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 경고를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사람에게는 한계란 게 분명히 있다.
윤만석, 곽대출과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고기를 구워 먹는 것까지 초인적인 의지로 버티고는 결국 승합차의 뒤쪽 의자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올라가자.”
천호득의 지시로 승합차가 서울로 향하면서 모처럼의 강원도 나들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끝났다.
그 우직한 장만섭마저 다섯 대나 맞은 주사의 영향인지 천중명 옆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고, 몸살 기운이 일어난 이은명도 의자의 열선에 의지해 몸을 눕혔다.
기특한 건 송달순이었다.
어린 나이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는데도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사이드미러로 뒤를 살피는 한편, 운전기사가 졸지는 않는지 간간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은명마저 잠이 든 다음이었다.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셋을 귀에 걸고는 휴대 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 네, 총수님.
“오늘 일이 있었다.”
- 회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상기가 관련된 일이냐?”
- 그렇지는 않습니다. 회장님이 어제 거래를 통해 박승양과 회사 계좌로 총 8조에 가까운 수익을 얻었는데, 손해를 본 상대방에 삼합회가 끼어 있어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천호득은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윤 실장. 내가 부탁하면 알지?”
- 예, 총수님.
그런 뒤에 천호득이 의미심장한 다짐을 건넸고, 윤만석이 단단하게 답을 했다.
“고생해.”
- 들어가십시오, 총수님.
통화가 끝난 뒤에 천호득은 고개를 돌려 뒤편의 의자에서 잠이 든 천중명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상을 천호득 나이까지 살아보면 별별 일이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도 놀라거나 마음 아픈 법이 거의 없다.
자식을 잃는 것을 빼고 말이다.
‘저 녀석을 안 보고 살아갈 수 있을까?’
바다를 보며 던졌던 질문이었다.
아버지라고 불러주고, 목과 어깨를 진심으로 주무르며, 지경그룹보다 천호득에게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저 녀석을 잃고 무슨 힘으로,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나.
나직하게 숨을 내쉰 천호득은 또다시 고개를 돌려 규칙적으로 흐르는 불빛에 드러나는 천중명을 보았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테지. 그런 눈을 할 정도로 너에게도 아프고 쓰라린 이유가.’
송달순이 사이드미러로 뒤를 살피는 동안 천호득은 서글프게 웃었다.
저 녀석이 사악한 인간이었다면 미쳤다고 망치와 돼지 잡는 칼에 몸을 던지겠나. 천중명이 눈 한 번 질끈 감았으면 이미 천호득은 죽었을 몸인데 말이다.
하늘이 저런 아들을 천호득에게 준 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일이었다.
‘너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혼자만의 다짐을 건넨 천호득이 홀가분한 얼굴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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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우는 붕대를 풀어낸 곽대출의 상처에 고개를 바싹 들이밀었다.
“이건 회칼에 당한 상처가 아닌데? 뭐였습니까?”
“끄응…. 커다란 칼하고 도끼요.”
유헌우가 상처에 주사기로 소독약을 뿌려대고 있어서 곽대출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 답을 했다.
“상처만 봐서는 아예 작두날이네요, 작두날. 운은 참 좋았어요. 아니면 반사 신경이 뛰어나서 잘 피했거나. 손이 저리는 증상은 없어요?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거나?”
“통증 때문이라면 몰라도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CT를 찍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머리의 상처도 그렇고, 이 정도면 뼈나 신경이 다쳤을 가능성도 높아요. 응급처치가 워낙 잘된 점도 운이라면 운인 거지요.”
라텍스 장갑을 벗은 유헌우가 차트에 뭔가를 빠르게 적어 넣었다.
“원장님. 한 시간쯤 뒤에 평창동으로 앰뷸런스 좀 보내주세요. 그쪽에 환자 두 명이 있는데 상태가 나만큼이나 심한 모양입니다.”
“누구요? 지난번에 함께 왔었던 그분이요?”
“예. 그리고 한 명 더요.”
상처가 울린 곽대출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을 건넨 뒤였다.
“주소 부르세요.”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한 유헌우가 펜을 들고서 주소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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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합회 홍콩 책임자 정동방은 무릎을 꿇어 바싹 낮춘 자세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커다란 샹들리에, 붉은색 카펫이 깔린 넓은 연회장 수준의 공간이었다.
정동방의 정면에 3인용 의자가 있었고, 그곳에 덩치가 커다란 중년 남자가 다리를 거만하게 벌린 채, 위압적이고, 살벌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쭉 둘러싸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우리가 투자에 실패하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형제들을 동원했었지?”
상석에 앉은 삼합회 강남 총 책임자 양서평이 불만스럽게 고개를 틀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보냈으면 마무리를 잘하던가.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만 잔뜩 하게 했으니 일본의 조직에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습겠나?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줘야 할 보상은 또 어떻고.”
