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 너희는 천 회장의 상대가 아냐 (2)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천중명은 확실히 연예인 같은 느낌으로 변했고, 허선영은 반대로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화장으로 눈을 키우고, 얼굴의 윤곽이 바뀌어 보인다는 것, 천중명은 처음 알았다.
“이상해요?”
“예뻐.”
김민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강남스퀘어를 나섰다. 들어올 때와는 다른 의미의 시선이 천중명과 허선영에게 달려들었는데 확실히 화장이 바뀐 이유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저녁을 먹고 만나기로 했어. 괜히 함께 밥 먹어봐야 속이 편할 것 같지 않아서.”
“중명 씨도 그래요? 어쩐지 그런 자리에서도 중명 씨는 전혀 구애받지 않을 것 같은데요?”
“왜 이래?”
퇴근 시간에 강남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차에서라도 잠시 눈 붙여요.”
식은땀이 옅게 배어 나오는 데다, 움직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천중명에게 허선영이 건넨 권유였다.
“저녁은?”
“우리 저기에서 김밥이랑 떡볶이 먹어요.”
주차장으로 얼른 들어가게 할 생각으로 허선영이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둘이서 포장마차에 붙어 서서 떡볶이와 어묵,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이쑤시개로 집어먹는 떡볶이, 종이컵에 담아 마시는 어묵 국물, 그리고 한입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김밥을 먹으며 천중명은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눈이 마주칠 때 웃어주는 허선영이 있어서 좋았다.
저녁을 그렇게 해결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올랐다.
“8시 삼중호텔이거든. 차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싶은데 편한 곳에 세워주고 저녁을 먹는 게 좋겠어. 아니면 강남스퀘어 앞에 김밥이랑 떡볶이를 먹든지. 괜찮던데?”
“지금 밖에 나가면 복잡합니다. 우선 주무십시오.”
“그럼 얼른 가서 저녁을 먹고 와.”
차에 있는 물병을 꺼내 약을 먹은 천중명은 실제로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억지로 견디고는 있지만, 실제로도 힘겨운 하루였다.
허선영의 권유를 받은 운전기사가 미안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다른 차에서 기다리던 비서실 직원들과 주차장 출구로 움직였다.
허선영이 재킷을 벗어 덮어주는 것을 느꼈는데 거절할 생각도 못 한 채 천중명은 잠에 빠져들었다.
**
차의 움직임에 상처가 울려서 깼다.
눈을 떴을 때 어둠이 짙게 깔린 속에서 빛나는 조명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신호를 기다리느라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이 보였다.
“일어났어요?”
“응.”
걱정 가득한 허선영의 옆에서 천중명은 천천히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미치게 아프다. 상처가 생으로 뜯기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놓지 않으면 이 뒤로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밀려와서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어디쯤이야?”
“5분쯤 가면 삼중호텔입니다, 회장님.”
천중명의 질문에 운전기사가 빠르게 답을 했다.
“저녁은?”
“말씀하신 곳에서 먹었습니다.”
천중명이 먼저 웃었고, 조금 뒤에 운전기사가 멋쩍은 웃음을 그려냈다.
몸을 겨우 풀었구나 싶었을 때 승용차가 삼중호텔의 입구에 멈췄다. 도어맨이 열어주는 문으로 내린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호텔 안으로 향했다.
“VIP 라운지가 몇 층이죠?”
“11층입니다. 저쪽으로 돌아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몸이 아픈 천중명을 대신해 허선영이 층수를 확인했고, 그렇게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향했다.
호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세련된 차림의 사람들이 천중명과 허선영을 힐끔거리는 것이 말이다.
“중명 씨는 화장하면 안 되겠어요.”
“나도 같은 생각 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닭살이 돋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11층에 도착했다.
때앵.
문이 열리고 오른쪽에 복도가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나무문이 열려있는 홀이 보였다.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홀로 들어섰다.
“천 회장님.”
홀의 바로 앞의 안내데스크로 시선을 준 천중명을 여자 목소리가 불렀다.
“선영 씨도 왔네요.”
정장 차림에 생머리를 어깨로 늘어트린 윤세계가 허선영에게 아는 체하며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세요.”
천중명은 순순히 윤세계가 안내하는 안쪽으로 걸었다.
화분으로 가려놓은 뒤편에 창을 옆으로 둔 자리에서 세 명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은 예의를 지켰고,
“잘 지내셨습니까?”
문광그룹의 송중대는 불만을 감추지 않은 인사를 건네 왔다.
천중명은 그 옆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병지 대송물산 부회장이세요. 제겐 삼촌 되세요.”
“천중명입니다.”
“반갑소.”
윤병지가 그럭저럭 예의를 차리는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지경디자인 대표 허선영 씨입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천중명은 감싸는 듯 팔을 뻗어서 허선영을 소개했다.
