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 벌거벗고 엎드리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1)
오전 8시 30분에 천중명의 병실은 아예 집무실 분위기였다.
유진교와 최만호는 물론이고, 비서실 직원까지 병원으로 달려온 통에 비어있는 특실을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특실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환자가 아니시면 곤란한데요?”
“현금으로 지급하겠습니다.”
비서실 직원의 한마디에 유헌우는 특유의 넉살 좋은 얼굴로 특실을 배정해 주었다.
“오늘 오전에 예정된 사업 발표는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유진교의 보고에 천중명이 답을 했고,
“경찰청과 정치권 몇 곳에서 특별한 당부가 있었습니다. 박승양 회장에게 앙심을 품은 폭력 조직의 습격이었고, 다행히 큰 인명 피해 없이 정리된 것으로 말을 맞춰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삼합회 조직원이 꽤 죽어 나갔는데?
의아한 천중명의 눈을 본 최만호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회장님께서는 어제 총수님과 나들이를 가셨다가 박승양 회장으로 오인한 조직폭력배와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가벼운 부상을 입고 입원한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가벼운 실랑이라.
기가 막힌 심정의 천중명을 향해 최만호는 계속 보고를 이었다.
“검찰과 경찰청이 조직폭력배 특별 단속을 발표했고, 더불어 불법 사채업자에 관한 단속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강 일이 이렇게 정리되었나 싶을 때였다.
지이이잉.
침대에 올려놓은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에 문자가 들어왔다.
[어천수 코스메틱의 연구원은 42세 박상구라는 인물입니다. 그가 준비한 머라클의 용기와 디자인, 그리고 클레임을 위해 고용한 여자들의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어떻게 전해드릴까요?]
황성규가 보내온 반가운 문자였다.
“잠시만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천중명은 황성규의 번호를 곧장 눌렀다.
- 예, 회장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내일이면 퇴원하지 싶습니다.”
유진교와 최만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천중명은 통화에 집중했다.
“클레임을 걸었던 여자들의 명단과 통화 내역, 송금한 증거 등을 구할 수 있으신가요?”
- 이미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회장님. 이렇게 구한 자료는 증거자료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건 또 전문가들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조금 뒤에 최만호 비서실장이란 분이 연락하게 하겠습니다. 그리 자료를 보내주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이번에는 저도 꽤 놀랐습니다.
황성규의 마지막 말에 담긴 억양이 이상해서 웃음이 터졌던 천중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가 울린 탓이었다.
“내일이라도 한번 뵙죠.”
- 예, 회장님. 연락 오는 대로 서류 보내고, 부르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최만호에게 그동안 지경화장품의 강남스퀘어 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자료는 모두 확보했는데 정식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법무팀에 보내주신 자료를 넘기겠습니다. 의심되는 정황이라고 법원에 신청해서 그 자료들을 정식으로 다시 구하면 증거로 채택됩니다. 회장님께서는 어느 정도 선까지 처벌하길 원하십니까?”
역시나 하는 최만호의 명쾌한 답이 있었다.
“가장 강력한 처벌은 어느 수준인가요?”
“영업방해 수준이라 형사처벌이 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 미라클의 매출이 상당해서 민사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꽤 금액이 크게 나올 것 같습니다.”
“지경의 법무팀이 어느 정도 능력을 지녔는지 확인하는 데는 가장 좋은 사건이 되겠군요.”
“어천수 코스메틱 법인, 어천수, 연구원이라는 박상구, 영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클레임을 건 여자들, 이렇게 처벌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천중명이 답을 한 직후였다.
“회장님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맡겨주십시오.”
최만호답지 않은 거친 장담이 있었다.
“회장님께 능력을 보일 기회가 없어서 법무팀 역시 벼르고 있던 참입니다. 이번 일로 능력을 평가하신다고 전하면 그보다 더한 모습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룹의 힘은 무섭군요.”
“저희는 회장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달릴 뿐입니다.”
천중명이 나직하게 건넨 말은 유진교가 받았다.
어쩐지 그가 전해주는 가르침 같아서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10시까지 회의를 마친 두 사람이 돌아갔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출출하기도 하고, 약 기운에 몽롱하기도 해서 잠을 잘까, 뭐라도 간단하게 먹을까 하는 참이었다.
“명예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비서실 직원의 말과 함께 천호득이 병실로 들어왔다.
체격이 작은 송달순이 휠체어를 밀고 있었는데 장만섭과는 다르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지저분한 병원에 있어?”
이제는 천호득이 저런 표현을 해줄 때 가장 매력 있어 보인다.
“외부로 말이 안 나가는 데는 이곳이 편해서요.”
“지경병원이 더 낫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천중명은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어머니는요?”
“놀라서 몸살이 났나본데 의사가 와서 치료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김순례인가 하는 양반이 음식을 싸준 모양이더라.”
