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43화 (143/315)

# 143

143. 벌거벗고 엎드리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2)

곽대출과 함께 두 시간쯤 웃고 떠들었다.

계속 욱신거리는 몸에 느닷없이 불로 지진 쇠꼬챙이를 쑤셔 넣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덮치곤 했는데 천중명과 곽대출 모두 식은땀을 흘리면 흘렸지, 이런 고통에 꺾이는 부류가 아니었다.

“아니, 정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이러고 있고 싶어요?”

곽대출의 방까지 찾아왔던 유헌우가 담배 냄새의 여운을 따라 코를 킁킁대면서 주사를 놓아주었다.

그가 나간 다음이었다.

“만섭이에게 들렀다가 한숨 자련다.”

천중명은 고통을 호소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나도 가서 봐 줘야지. 많이 깨졌던데 얼마나 부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회장님.”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곽대출이 따라나서는 바람에 웃기는 몰골로 둘이서 문으로 움직였다.

“삼합회가 분명 복수하려 들겠지? 그래야 할 텐데. 이왕이면 좀 더 센 놈이 우르르 몰려왔으면 하는 가녀린….”

“에이, 미친놈! 말이 씨가 된다니까.”

킬킬거리다가 상처가 울려서 인상을 찌푸린 채 천중명은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비서실 직원이 링거대를 잡아주는 도움을 받으며 곽대출과 함께 장만섭의 병실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누워 있던 장만섭이 몸을 일으켜서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저런 거, 천중명이나 곽대출 모두 말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셋이 적당하게 앉았다.

옆구리와 허벅지 바깥쪽을 끈으로 묶은 환자복, 시커멓게 멍이든 목덜미와 팔, 머리에 하나씩 붙인 거즈까지, 드러난 모습만 보면 세 사람 모두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내일 퇴원하자.”

천중명이 던진 권유에,

“그게 좋겠습니다, 회장님.”

“예에, 회장님.”

곽대출과 장만섭이 차례로 답했다.

아직 장만섭은 천중명의 그날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눈빛이었다.

이런 건 그냥 곽대출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그의 환자복 주머니에 담긴 담배와 라이터가 도움 될 테고, 천중명이 나가줘야 둘이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게 분명했다.

“나는 먼저 일어날게.”

곽대출과 장만섭의 인사를 받으며 천중명은 병실을 나섰다.

그런 뒤에 다가온 비서실 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일은 출근할 테니까 퇴원 준비해주고, 지경화장품에 연락해서 얼굴과 목에 든 멍을 가릴 만한 화장품을 구해줘.

“예, 회장님.”

멈칫했던 비서실 직원이 바로 답을 했다.

말리기보다는 얼른 보고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 눈치였다.

**

천상기는 용인으로 찾아온 오지은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도 참석한다는 거지?”

“예, 오빠.”

“지은아. 침착하게, 알았지? 혹시 사소한 거 하나라도 놓친 건 없는지 잘 생각해 봐.”

탐욕에 찬 천상기의 당부를 확인한 오지은이 입가를 묘하게 뒤틀었다.

“오빠. 오빠는 잊고 있는 거 없어요?”

“잊고 있는 거?”

“지금 회장으로 있는 천중명이 실제로는 가짜인 거잖아요.”

“그렇지.”

“그럼 어릴 적에 뭐 했는지 물어보면 어떨 것 같아요?”

질문을 받은 천상기는 눈만 껌벅거릴 뿐, 말이 없었다.

“어릴 적에 어디에서 살았냐? 엄마랑 언제 헤어졌냐, 이런 거 모를 거잖아요?”

“물어봐서 알아놨을 수도 있지.”

지금까지 두 사람이 만난 이후로 가장 진지한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진짜 중명 씨가 쓰던 전화기에 여자들 사진이 있었거든요. 잠자리를 하면 꼭 사진 찍는 버릇이 있어서요.”

“에이, 변태 새끼!”

욕을 뱉어낸 천상기의 눈빛이 묘했다.

“오빠! 지금 선영이 년 벗은 몸 상상했죠? 가짜가 아니라 진짜 중명 씨가 그랬다니까요!”

“그래. 얼른 하려던 말을 해 봐.”

“그 전화기에 엄마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자기가 몰래 찍은 거라고요.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 안 한 거라고 했거든요.”

“그래?”

“술 취해서 거실에 누워서 한 말이니까 맞을 거예요. 그 사진이 어디 있었게요?”

천상기가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릴 때였다.

“평창동 2층에 방이 있다면서요? 거실은 써도 방은 잘 안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총수님의 오래된 물건을 넣어두고 해서요.”

“아!”

“거기에서 찾은 사진이라 뒤졌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말 못 한다고 했었어요.”