“제 잘못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이마를 카펫 바닥에 처박은 정동방을 양서평은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그동안 홍콩을 책임지느라 쏟은 노력을 모른 척할 수야 없지. 그러니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그런 뒤에 묵직하게 말을 뱉어냈다.
카펫에 이마를 처박은 정동방이 눈알을 좌우로 굴릴 때였다.
“저놈을 죽여.”
감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담기지 않은 양서평의 명령이었다.
“형님! 제게 기회를 한 번만 더…! 형님! 형님!”
고개를 들고 애원하는 정동방을 두 명의 조직원이 다가와 양쪽을 붙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국의 지경그룹이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지닌 힘을 과시하듯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던 양서평이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의 조직이라고 해도 황당할 판에 그룹의 회장에게 삼합회가 당하고 돌아왔으니.”
풍성한 정장과 귀 쪽으로 난 희끗희끗한 머리와 위로 쭉 찢어진 눈매가 그의 경륜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를 노렸던 놈들은?”
“증권사 여직원은 퇴근 후부터 다음 날까지 집에만 박혀 있어서 기회를 잡지 못했고, 허선영이라는 여자는 회사로 경호원을 부르는 바람에 지켜보기만 했었답니다.”
“멍청한 놈들. 그래놓고 다시는 우리 이름으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차마 답을 하기 민망했던지 여태 상황을 보고하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멍청한 약속을 했다는 책임자 놈은?”
“황춘룡입니다. 조금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놈도 정동방 곁으로 보내.”
“예!”
또 한 사람의 운명이 양서평의 말 한마디로 결정되었다.
“황춘룡이 약속을 했으니 우리가 움직이기는 어렵겠고, 그렇다고 이대로 망신만 당한 채 끝낼 수도 없고.”
양서평은 뒷짐을 진 채 잠시 고개를 저었다.
“지경그룹이 하는 사업, 앞으로 하려는 사업을 전부 알아봐. 방법은 그 뒤에 세우겠다. 그리고 정동방을 꼬드겼다는 미국 놈을 찾아. 그놈의 얼굴을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양서평이 홀을 빠져나갔고, 그 뒤를 조직원들이 줄줄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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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우는 현찰을 좋아하고, 간호사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표현을 저속하게 하지만, 반대로 칼에 맞은 상처를 치료하는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창동에서 구급차를 타고 온 천중명과 장만섭이 치료를 마치고 병실에 올라갔을 때는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미 병실에서 잠든 탓에 곽대출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천중명은 곽대출과 장만섭을 포함해 세 개의 1인실을 부탁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천중명의 신분을 알게 된 유헌우는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돈도 여유 있는 분이고 하니 회장님은 특실을 사용하시는 게 좋겠지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제안을 했는데 천중명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자! 그럼 특실을 구경하시죠.”
유헌우가 호텔 지배인처럼 권하는 대로 천중명은 특실에 들어갔고, 링거 줄에 주사기를 꽂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새벽이었다.
온몸에 달려드는 끔찍한 고통에 눈을 뜬 천중명이 앞에 앉은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눈을 끔벅였다.
“정신이 들어요?”
허선영이었다.
“언제 왔어?”
“어젯밤에 윤 실장이란 분이 문자 주셨어요. 와보니까 잠이 들어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고요.”
“밤새 그러고 있었어?”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허선영은 손수건을 들어서 천중명의 이마와 볼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허선영이 움직이면 꼭 향긋한 풀 향기가 난다.
어떤 향수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느낌이었다.
“출근해야지.”
“중명 씨가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천중명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직원들은 그래도 되는데 선영 씨는 그러면 안 돼. 결정해야 할 많은 일들이 뒤로 밀리거든. 그 한 건, 한 건이 모두 직원들의 노력이잖아. 디자인은 고 상무가 대신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러니 어서 가.”
졌다는 것처럼 허선영이 웃었다.
“이런 말 하는 것 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천중명은 왼손을 뻗어 손수건을 쥔 허선영의 손을 잡았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인터넷에 이상한 글들이 올라왔다가 싹 사라졌어요. 경찰도 사채업자에게 앙심을 품은 조직폭력배의 난동이라고만 발표했고요.”
“괜찮을 거야.”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몸을 세운 허선영이 조심스럽게 상체를 숙여 천중명을 안았다.
풀 향기가 더 짙게 풍긴 다음이었다.
“출근할게요.”
몸을 일으킨 허선영이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고, 교대하는 것처럼 유헌우와 간호사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링거 교체하고, 상처 본 뒤에 주사 맞읍시다.”
