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 그래야 이 천호득의 아들이란 소리를 하지 (2)
손도운과 이관수를 배웅한 천중명은 비서실 직원에게 지시해서 집무실의 조명을 평소와 같게 바꾸었다.
그런 다음, 남은 메모를 살폈다.
전화 메모는 네 칸으로 나뉜 표에 적혀 올라오는데 두 번째 칸에 연락한 사람의 직책과 이름, 세 번째 칸에 용건을 적어두는 방식이었다.
손도운, 이관수처럼 직접 상대한 경우에는 이름 앞쪽의 첫 번째 칸에 체크하고, 마지막 비고란에 표시해놓으면 부속실 직원이 관련 부서에 지시해서 현황을 파악한 뒤에 보고서로 올린다.
전화를 건 사람의 입장에서야 거만하게 느껴질 일이겠지만, 메모에 있는 통화를 모두 연결하면 종일 전화만 붙들고 있어야 할 형편이라 나름 유용한 방법이었다.
남은 메모를 살피던 천중명은 인터폰을 눌렀다.
“자이로텔레콤 박영철 부회장 연결해 줘.”
[네, 회장님. 그리고 기획실에서 지경화장품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천중명은 통증이 올라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마우스를 움직였다.
내용은 천중명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고구마. 이 정도로 그냥 죽을 건 아니지?”
인터넷 기사에 올라온 어천수의 사진을 보며 천중명은 혼잣말을 건넸다.
어둠을 통해 보았던 그의 눈빛과 모니터에 담긴 인상도 그렇지만, 유사제품과 가짜 클레임까지 시도했던 인간이 얌전하게 고개 숙일 거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저녁에 한 번 더 강남스퀘어에 들러주는 게 좋았다.
절대 제 손으로 뭔가를 해결하지 않는 인간들의 특성상 천중명에게 전화하기보다는 김민희가 물러날 방법을 찾을 것 같아서였다.
뭐, 일단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 꼴이니까 조만간 뛰쳐나오려고 발버둥 치거나 살려달라고 조르는 거, 둘 중 하나겠지.
천중명이 픽 웃을 때였다.
[회장님. 1번에 박영철 부회장 연결했습니다.]
인터폰에서 비서실 직원의 음성이 들였다.
그래. 이왕 하는 김에 시원시원하게, 도깨비 스타일로!
천중명은 수화기를 들고 1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천 회장님. 자이로텔레콤 박영철입니다.
부속실을 통해 연결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박영철은 불편한 음성이었다.
“전화하셨던데 일이 있어서 이제야 연락했습니다.”
-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고, 또 핑계 김에 얼굴도 뵐 겸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마침 윤세계 사장도 저녁에 시간이 된다고 하니 삼중호텔에서 저녁 함께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잠시만요.”
천중명은 시간을 확인한 뒤에 시선을 들었다.
“저녁은 곤란하고, 차를 마시는 거로 하지요. 8시까지 도착하겠습니다.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 누구신지요? 아무래도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허선영 씨와 함께 갈까 합니다. 혹시 선영 씨가 바빠서 혼자 참석하게 된다면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허선영의 참석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처럼 짧은 침묵이 있었다.
“제가 이야기해서 자리를 하나 더 만들겠습니다. 그럼 VIP 라운지로 일단 정하고, 혹시 윤세계 사장이 다른 장소를 준비하면 비서실을 통해 연락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중명 씨, 몸은 어때요?
“괜찮아, 충분히 견딜 만하니까 걱정하지 마. 용건을 먼저 말할게. 오늘 저녁 8시에 자이로텔레콤 박영철과 윤세계를 만나기로 했거든. 함께 가자.”
대뜸 내용을 들은 허선영이 “네?” 하고 놀라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일 마치고 강남스퀘어 들렀다가 가면 좋을 것 같은데?”
- 기사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강남스퀘어 매장에 들러볼 생각이긴 했어요. 그런데 중명 씨. 진짜 모르겠어서 묻는 거니까 이런 질문 한다고 웃거나 하지 말아요.
“뭔데 그래?”
- 정말 윤세계 씨 따귀를 때릴 건 아니죠?
천중명의 흐느끼는 듯한 웃음을 들은 모양이었다.
- 중명 씨가 그런 말을 할 때 보면 진짜 같아서 그래요. 설마 그러겠어, 하면서도 어쩐지 중명 씨는 또 실제로도 그럴 것 같고요.