말을 들은 천상기가 숨을 들이마시며 상체를 세웠다.

“조승필 회장이 준비했다는 내용 풀어놓고, 그다음에 지금 그 질문 던지면 최소한 총수님이 의심은 하겠다.”

“그렇죠?”

“하아! 일찍 좀 만나지. 그걸 뭘 시간을 끌어?”

천상기가 희망에 부푼 얼굴로 아쉬움을 털어냈다.

**

다음 날 아침에 상처를 소독하던 유헌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천중명을 보았다.

“이 몸으로 퇴원을 하겠다고요?”

“어차피 쉬지도 못하거든요. 전화와 이메일에 시달리느니 아예 통원 치료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돈도 많으신 분이 왜 그렇게 아등바등하세요?”

“그만큼 일이 많거든요.”

정 안되면 지경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할 참이었다.

그걸 짐작했는지 몇 번 더 만류하던 유헌우가 결국은 퇴원을 인정해주었다.

“어쩐지 이게 시작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뭐가요?”

“어쩐지 회장님을 시작으로 낫지도 않았는데 퇴원하겠다는 환자들이 몰려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입니다. 병실에서 담배 피우고, 음식 냄새 풍기는 환자들이요.”

곽대출과 담배 피운 것을 알았는지 유헌우가 가시 돋친 말을 꺼내놓았다.

“이러다가 병실에 공기청정기 놓게 생겼습니다.”

“다음에는 얌전히 있다 갈게요.”

지경그룹 회장이라는 사람이 또 칼이나 망치, 도끼에 맞아 들어올 거란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다니, 말을 해놓고 어이가 없어서 천중명이 먼저 웃었고, 유헌우가 따라 웃었다.

“현찰로 지불하기로 한 건 알고 계시죠?”

“내려가시면 준비했을 겁니다.”

“그럼 하루에 한 번은 꼭 오세요. 아니면 내가 차트를 넘겨줄 테니까 지경병원을 통해서라도 주사는 당분간 꼭 맞으세요. 그런 상처 우습게보면 큰일 납니다.”

치료와 당부를 마친 유헌우가 나갔다.

그리고 이번엔 비서실 직원이 화장품을 가지고 들어왔다.

“컨실러라는 제품입니다. 이걸 먼저 두껍게 바르시고, 그 위에 이 파운데이션을 두드리듯 바르시랍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이 크림을 먼저 발라서 컨실러가 밀착되게 하라는 당부도 있었습니다.”

“곽 이사 것도 준비했어?”

“장 비서까지 전부 전달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장을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처참한 얼굴이 거울 안에 있었다.

정수리 옆에 거즈를 붙이고 있어서 영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하고 있다, 천중명. 이렇게 깨지고 부서지면서라도 직원들과 함께 제대로 된 그룹 만들어 보자.’

거울을 잠시 들여다보던 천중명은 크림을 검지로 덜어내 얼굴에 발랐다.

별것 아닌 줄 알았다.

그러나 스틱 컨실러를 바르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그 많은 종류의 화장품을 능숙하게 다루는 여자들에게 존경심이 우러나올 지경이었다.

컨실러를 잔뜩 발라 분장한 것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천중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위에 발라야 하는 파운데이션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

법무팀과 홍보팀은 평소에도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적지 않은 부서였다.

그러나 그룹의 최고 경영자가 지켜보겠다는 업무와 늘 흘러가는 업무의 비중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나.

게다가 불법적인 일을 덮으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상대방의 불법을 처벌하라는 정당한 지시여서 주저할 것도 없었다.

옷을 갓 벗은 부장 판사와 부장 출신의 검사를 스카우트하는 게 헛일이 아니라는 것을 법무팀은 실력으로 나타냈다.

- 소장은 작성했습니다. 어천수코스메틱에게는 영업정지 가처분, 그 외에 영업방해 혐의로 박상구 외 7인에게는 형사 및 민사소송을 제기하겠습니다.

전화로 보고를 받는 최만호는 별로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 어천수는 불법도박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를 묶어서 증거가 문제 되지 않는 선에서 검찰에 넘겼습니다. 환치기에 원정 도박, 동행한 사람들까지 수사하면 꽤 큰 사건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손해배상 청구 금액의 규모는요?”

- 법인은 당연하고, 박상구와 직접 클레임을 걸었던 일곱 명의 여자들은 평생 자기 이름으로 재산을 가지기는 어려울 수준입니다. 끝까지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제야 최만호는 보고가 마음에 든 것처럼 눈매를 풀었다.

“법무팀장님.”

- 예.

“우리 회장님께서는 바른길로 가시겠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적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앞길을 막는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법무팀이 돼 주셨으면 합니다.”

