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 그래야 이 천호득의 아들이란 소리를 하지 (1)
입금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 다시 은행에 전화까지 넣어 재차 확인한 박승양이 남부증권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지난 일주일간 참 많은 일을 겪었던 남부증권 회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박승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방을 나섰다.
머릿속에 온통 숫자가 뒤엉켜 있어서 실제로 그는 다른 생각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4조7천억 원이라는 게 말이 돼?”
파생상품 양도세에 관해서는 이미 들었고, 금액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확 줄어든 입금액을 보자 그는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하. 그건 그렇고.”
박승양은 또 한 가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가 남부증권 계좌에 입금한 금액은 4조 원이었다.
당연하게 수익 4조7천억 원은 원금 4조 원을 제하고 남는 금액이었다.
“아흐.”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던 박승양은 3층과 2층의 중간에 멈춰 서서는 창을 짚은 채 커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우선 증권계좌에서 상환해야 할 5조 원을 먼저 보낸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수익이 단박에 3조7천억 원으로 줄었다.
어차피 상환하려던 원금 5조 원을 보낸 건데 뭐?
고민할 게 뭐 있어?
5조를 송금하고 남은 수익 3조7천억 원을 천중명과 둘이서 반반씩 나누면 되는 거지.
“끄응.”
박승양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보았다.
지금 계산대로 나누면 금고에 보관 중인 1조 원이 고스란히 박승양의 몫이 된다.
“천 회장을 또 볼 거야? 막말로 그 양반은 회사 계좌로 1조7천억 원쯤 따로 먹었잖아. 왜 돈이 적냐고 따지면 법대로 하라면 되지! 누구 계좌에서 돈이 불었는데!”
창으로 보이는 하늘을 향해 윽박지르던 박승양이 얼른 고개를 젓고는 계단 바닥을 보았다.
“인생을 바꿔 줄 양반이라니까. 거기에 곽 이사라는 양반 잊었어? 사람 눈을 파내면서 은혜도 따따블! 원수도 따따블! 소리 지르는 거 기억 안 나냐고?”
말을 뱉어낸 박승양은 두 눈을 잃은 채 피를 줄줄 흘리며 누워있던 조직원을 떠올리고는 몸서리를 쳤다.
“아, 씨! 일단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면 되지.”
고개를 마구 털어낸 박승양은 세상의 모든 고민을 안은 듯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
서재에서 정원을 바라보던 천호득은 인상을 구기며 계단을 올라오는 장만섭을 보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있었다.
“저놈이…, 저거?”
장만섭이 현관을 향해 방향을 틀자, 천호득은 얼른 휠체어를 돌렸다. 그가 거실로 나섰을 때, 장만섭은 마침 현관을 들어서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이 미련한 놈아. 얼굴은 그게 뭐고!”
천호득은 기가 막혔다.
제 딴에는 상처를 가릴 요량으로 화장품을 발랐는가본데, 이마 위쪽에 붙인 거즈도 그렇거니와 땀에 파운데이션이 들떠서 아예 요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너는 왜 그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죄송합니다.”
“회장이 그냥 보내줬을 리는 없고, 또 몰래 나왔어?”
“회장님도 출근하셨습니다.”
버럭 고함을 질렀던 천호득은 입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회장이 출근했다고?”
“예, 총수님.”
“하아. 작은 애, 너는 저놈 좀 데려가 눕혀 놔.”
거실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천호득의 지시였다.
“괜찮습니….”
“가! 가서 누워! 아니면 내가 정말 화내는 걸 볼래!”
천호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고, 송달순이 옆구리를 밀며 눈짓을 하는 데다, 아픈 이은명까지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그럼 안에 있겠습니다.”
장만섭은 그제야 송달순이 끄는 대로 거실 저 안쪽의 손님방으로 움직였다.
“당신도 얼른 들어가서 누워.”
“죄송해요.”
“죄송할 것도 많다.”
두 사람을 들여보낸 천호득이 서재로 들어가면서 평창동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고도 오늘 출근했단 말이지.”
그런데 서재의 창을 향해 앉은 천호득은 뜻밖에도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래야지.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 독기는 측근과 임원들에게 보여야지. 그래야 이 천호득의 아들이란 소리를 하지. 흐헤헤헤.”
