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48화 (148/315)

# 148

148. 너희는 천 회장의 상대가 아냐 (3)

허세직은 자고 일어났더니 다이아몬드 박힌 플래티넘 반지가 코에 떡하니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됐어?”

- 정안규가 연결된 것은 분명합니다. 어천수와 홍콩 방문 시기가 겹친 것만 다섯 차례나 됩니다. 담당 검사가 통화기록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 시기에 홍콩에서 서로 통화했다면 정안규는 이것으로 아웃입니다.

“흐하하하.”

얼마 만인지도 모를 통쾌한 웃음을 허세직이 토해냈다.

“의원님. 통하시는 기자에게 슬쩍 건네 두십시오. 원정도박이 터지면 지금 경찰에서 하는 업무방해와 특허권침해는 사건도 아닙니다.”

- 정안규가 힘을 쓸 텐데?

“지경그룹 법무팀이 아예 목이 걸린 사람들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전관예우 필요 없다. 공정하게만 처리해다오. 이렇게 나오니 담당 검사들이 얼마나 마음 편하겠습니까?”

“흐하하하. 그래야지. 검찰은 공정하게 수사하면 되는 거지. 이만 끊을 테니까 변동사항이라든가, 정안규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게 있으면 바로 연락 주게.”

통화를 마친 허세직은 “하아.”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머리가 커져서 그의 경쟁자로 급부상한 의원이 정안규였다.

때마침, 아들인 허광렬의 마약 사건으로 한순간에 추락한 허세직이 그동안 공들였던 선거조직을 두 손으로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 1라운드가 끝났었다.

물론, 그 덕분에 오상구와 서수미가 구속되었고, 대교건설은 지금 새 주인을 찾느니, 부도를 맞느니 하는 처참한 꼴이 되긴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급부상한 정안규의 스폰서가 어천수일 줄 누가 알았으며, 또 하필 그와 함께 원정도박을 다닌 사건이 이 시기에 튀어나올 줄 또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 말이다.

“하아. 그거, 참. 막 피어나던 인재가 이렇게 가다니.”

듣기에는 탄식이었는데 개인사무실에 앉은 허세직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하는 웃음이 피어 있었다.

검찰통?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천수를 때려잡겠다고 지경그룹의 법무팀이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통에 정안규의 말이 검찰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보고였다.

천중명이 허세직을 몰래 배려한 걸까?

“흐하하하.”

잘난 사위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더니!

행운의 여신이 허세직을 안쓰럽게 여겼는지 일은 술술 풀렸다. 정안규에게 넘겼던 선거조직이 오히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매 순간 보고해 주는 것이 그렇다.

정안규를 잡겠다고 일부러 계획을 세운다 한들, 이렇게까지 정교할 수 있겠나 싶은 생각에 허세직은 입가를 닦으며 새 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선거조직이 허세직에게 아직 충성하는 마음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면 허세직은 이미 정치판에서 코 베이고, 귀 베여서 얼굴이 동그랗게 변해 있을 게다.

원정도박에 연루되어 정안규가 무너지면 그 지역구 선거에서 이길 사람은 허세직밖에 없으니 당연히 무게추가 몰릴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나.

허세직이 봄날의 햇살처럼 포근한 행운을 즐길 때였다.

똑똑똑.

“의원님. 전수병원에서 전화입니다.”

노크와 함께 여직원이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허세직은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의원님. 전수병원입니다. 아드님의 퇴원을 준비했습니다.

“아! 그거! 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하셨었지요?”

- 최소 6개월 이상은 꾸준한 치료가 필요합니다만, 지난번에 조용하게 퇴원을 준비하라 하셔서….

“그래서야 되겠소? 내가 그놈을 아예 새사람이 될 때까지 맡길 테니까 그대로 두세요.”

-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정치인의 변덕을 짐작한 전수병원의 원장이 능숙하게 허세직의 말을 받았다.

“치료해야지요. 걱정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약물을 끊을 수 있게 최선의 진료를 부탁합니다.”

- 예, 의원님. 그럼 그렇게 알고 치료에 집중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허세직은 느긋하게 넥타이를 쓸어내렸다.

이것도 운이 좋았다.

아들인 허광렬을 조용하게 빼내려던 참인데 하마터면 내리막길을 만난 자전거 바퀴에 허세직 본인 손으로 작대기를 꽂아 넣는 꼴이 될 뻔했다.

“나는 역시 의원 배지가 어울려. 의원 배지가.”

슬쩍 한 발 빠져서 지역구 관리하다가 다음 선거에서 우뚝 서면 얼마나 그림이 좋겠나.

그것도 아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이다.

눈을 갸름하게 뜬 허세직의 입가에 또다시 웃음이 매달렸다.