천호득이 뒤를 돌아보자 송달순이 비서실 직원에게 찬합이 몇 개쯤 쌓여 있음직한 백을 건넸다.
“나, 그 달달한 커피 하나 주고 자리들 좀 비켜.”
“예, 회장님.”
그의 지시에 송달순이 봉지 커피를 만들어 가져온 뒤에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봉지 커피 특유의 향이 가득한 병실의 침대에서 상체를 세운 천중명과 그 옆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 이렇게 둘만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마신 천호득이 달각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놓았다.
“어젯밤 꿈에 형을 봤다. 그 커다란 사람이 내 다리에 매달려서 조르는데 꿈이라서 그랬는지 그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호득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고집을 잃은 것처럼 힘 빠진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내 못 안아줬다. 안아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어찌 된 게 몸이 안 움직였어. 그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그러더구나. 다음에는 매달릴 때 안아달라고. 그리고 잠이 깼다.”
아직 가슴에 남아 있던 어제의 대화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천호득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조철행 장관이 오전에 일찍 전화했더구나. 조승필과 회장이 화해할 자리도 만들 겸 병문안을 할 생각인데 함께 가지 않겠냐고.”
“오늘이요?”
“이 꼴을 보면 또 말을 만들어낼 인간들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철행 장관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인간이니까. 며칠 뒤로 미뤘다.”
말을 마친 천호득은 언젠가 삼성동의 탄천 주차장에서 보았던 꼬장꼬장한 얼굴을 꺼내 들고서 눈빛을 번득였다.
“이것들이 나를 정말 뒷방 늙은이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참에 버릇을 고쳐줄 생각이다.”
눈꺼풀 속에서 번들거리는 눈, 고집스럽게 늘어진 볼과 입술을 하고 천호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는 회장과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줄 생각이다. 그러니 함께 보게 되면 마음 독하게 먹어. 하는 짓을 봐서 결정하겠다만, 조철행을 장관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
잠시 잔을 노려보았던 천호득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버지께는 아직 멀었구나 싶어서요. 지금 보여주신 모습을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던 참이었습니다.”
“흐헤헤헤헤.”
뭐가 좋았을까?
천호득이 특유의 웃음을 쏟아냈다.
“뭐 좀 먹을까?”
“그러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었거든요.”
기분 좋게 웃은 천호득이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짧은 애!”
이왕 부를 거, ‘송 비서’라고 불러주면 참 좋을 텐데.
“부르셨습니까, 총수님?”
천중명의 생각을 모르는 짧은 애, 송달순이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
송달순은 김순례가 싸 준 거대한 찬합 가방을 들고 장만섭의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의 침대가 작아 보이는 덩치의 장만섭이었다.
팔에 링거와 혈액을 연결한 그는 시커멓게 멍든 얼굴로 송달순을 힐끔 보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김순례 아주머니께서 음식을 싸주셨어요. 점심으로 드시면 된답니다.”
“총수님이 드시는 음식은 잘 지켰어?”
“양념부터, 드시는 것까지 전부 제가 먼저 확인했어요.”
솔직히 체격이 작았다.
그래서 침대로 다가간 송달순의 시선이 장만섭의 얼굴보다 조금 위에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장만섭은 그 커다란 고개를 돌려 시선만 주었다.
“혹시 총수님께 나를 추천했는데 그 뒤에 마음이 바뀌어서 불편한 거면 말해주세요. 내가 알아서 말씀드리고 그만둘게요.”
“왜 그런 생각을 해?”
“면접 때 어떤 눈으로 나를 봤는지 기억은 하세요?”
당찬 송달순의 질문에 장만섭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오늘 지나서 퇴원하면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릴게요. 나도 먼저 온 장 비서님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있고 싶지는 않아요.”
송달순이 문을 향해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여기 옷장 열어봐. 내 지갑 있다.”
천호득이 언제 부를지 모른다. 그러니 시간을 오래 끌기 어려웠다. 망설이던 송달순은 옷장으로 가서 중간에 놓인 낡은 반지갑을 가져왔다.
“펼쳐봐.”
우렁우렁한 음성에 송달순이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는 왼편에 꽂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누구예요? 가족사진 같은데?”
“제대하기 전이야. 나를 보러 오다가…. 여동생.”
“세상에…?”
사진을 보던 송달순이 고개를 들었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다시 사진에 시선을 주었다.
“짙은 눈썹, 그 머리 모양, 코, 많이 닮았지? 그래서 처음에 놀라서 그랬다. 함께 일하는 데 불만 없다.”
장만섭은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건조하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세상을 버리려고 했을 때, 미련한 나를 끝까지 붙들어 준 사람이 곽대출 이사, 이런 나를 그냥 믿어준 분이 회장님, 굵은 정을 주시는 분이 총수님.”
나직한 장만섭의 음성이 지금은 조금씩 흔들리며 나왔다.