변명 같은 허선영의 말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그런 순간이 무섭거나 싫으면 나 혼자 갈게.”
가슴이 떨리는 것처럼 흔들리는 허선영의 숨소리가 들렸다.
“선영 씨와 함께 가자는 건 사과를 받기 위해서야. 그런데도 끝까지 불편하게 나오면 따귀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해줘야지. 다시는 선영 씨와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천중명의 답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 함께 갈게요. 6시까지 강남스퀘어로 가면 돼요?
“그래. 거기에서 봐.”
허선영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박영철과 통화를 마친 윤세계는 강남의 미용실에 전화를 넣었다.
“나 윤세계야. 한 시간쯤 뒤에 도착할 테니까, 원장님 시간 좀 빼놔. 급하게 잡힌 중요한 약속이라고 전해주고. 메이컵도 받을 거니까 그렇게 준비해.”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세계는 책상에 기대선 자세로 호텔 앞의 전망을 바라보았다.
“함께 있으면 자기도 알게 되겠지? 깜도 안 되는 퇴물 정치인 딸이 어디에 끼어있는지? 재수 없다고? 하! 기막혀!”
혼잣말을 뱉어낸 윤세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왕이면 쇼를 크게 만들어서 누가 천중명 회장에게 더 어울리는지 확실하게 알게 해줄게.”
그녀는 다시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잠시 귀를 기울인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이 전화를 받았다.
“나예요, 윤세계. 우리 삼촌도 모실까 하는데 문광그룹 송중대 전무도 부르는 거 어때요? 좀 거칠기는 하지만, 송 전무가 우리 중에는 그래도 가장 시원하게 말을 하잖아요.”
- 윤 사장. 허선영 때문에 그런 건 이해하는데, 내가 천 회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일을 꼭 키워야겠어?
박영철은 윤세계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눈치였다.
“문광그룹 차남에 대송그룹 장녀가 모두 박 부회장님을 밀면 천 회장에게 굳이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삼촌을 부른다는 거잖아요. 만약 천 회장이 또 건방지게 굴면 삼촌이 나설 테니까요.”
- 흠.
박영철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머, 망설이는 거예요? 문광과 대송을 합친 것보다 지경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 알았어. 대신 내가 천 회장과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대해선 다른 소리 하지 않기, 그건 괜찮지?
“그럼요. 사업이잖아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내가 천 회장과 잘돼서 우리 박 부회장님에게 큰 도움이 될지?”
원하는 것을 얻은 윤세계가 만족한 얼굴로 통화를 마쳤다.
이제는 삼촌인 윤병지에게 전화를 넣을 차례였다.
**
점심을 먹은 뒤부터 천중명은 보고서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블루크루드와 와이파이 망 개방, 이 두 가지를 시작했을 뿐인데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유진교는 물론이고, 발전본부의 사업 담당자, 미국에 출장 가 있는 팀장과도 수시로 통화하며 내용을 파악했다.
마치 속보처럼 미국 현지에서 올라온 회의록을 살피던 천중명은 또다시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보고서를 확인한 사람의 명단이 아래에 떠올라 있어서 이미 그가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교의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 네, 회장님.
“본부장님. 고글이 제안한 방법을 우리 정부가 허가할까요?”
- 기구를 이용하겠다는 방식이 기발하기는 한데, 우리는 주요 산의 정상마다 군사시설이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중명이 염려하는 것과 비슷한 답이 유진교에게서 건너왔다.
- 현지 팀장이 인공위성을 이용한 방법을 의논 중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글이 보유한 인공지능을 이용한 기술만큼은 욕심납니다. 상황에 맞는 실시간 길 안내 시스템은 고개가 저어질 정도였습니다.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메모리 생산 기술과 능력으로 지경전자가 인정받고는 있지만, 결국 저들이 개발한 인공지능 기술에 필요한 부품일 뿐이었다.
만약, 이관수 같은 개발자가 미국에서 획기적인 메모리 기술을 개발한다면 지경은 언제든 제품을 팔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 인원 보강에 좀 더 집중해 주세요.”
-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중명의 마지막 지시가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사람이 유진교였다.
앞으로 세계시장을 이끌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인공지능처럼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려운 기술들을 외면한 채, 국내시장만 움켜쥐고 버티다가는 한순간에 도태돼서 사라진다.
