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46화 (146/315)

# 146

146. 너희는 천 회장의 상대가 아냐 (1)

어제 자리를 비웠던 하루만큼 천중명이 살피고 결재할 보고서의 양은 많았다. 이런 거, 유진교에게 나누어준다고 당장 특별하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게 넘긴 일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보고가 유진교에게 먼저 달려간다는 사실이 천중명을 놓아주지 않았다.

관례대로, 이렇게 해왔으니까.

만약 발전본부에서 그런 판단을 내리면, 용인의 타워크레인에 매달렸던 기사처럼 힘없는 직원 누군가가 죽게 될지 모르고, 김민희처럼 하염없이 시달리는 직원이 나올 수도 있었다.

“후-.”

너무 쉽게 한다고 했었던 건가?

천중명은 ‘꼴통회장’이 되는 과정의 힘겨움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몸뚱이나 멀쩡하면 좀 나았을 텐데.

불구덩이에 앉아 있는 것처럼 온몸에서 달려드는 화끈거리는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천중명이 상체를 좌우로 비틀었을 때였다.

[중국의 거양자동차가 리온자동차의 인수의향서를 제출했습니다. 본사에서 확인하고 대책 바랍니다.]

독일에 출장 가 있는 팀장의 메모가 따로 만들어 놓은 블루크루드 사업 게시판에 올라왔다.

천중명과 유진교, 최만호, 그리고 사업담당자만 볼 수 있고, 게시물을 확인한 사람의 명단이 자동으로 표시되는 내부게시판이었다.

사업이라는 게 참, 5조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려는 것까지 경쟁자가 생기는 세상이라니.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천중명은 잠시 책상을 향해 있던 상체를 세우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10분만 자고 나면 몸이 훨씬 좋아질….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런 거 없이 전화를 받아야 한다.

숨을 커다랗게 내쉰 천중명은 통증을 이겨가며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액정에 올라와 있는 글자를 읽은 천중명은 픽 웃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다시는 노리는 일이 없겠다고 약속을 하긴 했는데 돌아가서 생각하니까 억울할 수는 있겠다.

까불면 눈알을 파주면 되지.

표정을 가라앉힌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천중명 회장님이십니까?

충분히 예의를 차린 젊은 남자의 음성이었고, 우리 말 또한 능숙해서 어색한 구석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 저는 조양회라고 합니다. 양서평 부총재님의 지시로 전화 드렸습니다. 잠시 통화가 가능하실까요?

“삼합회라는 건가요?”

- 조직 이름을 밝히자면 그렇습니다. 황하강 아래쪽을 총괄하는 분이 양서평 부총재이십니다.

“하고 싶은 말은요?”

상대방이 워낙 예의를 차리고 있어서 천중명은 우선 그 수준에서 대꾸했다.

- 양서평 부총재께서 전하는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정동방의 무모한 결정으로 천중명 회장에게 범한 결례에 대해 사과합니다. 그와 함께 문제를 일으켰던 그의 부하들은 우리의 규율에 따라 이미 모두 처벌하였습니다.

조양회가 워낙 덤덤한 음성으로 사과문을 읽고 있어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나는 정동방을 꼬드긴 미국인을 처벌한 뒤에 천중명 회장을 만나려 하였으나, 그를 찾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이렇게 사과를 먼저 전합니다.

미국인이 꼬드겼다고?

정동방은 분명 황채산과 거래했다고 했으니까 꼬드겼다는 말은 한국에 들어와 칼질한 일을 말하는 거겠지?

- 나는 우리가 이 기회를 통해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지경그룹이 중국에서 활동하는데 도움을 줄 자신이 있습니다. 천중명 회장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지루한 표정이었던 천중명이 눈빛을 빛내며 내용에 집중했다.

황성규가 건네준 정보에 있던 미국의 헤지 펀드 소속일까?

아니라면 그 이름도 유명한 CIA?

천중명이 미국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읽는 게 끝났는지 서류를 내려놓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어왔다.

- 어떠십니까? 일정이 되시면 우리가 건너가도 좋고, 그게 불편하시다면 양서평 부총재가 직접 초청하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삼합회 간부의 초청을 받아서 중국에 간다고?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전화로 미국인의 신원을 알려달라기도 어렵고.

“고민해 보고 답을 하지요. 연락은 어디로 하면 됩니까?”

- 문자로 이름과 번호를 넣어두겠습니다.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합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지이이잉.

그런 뒤에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기도 전에 곧바로 문자가 들어왔다.

조양회의 이름과 전화번호였다.

머리를 긁으려던 천중명은 먼저 팔과 가슴의 상처가 울려서 멈칫했고, 다음으로 정수리에 붙여놓은 거즈가 생각나서 손을 내렸다.