천호득은 행여나 웃음이 밖으로 나갈세라 소리를 낮춰가며 웃었다.
**
밝은 곳에서 본 천중명은 화장이 두꺼워서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그것만 해도 이상할 판에 정수리 근처에는 거즈까지 붙였다.
“손도운 씨라고 방문 연락이 오면 이리 모시고, 집무실 조명을 낮춰줘.”
“네, 회장님.”
지시를 마친 천중명이 이를 악물며 결재서류를 들여다볼 때, 비서실 직원이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손도운 씨가 방문했다는 연락입니다.”
비서실 직원은 집무실의 블라인드를 내린 뒤에 천중명이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조도를 조절했다.
원래 이렇게 사용했던 모양이구나 싶을 정도로 비서실 직원이 센스 있게 조명을 바꾼 다음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다른 비서실 직원이 손도운과 또 다른 한 명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손도운이 감격하고 반가움 넘치는 얼굴로 천중명의 손을 꽉 잡았다. 그 바람에 식은땀이 쭉 나올 정도로 팔과 어깨, 가슴으로 통증이 이어졌는데 좋아서 그런 걸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회장님. 제가 말씀드렸던 개발자, 이관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입니다.”
“이관수입니다, 회장님.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라서 긴장이 많이 됩니다. 혹시 실수가 있더라도 이런 자리 경험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주십시오.”
오래된 재킷과 정장 바지로 예의를 차린 이관수가 긴장을 이기려는 듯이 마른침을 삼키며 건넨 말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앉으세요.”
천중명이 권하면서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고, 부속실 직원이 전통차와 한과를 내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회장님 덕분에 이사했습니다.”
천중명의 질문에 손도운이 부끄러운 듯 답을 내놓았다.
집은 어디냐, 마음에 드느냐 따위의 이야기를 5분쯤 나눴는데 이관수는 제품을 설명할 준비를 하느라 대화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관수 개발자님.”
“예, 회장님.”
“제가 제품을 들어도 그게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전자 쪽에 임원을 정해 드릴 테니 그쪽과 의논하셨으면 합니다. 혹시 제게 직접 말씀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편안하게 지금 말씀하세요.”
이관수가 손도운을 바라보고는 눈을 껌벅였다.
“회장님. 이 친구는 앞으로도 개발비가 꽤 많이 들 텐데, 만약 지원받았다가 완성품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여자처럼 톤이 높아진 손도운이 이관수를 대신해 꺼낸 요청이었다.
“제품 개발에 실패했을 경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죄송합니다. 회장님.”
손도운이 시선을 떨구자 눈치를 살피던 이관수가 면목 없다는 투로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염려하는 바를 천중명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소개한 손도운의 체면을 생각했고, 다음으로 개발자들이 제품 개발에 매달릴 때 지니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혹시 그때까지의 보상금을 원하십니까?”
“보상금이라니요? 아닙니다, 회장님. 저희가 염려하는 것은 혹시 제품 아이디어나 그때까지 개발된 것들을 전부 회사에 넘겨야 하는 건 아닌지 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손도운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제품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과 장비, 인력은 얼마든지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이관수 개발자님의 급여도 책정하겠습니다.”
다음에 나올 실패했을 때의 조건에 실망하지 않으려는 투로 이관수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서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노력과 시간, 비용을 투자했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그때까지의 개발품을 내놓으라는 것은, 글쎄요?”
이관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개발 계약서를 작성할 때 명기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지경전자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요구를 한다면 제게 바로 연락해 주세요.”
“그럼 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겁니까?”
“최선을 다해주실 책임은 있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이관수를 앞에 두고 천중명은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지경전자 상무를 연결해 줘.“
지시를 마친 천중명은 그때부터 이관수의 개발품에 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물에 풀어놓은 종이 같이 생긴 밤알만 한 크기의 샘플이 배터리의 기능을 한단다.
물로 가는 자동차만큼이나 황당한 개발품이었는데 이 또한 샘플까지 있는 터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제가 개발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배터리를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는 개발과정이 필요한데 종이나 풀의 형태로 만드는 연구는 제 분야가 아니어서 아무래도 혼자 버거웠습니다.”
천중명이 얼핏 보기에도 이관수가 개발한 제품은 놀라웠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천중명이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회장님. 2번에 성상연 상무 연결했습니다.]
