실로 돌아와 세 명의 팀장 앞에 섰다.
“아까 실수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대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5조 원이 넘는 사업을 진행하는 팀의 팀장이 사업의 과정을 우리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팀장들의 손을 잡아주며 천중명이 그들을 다독인 다음이었다.
“자네들은 먼저 내려가.”
“예.”
유진교가 세 명의 팀장을 먼저 보낸 뒤에 둘이서 소파로 자리를 옮겼고, 차도 앞에 두었다.
“땀을 흘리시는데 조금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오전에 병원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많이 좋아졌구요.”
“저 친구들에게는 오늘 점심이 인수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겁니다.”
“나라면 불편해서 싫었을 것 같은데요?”
천중명의 농담에 유진교가 가볍게 웃었다.
“중국의 거양자동차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수 의지를 보이기 위해 회장님께서 직접 리온자동차 공장을 방문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죠.”
그 뒤로 다시 한 시간에 걸쳐 인터넷은행에 관한 기본적인 사안들을 논의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앉아서 의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아침에 맞았던 영양제가 모두 빠져나갔구나 싶을 정도로 사업의 방향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시간쯤 의논한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간 다음이었다.
잔을 치우러 들어온 부속실 직원이 다시 메모를 올려놓았다.
전화, 전화, 전화, 면담 요청, 면담 요청, 행사참석 요청 등등, 메모의 종류는 다양했고, 끝이 없었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천중명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후!”하는 숨을 쏟아냈다.
쉬고 싶다.
반나절 남은 오늘 하루쯤 먼저 들어가겠다고 한들, 누가 뭐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지경그룹의 직원 누군가는 진이 빠지는 회의에 매달려 있을 테고, 또 누군가는 고객의 되지도 않는 항의에 시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와 반대로 누군가는 부하직원의 인격을 짓누르고, 또 누군가는 적당히 회사 돈을 빼먹을 궁리에 몰두하고 있을 테고.
천중명이 방심하거나 한눈을 파는 그 순간에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은 힘이 빠지고, 적당히 갑질하며 회사 돈을 빼먹던 직원은 영리한 사람이 된다.
“아후.”
통증을 이기며 천중명은 책상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먼저 통화 목록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신문고에 올라온 메일 중 곽대출이 붉게 표시해놓은 것들을 읽어야 했다.
“꼴통회장.”
천중명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을 입에 올렸다.
한다. 하고 말 거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표본이 되는 그룹을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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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지나서 천호득은 평창동의 저택에 도착했다.
“다녀오셨어요? 식사는요?”
“준비해.”
“예.”
평상복을 준비한 이은명이 서재로 들어갔을 때, 천호득은 여전히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식사 준비되면 말씀드릴게요.”
이은명이 나간 다음이었다.
천호득은 이어셋을 귀에 건 뒤에 휴대 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 예, 조승필입니다. 총수님.
“보자고 했었지?”
- 그렇습니다. 회장님과 함께 뵀으면 싶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올 테면 한 시간 뒤에 출발하고, 아니라면 그만둬.”
천호득의 날카로운 말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 한 시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총수님.
그의 성품을 익히 아는 조승필의 답이 바로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