천중명은 컴퓨터에 저장된 최초의 사업계획서를 펼쳤다.
블루크루드에서 시작해 자동차 회사의 인수까지 진행된 큰 그림을 보면서 지금 나가는 방향이 옳은지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유진교의 지휘로 자동차 회사의 인수의향서가 제출되었다는 추가 보고를 확인한 천중명은 그제야 책상에서 상체를 세웠다.
졸음이 달려들겠지만, 유헌우가 처방해 준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
중국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양서평이 눈가를 좁혔다.
“인간이 좀 이상하구만.”
천중명과 최근 지경그룹의 행보를 쭉 살핀 그의 첫 느낌이었다.
“성공을 위해서 굴욕을 삼킨 위인을 흉내 낸 건지, 아니면 자다가 벼락을 맞아 새사람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이 자료는 어디 있어?”
양서평이 검지로 보고서를 찍은 뒤에 고개를 들자 옆에 있던 남자가 얼른 상체를 숙이고는 태블릿 PC를 작동시켰다.
시끌시끌한 소음이 배경으로 깔린 우리말 뉴스였다.
아래에 깔린 중국어 자막을 보며 양서평은 확실히 놀라는 눈치였다.
“꾸민 게 아니라 정말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읽는 것과 막상 그 장면을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천중명이 구출된 장면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양서평이 고갯짓을 하자 태블릿 PC를 끈 남자가 몸을 세웠다.
“미국 놈은?”
“명함에 있는 번호로는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홱 고개를 돌렸던 양서평이 같잖다는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정동방이 꼬드김에 제대로 넘어간 거군.”
양서평은 계속해서 엄지와 검지를 비벼가며 매서운 눈빛으로 무언가를 고민했다.
“멍청이가 저지른 짓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한데. 돈도 돈이지만, 한국까지 가서 망신을 떤 것을 만회하지 못하면 다음 총회에서 내 입장이 몹시 난처해져.”
“지경이 이번 분기에 생산하는 메모리 판매를 놓고 미국과 우리 쪽을 저울질하는 모양입니다.”
“그걸 왜 우리가 신경 써?”
“강북에서 접촉하는 눈치였습니다.”
상체를 숙인 남자의 속삭임에 양서평은 눈알만 돌렸다.
“첨단산업 굴기를 위해 가장 중요한 부품입니다. 총수께서 윗분들에게 인정받을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정동방의 일을 핑계로 천중명을 만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국제변호사인 참모의 조언이었다.
“강북이 그와 손을 잡으면 다음 총회에서 기고만장하는 가등섭을 상대하셔야 합니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도 양서평은 묵묵하게 조언을 듣고 있었다.
“명분은? 우리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는데 만나서 뭐라고 떠들지? 하는 짓을 보니 협박 따위 아예 안 먹히는 인간이던데.”
“미국 놈을 파십시오.”
말귀를 이해하지 못한 양서평을 향해 국제변호사가 슬쩍 명함을 내밀었다.
“황채산과 정동방이 이놈에게 속았다고 말씀하십시오. 원래는 목을 잘라서 선물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러니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양서평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선물이 약해.”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지경그룹 계열사인 지경화장품의 미라클이란 제품입니다. 설비와 유통을 우리가 맡고 이익을 크게 떼어주십시오.”
국제변호사가 얼른 태블릿 PC를 내밀어서 미라클 제품을 화면에 올려놓았다.
“강남의 유통회사를 전부 모으시면 홍보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양서평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눈치였다.
“형님께서 직접 유통회사들을 불러들이시면 6개월에 한국 돈으로 2조 원의 매출이 나옵니다. 다행히 제품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평입니다.”
“그렇게 꼬드긴 뒤에 메모리를 가져오자?”
“지경의 메모리를 확보하시면 화장품과 함께 총수님께 올리십시오. 강남에서만 반년에 2조 매출인데 총수님이 강북까지 동원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입술을 내민 양서평이 바닥을 매섭게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총수께서 화장품을 가져가실 때 우리는 지경에 퍼센티지를 나눠달라고 하면 됩니다. 메모리를 확보만 하면 총수께서도 형님을 인정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변호사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좋아!”
양서평은 양손을 들어서 탁, 소리가 나도록 허벅지를 내리쳤다.
“만나보겠다! 자리를 만들도록!”
“예, 형님.”
국제변호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색한 호칭이었는데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전혀 걸림이 없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