인터폰으로 연락이 있었다.
“잠시만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천중명은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지경전자 성상연 상무보입니다.
천중명은 성상연에게 대강의 내용을 설명했고, 연락이 가면 심도 있게 검토한 후에 우선 전화로 보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다음이었다.
비서실을 통해 성상연의 연락처를 전해준 천중명은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정리했다.
“혹시 다음에도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셨는데 제가 직접 인사드리지 못해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장님. 저는 이렇게 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무래도 연구원들과 의논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쪽 인원을 전부 이리 오라고 하기도 뭐해서 오늘은 이렇게 인사만 드립니다. 두 분을 꼭 뵙고 싶은 마음에 제가 욕심부렸습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신 것만 해도 더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말을 건넬 때마다 손도운과 이관수는 자꾸만 고개를 깊게 숙였다.
**
점심시간에 지경화장품 강남스퀘어 매니저 김민희는 직원들이 놀라서 보여주는 기사를 처음 보았다.
“세상에! 언니! 기사 봤어요?”
“지금 보고 있어. 잠시만.”
한가한 틈을 타고 다가온 옆 매장의 매니저가 혀를 차는 옆에서 김민희는 스마트폰에 올라온 기사에 집중했다.
[불법 원정 도박 혐의를 받고 있는 어천수코스메틱의 어천수 회장이 업무방해, 특허권 침해 등의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 어천수 회장은 고용한 사람들을 이용해 지경화장품의 강남스퀘어 매장에 지속적으로 클레임을 제기하는 한편, 지경화장품의 제품인 미라클을 도용한 제품을 발주했다가 적발됐다.]
이렇게 시작한 기사는 어천수 개인의 비리와 다시 지경화장품 매장에 클레임을 제기하는 방법과 유사제품의 용기와 디자인을 보여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옆 매장의 매니저가 팔짱을 끼고는 저 건너편에 있는 어천수코스메틱의 매장을 노려볼 때였다.
“매니저님. 이것도 좀 보세요.”
[지경화장품은 고의적으로 클레임을 걸어 영업을 방해한 일곱 명을 영업방해 혐의로 고발하고, 손해액을 추정해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이 새로 찾아온 기사를 본 김민희는 가슴에 얹혀 있던 돌을 내려놓는 것처럼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나?”
옆 매니저가 어깨너머로 기사를 보며 건넨 질문이었는데 김민희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당장 그 사람들이 매출에 얼마나 손해를 끼쳤을까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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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천수는 나름 연결되는 정치가들이 제법 있었다.
“잘 들어. 자칫하면 우리 다 죽어. 그러니까 영업방해하고 특허권 침해는 박상구, 네가 혼자서 했던 일로 가.”
“예에?”
경찰의 출석요구를 받은 어천수가 박상구를 불러 가장 먼저 내뱉은 지시였다.
“영업방해는 절대 구속 안 돼. 그리고 솔직히 민사 청구해 봐야 아직 제품을 생산한 것도 아니고, 강남스퀘어 매상이 뚝 부러진 것도 아닌데 금액이 얼마나 되겠어?”
어천수의 꼬드김을 박상구는 ‘그건 또 그러네.’하는 표정으로 받았다.
“내가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다른 말 하지 말고 가서 매달려. 그 아줌마들하고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거야.”
머뭇거리는 박상구의 반응이 갑갑했던지 어천수는 “후-!”하고 숨을 뱉어냈다.
“생각을 해 봐. 무릎을 꿇는데도 용서 안 해주면 지경화장품이 오히려 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영업방해는 구속 안 되는 거고, 손해배상은 내가 물어줄 테니까 뒷일은 걱정하지 마.”
어천수는 박상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내가 연결된 쪽에서 잘 해결할 거야. 함께 마카오 다녀온 양반들이 아무렴 내가 죽는 걸 그냥 지켜보겠냐고. 그러니까 지경화장품 건만 혼자 했던 거로 정리해. 알았지?”
말을 마친 어천수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서는 박상구의 손에 쥐어주었다.
“100만 원 넣었어. 사과하느라 마음 상하는 거, 이거로 좋은데 가서 싹 풀어.”
도박에 50억 원을 넘게 쓰는 어천수가 그에게 건넨 성의는 100만 원이었다. 봉투를 억지로 받은 박상구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