**

천중명 앞에서 이상하게 약해지지만, 천호득은 원래 지경그룹을 재계 3위로 끌어올릴 만큼 수완과 강단이 뛰어나고, 독선적이며, 거기에 악랄함마저 갖춘 인물이었다.

새롭게 밝은 날 아침이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눈빛과 분위기가 냉랭하던 천호득이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이은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양복을 준비해.”

“예, 총수님.”

차가운 천호득의 지시에 이은명이 공손하게 답을 내놓았다. 메이드들이 지켜보는 앞인 것도 있지만, 지금 천호득이 보여주는 표정과 눈빛이 질문 따위 허락하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짧은 애. 차를 준비하라고 해라.”

“예, 총수님.”

“너는 집에 있어.”

꽥꽥대거나 악을 쓰는 것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장만섭은 천호득의 저토록 차갑고 냉정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내 말에 대꾸하지 마라. 중요한 자리에 그런 몰골로 나가서 망신 줄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고.”

천호득의 휠체어 뒤에서 이은명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만큼은 얌전하게 뜻에 따르라는 의미였다.

“예에, 총수님.”

장만섭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미련해도 생각은 있어서 지금 반항했다가는 아예 평창동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은명이 조심스럽게 천호득의 옷을 준비했고,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그런 뒤에 셔츠에 재킷, 정장 바지를 입은 천호득의 어깨와 무릎에 작은 담요를 얹어주었다.

“직원을 불러.”

“예, 총수님.”

송달순이 얼른 인터폰으로 향해서 정문에 있는 직원을 호출했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송달순이 장만섭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게요.’

‘부탁한다.’

눈빛이 마주친 직후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빠르게 들어왔다.

**

천중명은 새벽 6시 30분에 곽대출을 방지병원에서 만났다.

링거에 각종 영양제 듬뿍 섞어서 하나,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주사를 다섯 대나 맞았다.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어서 차에서 편안한 대화를 하기는 어렵다.

쏟아붓듯이 링거를 맞은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샌드위치를 앞에 두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캬. 회장님이 되시더니 그런 걸 말로 끝내시고, 확실히 부들부들한 도깨비가 되셨어.”

샌드위치를 베어 문 곽대출이 감탄을 쏟아낸 뒤에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삼합회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이왕이면 약을 올려주셔요. 그래야 또 떼로 오지 않겠습니까?”

“지경그룹 회장과 발전본부 이사가 매일 칼부림만 할래?”

“이게 가끔 있으니까 오히려 활력이 되는 기분 아니셨어? 경찰 알아서 덮어주지. 눈알 빼도 다른 말 안 하지. 녹슬던 몸과 마음이 단숨에 풀리는 이 느낌! 회장님도 그러셨잖아.”

속을 털어냈던 곽대출이 슬쩍 천중명의 눈치를 살폈다.

“왜? 진짜 그런 게 아니셨어?”

“달려드는 놈을 피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싸움을 바라지는 않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싸움이 아니라 사업이고, 저놈들이 노리는 게 나와 네가 아니라 주변 사람이니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오는 곽대출의 질문에 천중명은 진지하게 답을 했다.

“주인영 과장이 저놈들의 목표물이 되었다면 어떨 것 같냐? 그런데도 내가 누군가를 지키라고 지시하면? 아차 하는 순간에 우리는 몰라도 소중한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다. 괜찮겠어?”

곽대출이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바라보았다.

“먹으면서 들어. 이번 일로 너와 내가 어느 수준인지 알려진 것도 문제야. 다음번에 저놈들이 기습할 때는 더 단단하게 준비할 테니까.”

“아! 그래서 생각한 건데 회장님 경호는 어떻게 하지? 막말로 나쁜 생각 먹은 놈들 입장에서 보자면 총수님이나 내가 아니라 회장님만 어떻게 해도 방법이 생기잖아. 천상기도 있고.”

천중명은 곽대출을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뭡니까, 그 애정 가득한 눈빛은?”

“많이 발전했다?”

“에이, 망할 놈의 회장님!”

둘이서 상처 부근에 손을 올리고는 웃고 난 다음이었다.

“이번 타깃에 내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를 대 봐.”

천중명의 질문에 곽대출은 눈만 껌벅였다.

“나를 제거하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거든. 중국의 조직원이 한국의 재계 3위 그룹의 회장을 살해할 수 있겠냐?”

곽대출은 두 번째 샌드위치의 남은 부분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통사고나 다른 사고들만 조심하면 당장 나는 문제없다. 중국의 양서평을 상대하면 엉뚱한 습격도 당분간 없을 테고. 그러니 그 안에 얼른 더 덩치를 키워야지. 다시는 그런 생각 못 하게.”

말을 마친 천중명이 남은 커피를 천천히 털어 넣었다.

“가자.”

“예, 회장님.”

곽대출은 발전본부 이사의 모습으로 천중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천호득이 도착한 곳은 용인의 한 주택이었다.