- 그런 일이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통화를 마친 최만호는 냉정한 표정으로 다시 구내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 홍보팀 팀장 김정세입니다.

“기획실장인데 보도 어떻게 됐어요?”

- 네, 실장님. 정오부터 대대적인 보도가 있을 예정이고, 저녁 메인 뉴스에 세 꼭지를 걸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출근하시면 직접 보고를 들으실지 모르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 예! 실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최만호는 책상에 올린 두 손을 깍지 끼운 채 바빴던 통화 내용을 혼자 정리했다.

기가 막힌다.

도끼와 칼을 든 조직폭력배에게 직접 맞서고, 계열사인 지경화장품의 매니저가 클레임에 시달린다는 말에 직접 달려가 상황을 파악한 뒤에 관련 증거를 모아주는 회장이라니.

생각을 털어낸 최만호는 보고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은 그룹발전본부에 지원한 이들의 자료를 살펴야 할 때였다.

**

출근한 천중명은 책상에 올라온 전화 메모를 들여다보며 막막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고작 하루였다.

그런데도 마치 한 달은 자리를 비웠던 것처럼 엄청난 전화들이 있었고, 그 이름과 시간, 내용들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천중명은 연필을 들어 비고란에 비서실이라고 적어놓아서 굳이 통화하지 않아도 전화했던 목적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직접 통화해야 할 연락도 있었다.

가장 먼저 손도운, 다음은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 부회장, 그리고 윤세계였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먼저 유진교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 부회장이 전화했던데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 와이파이 무료 개방에 대해 의논하고자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처럼 와이파이 전면 개방을 선언하기 어려운 구조인 데다, 이번 발표로 가장 매출에 영향을 받을 곳이 자이로 텔레콤입니다.

코리아클럽에서 하는 짓을 보고 한 번쯤 벼르기는 했는데 전혀 엉뚱하게 박영철의 뒤통수를 때려 준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면서 천중명은 따로 한번 봐야지 했던 문광그룹의 송중대를 떠올렸다.

개새끼가.

원숭이도 할 만한 일을 하는 게 직원이라고?

“자이로텔레콤은 고민해 보고 나중에 의논하기로 하고, 혹시 이번에 발표한 사업이 문광그룹과 겹치는 일은 없습니까?”

- 발표 전에 확인한 관련 업체 명단에 문광그룹은 없었습니다.

“문광그룹의 주요 사업을 뽑아주세요.”

-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꿰맨 상처가 앞뒤로 잔뜩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병원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통증을 이겨가며 천중명은 손도운이 남긴 메시지를 살폈다.

[미래형 배터리를 개발한 개발자를 연결하고 싶다는 요청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지정해 주시면 만나서 개발품을 설명할 기회를 얻고 싶다는 부탁을 남겼습니다.]

메모를 보며 손도운의 얼굴과 특이한 음성을 떠올린 천중명은 모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려냈다.

사흘을 달라고 했다더니 천중명과 지경에 도움 되는 개발자를 찾아다녔던 모양이었다.

아직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저 손 내밀어서 그들이 정당하게 받을 몫을 지불해주었고, 덕분에 엄청난 수익을 얻었는데도 그걸 은혜라고 생각하는 이들 말이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서 손도운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아직 이 번호를 모르는 손도운의 얇고 높은 음성이 들렸다.

“손 선생님. 천중명입니다.”

- 네?

“메모를 지금 봐서 전화가 늦었습니다.”

-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세요?

우리 회장님이라는 그의 음성이 워낙 격정적이어서 천중명은 또 가벼운 미소를 그려냈다.

-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실 줄 몰랐습니다.

감동에 휩싸인 그의 목소리 뒤에서 “설마 지경의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신 거야?” 하는 놀라는 말소리도 들렸다.

“개발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하셨던데요?”

- 네, 회장님. 마침 그 친구와 함께 있습니다. 이 친구가 개발한 나노셀룰로오스 배터리를 회장님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무리한 청을 드렸습니다.

당장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발품의 이름과 손도운의 흥분한 목소리로 봐서는 가볍게 볼 제품은 아니지 싶었다.

“언제가 편하세요?”

- 회장님께서 만나라시는 분의 시간이 편하실 때를 알려주시면 제가 이 친구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그럼 본사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 그럼요! 당연히 됩니다, 회장님. 몇 시에 찾아뵈면 될까요?

“편하게 오세요. 로비의 안내직원에게 말해놓을 테니까 이름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 네, 회장님.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손도운의 흥분한 음성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아마 임원을 만날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열심히 뛰는 사람을 어떻게 가볍게 대할 수 있겠나.

어떡해서든 시간 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도리였다. 적어도 꼴통회장이 되겠다고 각오한 천중명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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