기가 막혀 웃음도 나왔다.

이런 몰골로 강남스퀘어와 삼중호텔의 약속을 잡았다는 생각에서였다.

**

박승양은 퍼터를 등 뒤에 세워 들고는 그의 책상 앞을 뱅글뱅글 돌고 또 돌았다.

“아, 진짜!”

그렇게 책상 앞을 지나치던 박승양이 짜증을 확 뱉었다.

책상 뒤에 있는 금고 때문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수류탄을 터트려도 멀쩡하다는 제품이고, 박승양의 지문을 찍지 않고 문을 열면 보안업체가 달려오는 나름의 첨단장치도 갖춘 놈이었다.

문제는 저 금고 안의 1조 원이 그 알량한 은행이자조차 만들지 않은 채 자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우리 박 회장을 믿었다니까!”

5조 원의 원금과 이자를 지불하고 나자 우르르 걸려온 전화들은 한결같이 박승양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1조 원이면.”

박승양은 입맛을 다셨다.

명동 입구에서 성당까지 좌우로 있는 건물의 1층 매장을 전부 사들일 돈이다.

그런 돈이 지금 금고에 한가롭게 자빠져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박승양은 속이 아리고 쓰려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사람이 전화 한 통 없을까?

박승양은 눈을 빼뚜름하게 비틀며 천중명을 떠올렸다.

박승양을 믿는다?

그게 아니라면 하고 싶은 짓을 해 봐, 눈깔을 빼줄 테니까.

둘 중 하나 아니겠나.

만약 그 두 가지가 모두 아니라면 이 정도 돈쯤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어떡하지?”

박승양은 그게 가장 무서웠다.

다음번에 이만큼 벌 수 있는 일에서 박승양을 쏙 빼놓는 일 말이다.

“에이! 진짜!”

확 짜증이 올라온 박승양이 분통을 터트린 직후였다.

“예? 부르셨어요?”

여직원이 놀란 얼굴로 문을 열고는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냐.”

짧게 답한 박승양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굳혔다.

“내가 졌다. 인간 박승양이 진짜 머리 숙인다.”

더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다는 양, 이를 깨문 박승양이 금고로 향했다. 자빠져 노는 수표를 은행에 예금한 뒤에 천중명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어?”

그러나 금고로 향하던 박승양은 시계를 보고는 또다시 짜증을 쏟아냈다.

은행 업무가 이미 마감된 시간이어서 그랬다.

**

김민희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간사하고 얄팍한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기사 봤어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어?”

조금만 더 발전하면 진상 딱지를 이마에 붙일 ‘진상 꿈나무’ 고객들이 보여주는 모습에 놀랐고, 고소하다는 눈으로 지켜보던 경쟁사 매장 여직원들의 완벽하게 바뀐 반응에 놀랐다.

강남스퀘어 고객상담실의 노진래 과장이 두 번이나 내려와서 그동안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던 것을 사과하는 건 또 어떻고.

다 끝났다.

그런데도 김민희는 오후 5시가 되자 가슴이 쿵쾅거렸고, 식은땀이 올라왔으며, 숨이 자꾸만 막혔다.

‘괜찮아. 이제 안 올 거잖아.’

안다. 그녀를 괴롭혔던 문제의 진상 손님들과 원래 진상 짓을 하는 손님이 적어도 오늘만큼은 없을 거라는 사실도.

“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고, 밤에 잠꼬대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를 중얼거려서 남편을 눈물짓게 할 정도여서 그런가.

오후 6시가 가까워질수록 김민희는 자꾸만 가슴이 무거웠다.

‘설마하니 오늘 또 오겠어?’

억지로 미소를 그려내던 김민희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어머? 세상에?”

옆 매장의 매니저가 놀란 소리를 내는 저 앞에서 그동안 김민희에게 독하게 굴었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언니? 어떡해요?”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까지 김민희 옆으로 다가왔고, 제품을 구경하던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김민희의 시선을 따라 다가오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힌 김민희 앞으로 일곱 명의 여자들이 다가왔다.

“김민희 매니저님 되시죠?”

말은 처음 보는 남자가 시작했다.

“네. 무슨 일로…?”

“저는 어천수코스메틱의 연구원 박상구라고 합니다. 매니저님께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하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박상구가 고개를 숙이자, 일곱 명의 여자들이 따라서 상체를 숙였다.

박상구와 여자들의 눈에 담긴 적의가 고스란히 김민희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우린 사과했다?’

여자들의 얼굴에 떠오른 생각을 김민희는 분명하게 읽었다.

“우리도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그저 애 키우며 살려고 하다가 그런 거니까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상체를 세운 다음이었다.