“오셨습니까?”

이제는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워진 윤만석이 천호득을 맞았고, 휠체어를 밀고 있는 송달순에게 시선을 주었다.

“바로 만나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봤는데 차라도 한잔 다오. 아, 그리고 뒤에 아이가 지난번에 본부장이 소개한 직원이다.”

천호득의 지시에 윤만석과 송달순이 짧게 인사를 나눴다.

“정원이 좋구나.”

“이곳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넓지 않은 마당이었는데 반은 돌을 깔았고, 나머지 반은 잔디를 심어서 나름의 묘한 운치도 있었다.

오전의 햇살이 내리쬐는 테이블에 천호득과 윤만석이 앉았고, 대원들과 송달순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켰다.

“그 뒤에 다른 일은?”

“오지은이 두 차례 방문했는데 특별한 의논은 없었습니다.”

“개만도 못한 것들.”

천호득이 거친 말을 쏟아낼 때 차를 내오던 대원이 송달순의 손짓에 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웃긴 모습처럼 보였다.

검은 정장 차림의 조그마한 송달순이 주머니에서 에스프레소 잔을 꺼내 그곳에 차를 덜어서는 맛을 보는 장면이 말이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윤만석의 시선 앞에서 송달순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특한 아이입니다.”

“당해봐. 저 찻잔으로 머리를 때려주고 싶을 때가 있어.”

절차를 거친 찻잔이 앞에 놓이자 천호득은 손을 떨며 차를 마셨다.

“조철행 장관을 정말 밀어내실 생각이십니까?”

달각.

윤만석의 질문에 천호득은 먼저 잔을 내려놓았다.

“비자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지. 자네에게는 염치없는 소리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칼과 도끼에 달려드는 자식을 어떻게 모른 척하겠나.”

윤만석은 가진항의 일을 대강 짐작하는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들어가세.”

“예.”

천호득의 요구에 윤만석이 대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두 명이 앞뒤에서 휠체어를 들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가볍게 노크한 윤만석이 문을 열었을 때, 천상기는 자고 일어나 세수조차 안 한 듯, 머리가 이리저리 짓눌린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윤만석이 휠체어의 손잡이를 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송달순이 몸을 움찔했으나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천상기, 윤만석, 그리고 천호득의 사이에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에 그녀가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윤만석이 닫는 문을 따라 방안의 모습이 서서히 좁혀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천상기는 천호득을 오랜만에 본다.

그런데도 형식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도 자식이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 천상기를 향해 천호득의 차가운 음성이 건너갔다.

“조승필과 오지은을 믿었나 보다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홱.

천호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상기가 독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를 이렇게 감금하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아십니까?”

“그렇지. 그래서 원래는 너를 죽였어야 했지.”

“내가 얌전히 죽을 것 같습니까? 내게 문제가 생기면 일이 크게 벌어집니다. 그리고 두고 보십시오. 나를 이렇게 한 대가를 똑같이 치르게 해드릴 겁니다. 전부 정신 병원에 넣어버릴 거라고요!”

조승필과 오지은에게 걸었던 기대가 허물어진 것에 분통이 터졌는지 천상기는 뒤가 없는 사람처럼 천호득에게 대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또 한 번,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나도 너를 더는 감싸지 못한다.”

대화가 끝났다.

남은 것은 천호득이 몸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천호득은 뒤에 선 윤만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그때 천상기가 상상하지 못했던 호칭으로 천호득을 불렀다.

“마지막 부탁입니다. 다리만이라도 치료하게 해주세요. 여자를 품어도 몸이 제대로 안 움직입니다. 이대로 더 굳으면 진짜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합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천상기가 애처로운 표정과 음성으로 천호득에게 매달렸다.

“어차피 윤 실장이 지키는 한, 저는 못 나가잖습니까?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다리만이라도 치료하게 해주세요.”

천호득을 향해 하소연을 쏟아낸 천상기가,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아픈 마지막 말을 쏟아내고는 시선을 떨궜다.

“상기야.”

“예, 아버지.”

천호득이 인간적으로 불렀고, 천상기가 울음을 삼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회장에게 사정해서 허락을 받아.”

예상하지 못했던 천호득의 답이어서 그랬을까?

천상기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야! 이 개 같은 노인네야! 그러고도 당신이 아버지야! 젊은 내가 이렇게 휠체어에 있는 게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당신하고 같냐고!”

천상기의 고함에 천호득은 울음 같은 한숨을 쏟아냈다.

“하마터면 또 속을 뻔했구나. 후우. 이만 가세.”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 왜 나한테만! 형처럼 죽이려고만 하지 말고 내게도 기회를 달라고! 당신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독하게 굴어!”

윤만석이 방향을 트는 휠체어로 사정없이 달려든 천상기의 고함이 천호득의 심정을 아프게 찢어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