“총수님을 부탁한다. 내가 일어난 다음에 떠나든 말든, 그건 말 안 한다. 대신 그때까지만 총수님을 지켜주라.”
굳은 표정을 지은 송달순이 지갑을 다시 옷장에 넣고는 돌아왔다.
“내가 기분 나쁜 건 아니죠?”
“그런 일 없었다.”
앞을 바라본 채 나온 장만섭의 답이었다.
“총수님이 찾으실지 모르니까 갈게요.”
송달순이 병실을 나가자 장만섭은 천천히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숲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흑곰처럼 보였다.
**
유진교는 오전 11시에 예정되었던 기자 회견에서 지경그룹의 두 가지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지경전자의 상장 발표 때 내용을 흘렸던 덕분인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했는데, 몇몇 기자들은 준비를 많이 했던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경그룹이 제공하는 와이파이는 통신사에 상관없이 전면 개방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원 가입과 정보이용동의만 하면 광고나 기타 조건 없이 무제한 사용이 가능합니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인터넷 연결을 취소해도 되는데요?”
“와이파이 망이 설치되지 않은 소위 데드존과 TV 시청, 인터넷 전화를 사용하는 고객의 경우에는 당장 인터넷 연결을 취소해서는 곤란합니다.”
트집을 잡는 듯한 질문에 현실적인 답도 있었다.
이어서 블루크루드는 좀 더 전문적인 질문과 답변이 있었다. 물론 유진교는 마지막까지 자동차 회사의 인수라든가 하는 핵심적인 전략은 발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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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유진교, 최만호와 짧게 인사하고는 내내 혼자 있었던 곽대출은 점심에 주인영의 방문을 받고 행복했다.
“부모님 뵙기로 했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지금 그게 걱정되세요?”
처참한 모습을 본 주인영이 또 붉어진 눈으로 답을 해서는 곽대출의 가슴을 녹였다.
“업무 중에 다쳐서 병원에 계신다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거실 TV 아래 왼쪽 서랍 있지?”
느닷없는 곽대출의 말에 주인영은 시선만 주었다.
“내가 직접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돼서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거기 있는 봉투 좀 부모님께 전해드려.”
“그게 뭔데요?”
“회장님께서 주신 거야. 다른 소리 말고 먼저 전해드려.”
점심시간을 이용해 달려온 참이라 주인영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곽대출이 어렵기도 했다.
“퇴근하고 다시 올게요. 그때 말씀하세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주 과장.”
“예?”
“나는 주 과장이면 된다고.”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린 주인영이 밉지 않은 눈으로 곽대출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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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오전과 점심을 마친 천중명은 비서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곽대출의 병실로 향했다.
주인영이 들러서 인사하고 간 참이라 이미 그녀가 다녀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커피 한 잔 부탁하고, 잠시 자리 좀 비켜줘.”
“예, 회장님.”
사고 나고 근 하루 만에 겨우 둘이서 마주 앉은 참이었다.
“담배 피우자, 회장님아.”
“병원인데?”
“하여간, 요즘 이상하게 순둥순둥한 척 많이 하신다? 이런 분이 어떻게 삼합회를 상대하셨을까나?”
농담을 건네던 곽대출이 몸을 일으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먼저 병실의 창문을 열고는 이어서 절뚝이는 걸음으로 옷장에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왔다.
달달한 커피에 담배까지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과 손, 목덜미와 볼 아래로 턱까지 시커멓게 멍이 든 몰골을 하고도 두 사람은 그렇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30분쯤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을 때였다.
지이이잉.
[법무팀에서 법원에 증거 확보를 위한 소장을 접수했습니다. 내일까지 주셨던 자료가 모두 법원에 제출할 수 있는 정식자료로 준비됩니다. 가장 먼저 어천수 코스메틱의 머라클 생산 중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그와 동시에 어천수 코스메틱의 불법적인 행태에 관한 언론 보도를 내보낼 예정입니다.]
최만호가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천중명이 픽 웃은 뒤에 내용을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어천수 코스메틱의 회장 어천수가 해외에서 불법 도박을 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최만호 비서실장에게 내용을 보내겠습니다.]
홍콩물고기를 상대하는 동안 제대로 역할을 못 했다고 생각한 황성규의 노력 가득한 문자가 연달아 들어왔다.
[고생했습니다. 부탁합니다.]
천중명은 두 사람에게 비슷하게 답문을 보냈다.
“무슨 소식인데 표정이 그러셔? 우리 선영 사모님이신가, 회장님아?”
“고구마를 삶을 준비가 다 끝났거든.”
곽대출은 이 내용을 모른다.
픽 웃은 천중명은 곽대출에게 대강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설명 끝에 던진 천중명의 질문에,
“그걸 뭘 고민할 게 있어? 당연하게 따따블로 갚아줘야지, 회장님아.”
곽대출의 분명하고 확실한 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