뻑뻑하고 불편한 시선 속에서 인사가 끝난 다음이었다.
자리에 앉았고, 천중명과 허선영은 커피를 주문했다.
“나랑 본 적 있는데 기억해요?”
차가 나오는 동안, 윤병지가 먼저 허선영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 아버님이 주최한 모임에서 인사했었거든. 하기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렵겠지. 그때만 해도 허세직 의원님이 참 대단했는데.”
“기억합니다. 감색 정장에 녹색 타이를 하셨었습니다.”
“내가 그랬던가?”
윤병지가 허선영을 편하게 대했는데 나이도 있고, 무엇보다 허세직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굳이 탓할 바는 아니었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잠시 틈이 있었다.
“머리는 어쩌다가…?”
“아버님 모시고 바닷가에 들렀는데 그곳 식당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박영철의 질문에 천중명은 적당하게 답을 건네주었다.
“보자고 하신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그리고는 이왕 대화가 시작한 김에 박영철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천 회장님. 이번에 발표한 와이파이망 무상 제공 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했으면 합니다.”
“발전적인 방향이 어떤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천중명의 질문에 박영철이 도움을 바라는 얼굴로 송중대를 보았다.
“제가 잠시 설명 드리죠.”
그리고 그 시선에 답하는 것처럼 송중대가 불쑥 나섰다.
VIP 라운지라 그런지 홀에 사람도 별로 없을뿐더러, 화분의 위치가 절묘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쳐도 끼어드는 송중대의 태도와 말투는 아랫사람을 대하듯 무례하고 건방졌다.
“와이파이 망 개방 말입니다. 그런 거 굳이 할 필요 있냐 이거죠. 지난번에도 내가 말했잖습니까? 원숭이에게 왜 바나나를 거저 줍니까? 그것들은 줘봐야 고마운 줄 모른다니까요.”
좋게 넘어가려고 했었다.
“천 회장님이 자선 사업가는 아니잖습니까? 해외에서는 얼마든지 와이파이 무료 서비스를 하세요.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요. 우리끼리 손잡으면 어디 가서 휴대전화 개설하겠냐고요?”
박영철과 통신 사업에 관해 의논할 생각도 있었고, 더불어 허선영을 소개하는 자리라서 오늘만큼은 점잖게 행동하려 마음먹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박영철 부회장의 말대로 천 회장님이 따라주시면 됩니다. 사업은요. 돈을 버는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죠. 결혼도 그래요. 도움 되는 쪽으로….”
“숭중대 전무.”
더 참다가는 마음의 병이 생기거나 이 자리에서 송중대의 눈알을 뽑아버릴 것 같아서 천중명은 날카롭게 그를 불렀다.
“회장단 이야기에 전무 직급이 함부로 끼어드는 건 어디에서 배운 버릇이야? 문광그룹은 그따위로 위아래 없이 운영해?”
“뭐?”
단박에 달려들 것처럼 얼굴이 붉게 물든 송중대가 거칠게 반문한 직후였다.
“천 회장님. 왜 이러세요? 코리아클럽 멤버들끼리는 직급 안 따지잖아요.”
윤세계가 얼른 눈짓을 던지며 천중명에게 말을 건넸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직급을 안 따진다고? 그럼 여기 계신 윤 부회장님은 뭐야? 직급 따지지 않고 우리 나이에 어울리겠다고 나온 거야?”
천중명의 눈빛에 질린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공격적이지?, 하는 눈으로 윤세계는 대꾸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경고했었지? 선영 씨에게 깝죽대지 말라고. 그런 짓 하면 따귀를 맞게 될 거라고? 너희는 직급을 안 따지면 그렇게 안하무인이야? 최소한의 예의 따위 없어?”
“흠. 말이 좀 심하지 않나?”
윤세계가 당하는 것을 더는 지켜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너희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이번엔 윤병지가 끼어들었다.
“연배이신 부회장님께는 죄송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뭘 말씀이신가?”
송중대가 눈을 하얗게 뜨고 노려보는 앞이었다.
“친목이라면 말 않겠습니다. 대신 사업 이야기를 하려면 지경그룹의 회장으로 대우하면서 하라는 겁니다.”
윤병지에게 말을 전한 천중명은 의도적으로 송중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계 서열로도 밀리는 그룹의 후계자 따위가 건방지게 사람을 불러놓고 이놈 끼어들고, 저놈 끼어드는 시장판 만들지 마시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서 의논했으면 싶습니다.”
“지금 이놈, 저놈이라고 했나?”
윤병지를 보며 천중명은 옅게 웃었다.
“부회장님이 사업 이야기를 나누러 나왔다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천중명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아, 진짜! 지경그룹 대단하네!”
송중대의 비꼬는 말이 꼬리를 문 것처럼 튀어나왔다.