가장 왼쪽에 있던 웨이브 짙은 여자가 단 한 번의 쭈뼛거림도 없이 사과를 건네 왔다.

“미안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이해해주세요.”

“매니저님이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어요.”

여자들이 줄줄이 사과를 뱉어낸 다음 다시 상체를 숙였다.

‘우리 사과를 안 받아? 마음대로 해. 사과하는 모습만 보이면 되니까.’

저 여자들은 확실히 그걸 계산하고 왔다.

김민희가 욕을 뱉거나 매몰차게 돌아서는 모습이 결국은 지경화장품에 마이너스가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나쁜 년들! 더러운 년들! 사람의 약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딱지 같은 년들!’

김민희가 치마 옆으로 쥔 주먹을 부르르 떨 때였다.

“매니저님.”

뜻밖의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에 허선영이 들어왔다.

“대표님?”

허선영을 향해 고개 숙였던 김민희가 화들짝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천중명까지 왔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것도 컨실러와 파운데이션을 과하게 바른 얼굴에 머리 위로 거즈를 붙인 모습으로 말이다.

김민희의 곁으로 걸어 나온 천중명은 박상구와 여자들을 보며 같잖다는 듯 픽 웃었다.

이것들이 어디서 꼼수를 부려?

비서실 직원에게 엉뚱한 번호를 주었던 여자가 천중명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떨궜다.

“혹시 지경그룹의 천중명 회장님이십니까? 저는 어천수코스메틱의 박상구입니다. 이번 일로 심려 끼쳐 드려서….”

“그만하고 조용히 가. 여기에서 한마디라도 더 하거나 버티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들을 상대할 테니까 그건 알아서 하고.”

박상구는 정말이지 놀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한 가지가 빠졌어.”

천중명의 방문을 전해 들었는지 고객담당실의 노진래 과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들이 이곳에 또 얼굴을 비치는 일이 생겨도 결과는 같다는 걸 명심해. 지경그룹을 상대할 자신이 있다면 끝까지 해보고.”

어지간한 조직폭력배도 기가 죽을 천중명의 눈빛을 박상구는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지경그룹 회장이 던지는 경고를 무시해?

그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들 뭐야?”

거기에 노진래가 천중명의 눈치를 살피고는 거칠게 나오고 있었다.

“영업이 가장 활발한 시간에 이렇게 나오면 회장님께서 용서하신대도 내가 못 참아! 이게 말이나 되는 짓이야! 어천수코스메틱은 법 위에 있는 기업이야!”

악을 쓴 노진래가 휴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당신들, 거기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

“아닙니다. 바로 가려던 참입니다.”

이래저래 궁지에 몰린 박상구와 일곱 명의 여자들이 이번에는 진짜로 고개를 떨군 모습으로 돌아섰다.

“회장님. 번번이 들러주실 때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노 과장님. 믿을 만하네요.”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마디 칭찬에 뿌듯한 얼굴이 된 노진래가 차를 대접하겠다며 몇 번을 권한 뒤에야 돌아섰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된 뒤였다.

“저기, 회장님. 죄송한데 컨실러와 파운데이션을 제가 좀 손봐 드리면 어떨까요?”

“그래요, 중명 씨.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나도 좀 놀랐어요.”

이제는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한 김민희가 조심스럽게 건넨 요청을 허선영이 거들었다.

“김민희 매니저.”

“예, 회장님.”

천중명은 김민희에게 고개를 가져갔다.

“상처를 감추려고 바른 건데 이렇게 두껍게 바르지 않아도 되겠어요? 중요한 약속도 있어서 걱정스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게 조심해서 건넨 말에 김민희가 각오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맡겨주시면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는 짐작한 눈치였다.

이제 천중명이 더는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라도 지켜준 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열망이 그녀의 눈에 가득해서 천중명은 잠자코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20분쯤 걸렸다.

그리고 그동안, 천중명은 전문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기가 막혔다.

어쩌면 화장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 보일 수 있는 건지.

“회장님. 마음에 드세요?”

천중명이 시선을 돌린 앞에서 허선영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대표님도 앉아보세요.”

“아니에요, 난. 바쁜 시간이잖아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요. 이렇게라도 감사함을 갚아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말을 하다 김민희의 눈이 붉어졌고, 그걸 본 허선영이 덩달아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천중명이 번갈아 보는 앞에서 허선영이 김민희를 안았고,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냈다.

“앉으세요, 대표님.”

“그럼 부탁할게요.”

20분의 시간이 또 흘렀다.

“어떠세요? 회장님?”

김민희의 질문에 시선을 돌릴 때, 허선영이 몸을 돌렸다.

화장이 아니라 마법을 부린 건가?

눈이며, 코, 입술과 반짝이는 피부까지, 허선영을 바라보는 천중명은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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