표정과 음성만 보면 영락없는 돌팔이인데 저래도 치료에 집중할 때 보면 또 묘하게 신뢰가 가는 구석이 있는 의사였다.
“끄응.”
살에 엉겨 붙은 붕대를 떼어낸 유헌우가 상처를 치료한 뒤에 새로 붕대를 감았다.
“좀 더 주무세요. 깊게 박힌 상처가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CT에서도 이상 소견은 없고요.”
주사를 놓아주는 유헌우의 말을 들으며 천중명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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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필은 지경전자의 회장이었다.
오전 7시에 임원 전체 회의를 소집해서 그날 할 일과 목표를 정해주고 8시에 집무실에 심복을 불러들이던 그가 느닷없이 할 일이 없어졌다.
물론 세계적인 기업에서 프러포즈는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결국, 지경전자에서 얻은 경험과 정보를 쏟아내는 일을 하게 될 테고, 그 역할이 끝나면 또 버려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룹 회장에게 반기를 들고 쫓겨난 데다, 후임으로 올라온 기용도가 여의주를 문 용처럼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상황이라, 지경전자의 협조를 받기도 어려웠다.
조승필은 오전 7시에 호텔의 식당에 들어섰다.
사람이 일을 잃었다고 해서 바로 손을 놓으면 늙고, 힘이 빠진다. 그러니 이렇게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회장님.”
조승필이 조식 뷔페에 들어서자 창가에 있던 조기대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못마땅하지만, 살면서 어떻게 좋은 사람만 보고 살겠나.
엄한 표정으로 조승필은 창가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앉지.”
조승필이 앉는 것을 본 뒤에야 조기대가 공손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
“말씀도 마십시오. 홍콩물고기 쪽으로 올인했다가 망가지는 바람에 전화도 제대로 못 받습니다.”
증권바닥에서 화서투자증권의 조기대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설치던 그가 쫄딱 망해서 차 하나 없이 돌아다니고, 백화점과 골프장 다니며 살던 그의 처는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코스닥 상장사라도 하나 인수해서 작전 한 번 하면 다시 일어설 텐데, 그럴 기회를 만드느라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조승필에게 속마음을 넌지시 비친 조기대가,
“회장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비굴한 태도로 안부를 물었다.
“자네 천중명 회장 잘 알지?”
“천중명 회장이요? 예. 최근에는 회장 취임 전인가? 곱창집에서 한번 마주친 게 전부인데 대신 전에는 꽤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때까지 알아주는 개망…. 아, 표현이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이라도 개망나니 짓을 하고 다녔으면 개망나니지, 죄송할 건 뭐가 있어. 그래서 말인데.”
조승필이 말끝을 늘이자 조기대가 얼른 고개를 들이밀었다.
“과거에 천중명 회장이 한 짓 중에 자네와 둘이서만 아는 비밀 같은 거 없을까? 내가 그것과 관련한 질문을 했을 때 모르면 이상한 일. 대신 부인할 수도 없는 일 말이야.”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지 조기대는 눈만 껌벅였다.
“내가 천호득 명예회장을 뵐 거야. 자리는 조철행 장관이 만들 거고. 그 자리에서 이런 일 아느냐? 했을 때 천중명 회장이 곤란해질 일.”
허공에 시선을 든 조기대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들추고 있었다.
“어쩐지 천중명 회장이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 같거든. 그걸 내가 입증하면 기회가 다시 올 수도 있어.”
차마 성형수술을 한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을 하지 못한 조승필이 에둘러 상황을 전한 다음이었다.
“제게 시계가 있습니다. 그때 오공자라고 몰려다닌 사람끼리 기념으로 함께 산 시계거든요. 룸살롱에서 팔을 내밀고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는지 물어보십시오.”
“시계? 그거야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잖나.”
“뒤에 다섯 명의 이름을 모두 새겼습니다. 회장 취임하고 축하한다고 비서실로 전화했었는데 무시당해서 다들 서운해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 시계가 자네에게 있나?”
“아직 안 팔았습니다. 사진도 있고요. 생활비 때문에 팔긴 팔아야 하는데….”
조기대의 얍삽한 대꾸를 들은 조승필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그의 앞에 가볍게 던져주었다.
“바로 가져올까요?”
조기대는 봉투에 걸맞은 태도를 곧바로 꺼내 들었다.
“오지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혹시 자리에 참석하실 때 오지은도 꼭 데려가십시오. 걔가 입 열면 천중명 회장의 망나니짓 모두 드러납니다.”
봉투를 든 조기대의 조언도 있었다.
됐다.
천상기와 오지은이 준비해 놓은 자료와 저런 증거물이라면 천호득을 흔들 수는 있겠다.
사람을 믿지 않는 그의 심성에 불을 지필 수만 있다면.
봉투를 드는 조기대 앞에서 조승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