나직하게 말이 오갔지만, 분위기는 살벌했다.
놀라운 건 허선영의 태도였다.
놀라거나 겁먹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 그녀가 태연한 얼굴로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박영철 부회장은 와이파이 망에 관해 진지하게 의논하고 싶으면 우리 유진교 본부장과 협의하고, 송중대.”
천중명이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얼굴이 또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전무 따위가 함부로 끼어들지 말고, 억울하면 울고불고 매달려서라도 부회장 직급은 달고 까불어.”
“말 다했어?”
다 아는 사람들 앞에서 기죽을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가 그의 눈과 몸에서 펄펄 풍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런 거 천중명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짓이었다.
“너, 후계자 싸움 중이라고 했지? 내가 내일부터 공개적으로 문광그룹이 하는 모든 사업에 뛰어들어 줄까? 송중대가 경영에서 완전히 밀려날 때까지 지경그룹은 문광그룹의 모든 사업을 물고 늘어지겠다고 해줘?”
차마 더 대들지 못하겠고, 분은 터지고, 송중대는 치욕을 삼키는 얼굴로 애꿎은 볼을 씰룩였다.
“건방 떨지 말고 고개 숙이고 다녀. 만약, 한마디라도 네놈이 지껄인 헛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바로 문광그룹 총수 찾아가서 내가 어떤 놈인지 보여줄 테니까.”
천중명의 눈빛에 맞서던 송중대가 고개를 비틀고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상황은 깨끗하게 정리됐다.
박영철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고, 송중대는 아예 고개를 돌린 상태였으며, 윤병지는 왜 이렇게까지 거친 분위기가 된 건지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상하게 자리가 불편하네요.”
천중명이 일어섰고, 허선영이 따라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이도록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서 당당하게 걸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다음이었다.
“호오-.”
가슴에 손을 얹은 허선영이 감췄던 무언가를 토해내듯이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어쩜 그렇게까지 해요?”
“따귀도 안 때렸는데?”
“나는 아까 조마조마해서 혼났어요.”
천중명은 픽 웃으며 허선영의 등에 팔을 뻗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라서 한 번쯤 혼내줄 생각이었는데 윤병지 부회장이 있는 바람에 적당히 넘어갔어.”
“나한테도 그럴 건 아니죠?”
“이렇게 해야 선영 씨에게 더는 재수 없는 짓 안 할 것 같은데?”
“아까 윤세계 몰아붙일 때만큼은 시원했어요.”
허선영이 밉지 않게 웃었다.
**
천중명이 나간 테이블에 남은 것은 당혹감, 황당함, 그리고 감출 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하! 나 참!”
송중대가 분하고 기가 막힌 심정을 쏟아냈을 때였다.
“전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니?”
“잘 모르겠어요.”
윤병지가 던진 질문에 윤세계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지경그룹이 요사이 입에 오르내리더니 저래서였구나.”
“너무 건방지죠?”
동조를 구하는 윤세계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윤병지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너희 또래는 당하기 어렵겠는데? 여기 박 부회장이나 송 전무가 지금 당장 그룹을 맡는다고 쳐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박영철과 송중대를 차례로 돌아본 윤병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제대로 본 것 같은데 한발 늦었다는 것도 인정해야겠다.”
“삼촌. 내가 허선영보다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당분간은 나서지 마라. 천 회장은 진짜로 따귀를 때리고 남을 사람이다.”
“말도 안 돼.”
윤세계의 대꾸에 상관없이 한숨을 작게 내쉰 윤병지가 몸을 일으켰다.
“망신은 당했다만, 덕분에 좋은 구경 했다. 그래도 나이 있는 사람으로 한마디 하마. 지금 너희는 천 회장의 상대가 아냐. 좋은 관계로 바꿀 수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쭈뼛대며 일어선 세 사람을 둘러본 윤병지가 송중대의 팔을 툭 쳐주고는 VIP룸을 나섰다.
“아, 이게 무슨….”
자리에 털썩 앉으며 송중대가 또다시 불만을 토해내는 순간이었다.
“큰일이네. 오늘 천 회장을 만난다고 잔뜩 떠들어놨는데 당장 뭐라고 하지?”
박영철이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중명이 괜히 성질만 내고 갔다고 해. 그럼 되잖아? 여기 윤 사장이 말만 맞춰주면 되는 거 아냐?”
“뭔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천 회장을 상대하지 못하면 우리는 진짜 회장님이 나서야 돼. 자이로텔레콤 약정이 얼마까지 떨어진 줄 알아? 우리 주력 사업이 기울고 있다니까!”
송중대가 내놓은 제안에 박영철이 짜증을 확 쏟아냈다.
괜히 나와서 건방 떨지만 않았어도 천중명과 이렇게까지 나빠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