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38화 (138/315)

# 138

138. 경고를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천중명이 천호득의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신호음이 두 번쯤 이어진 뒤에 천호득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 혹시 오늘 어디 가세요?”

- 회장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천호득의 음성 뒤에 달려드는 침묵으로 그가 지금 장만섭을 노려보았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세요?”

- 갑갑해서 바람 쐬려고. 고성에 가는 길인데 하루 자고 올 수도 있어.

“어머니도 함께 가세요?”

- 새로 뽑은 키 작은 애까지 넷이 움직인다.

이어지는 질문이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주하면 기분 좋은 웃음을 쏟아내는 양반이 또 성격이 저런 걸 어쩌겠나.

“아버지. 죄송한데 거기 장 비서 좀 바꿔주세요.”

- 그래.

천호득의 답이 있고 나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전화 받아라.”하는 칼칼한 소리가 먼저 들렸다.

- 전화 바꿨습니다.

“난데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총수님이 눈치채지 않게 주의하고.”

- 예에, 회장님.

천중명의 음성에 묻은 긴장감을 알아챈 것처럼 장만섭의 답이 길게 늘어졌다.

“먹구름이 몰려간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 예에, 회장님.

UDU 훈련에서 사용하던 은어를 건네자 장만섭이 멈칫한 뒤에 답을 내놓았다.

“지금 위치는?”

- 가평 못 미쳤습니다.

“잠깐만.”

천중명은 컴퓨터에 있는 포탈로 경춘고속도로를 확인했다.

“됐어. 다시 총수님 부탁해.”

- 예에, 회장님.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통화를 원하십니다.”하는 우렁우렁한 장만섭의 음성이 들렸다.

- 여보세요?

“아버지. 저도 갑갑하던 참인데 그 앞쪽 가평휴게소에서 좀 기다리시면 어떻겠어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 회장이 그럴 여유가 있어?

“목요일까지 예정했던 일이 어제 끝났거든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그럼 고성으로 바로 와.

“같이 가야 재미있지요.”

- 허어!

답답한 속을 토해냈던 천호득이,

- 그럼 빨리 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엉뚱한 걱정에 바쁘디 바쁜 하루를 날려 먹는 건지 모른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일으킨 놈들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삼합회까지 설친다면 천호득이 위험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휴대 전화기와 재킷을 든 천중명은 바쁘게 집무실을 나섰다.

**

점심으로 간짜장을 주문한 곽대출은 기지개를 커다랗게 켰다.

서상현을 포함한 유비캅 직원 셋이 건물 입구와 4층의 남부증권 복도, 그리고 객장 안에 있는 데다, 곽대출까지 버티고 있어서 그다지 크게 염려할 일은 없었다.

아무리 삼합회라고 해도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대낮에 영업 중인 증권사를 덮쳐 린치를 가할 리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래도 말이지?

곽대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페의 창을 통해 도로를 살폈다.

도깨비 훈련 최초로 추적조를 완벽하게 뿌리친 천중명의 경고를 무시하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좋아! 우선 짜장면 하나 힘차게 때려주고 삼합회니 뭐니 오면 그 힘으로 눈알을 파내주면 되는 거지.

“이 새끼들 오기만 해 봐라.”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다시 창 아래를 살피는 곽대출의 오른손 엄지가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끄덕였다.

**

가평휴게소를 향해 달리는 길에서 천중명은 먼저 유진교에게 전화를 넣었다.

“총수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고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내일 출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안 계신 동안 문제없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마치 이런 상황을 훈련했던 사람처럼 유진교의 반응은 편안했다. 확실히 그의 일을 대하는 자세와 판단, 그리고 지금 같은 태도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더 배워야 했다.

천호득의 노련함, 유진교의 능숙함, 그리고 최만호의 냉정함을 모두 갖출 때까지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이어서 황성규의 번호를 찾았다.

“삼합회가 총수님과 내 주변을 노릴 수 있습니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그쪽의 움직임을 알아봐 주세요. 특히, 홍콩 담당 정동방이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총수님과 계실지 모르니 정보가 나오면 우선 문자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곽대출 이사에게도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세요.”

- 예, 회장님.

천중명의 당부를 받은 운전기사가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천중명은 윤만석의 번호를 눌렀고, 통화가 시작되자 지금 상황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 특별히 더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천중명의 경고에 답을 한 윤만석이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끊으려던 통화를 붙들었다.

- 오지은 양을 중간에 세우고 천상기 회장과 조승필 회장이 회장님의 뒤를 살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창욱이라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데, 그가 나온 고등학교와 대학교, 군대생활까지 거의 모든 자료를 찾아놓았습니다.

윤만석의 보고를 듣는 순간,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조승필 회장이 조철행 장관을 통해 관련 자료를 추가 수집하고, 또 회장님을 곤경에 빠트릴 정황이 더 없는지 계속 찾는 눈치였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윤만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 외람된 의견입니다만, 이대로라면 천상기 회장은 총수님과 회장님께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허락해주시면 그전에 사고사로 처리하겠습니다.

윤 실장은 천중명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천호득과 지금의 천중명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천상기를 해결하겠다는 그의 요청은 그런 느낌이었다.

“총수님께서 형과 함께 죽을 계획을 준비하셨었습니다.”

천중명은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제게 독이 될 것을 빤히 아는데 그냥 지켜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더는 자식을 앞세울 자신도 없으셔서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윤만석은 정말 조용하게 천중명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형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총수님과 저를 위해 건네준 결심은 고맙게 간직하겠습니다.”

- 회장님.

통화가 끝날 것을 짐작했는지 윤만석이 또 천중명을 붙들었다.

- 총수님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당부를 전했다.

“아버지니까요. 제게는.”

여운이 남는 윤만석과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숨을 길게 내쉰 천중명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차창 밖으로 펼쳐진 남한강 줄기를 보았다.

참 어렵다, 사는 거.

생각보다 정말 쉽지 않다, 꼴통재벌이 되는 것도.

홍콩물고기를 때려잡았더니 물 마실 틈도 없이 고구마와 삼합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목이 메는 형국이었다.

누구나 각자 주어진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때론 비탈을, 어떨 때는 내리막을 걷겠지만, 역시 자기 어깨의 짐이 가장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까.

천중명은 픽 웃었다.

원래 내가 포기하는 법을 못 배웠거든.

그러니 어쩌겠냐.

너희가 죽든, 내가 죽든 해야지.

천중명의 침묵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운전기사가 무서운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남은 한 통의 전화를 걸어야 할 때였다.

자고 간다고 하면 허선영이 많이 서운해할 텐데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

오후 3시 30분이 넘은 시간이었다.

객장에 앉아 시세판을 보던 유비캅의 직원이 복도로 나왔다는 무전을 전했다.

아직 박승양이 증권사를 나오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아흐흐-!”

곽대출은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또다시 길게 기지개를 켰다.

휴대 전화기라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그러고 나면 동체 시력이 순간적으로 떨어져서 그러지도 못했다.

“뭐야, 이 개새끼들! 사람을 설레게 했으면 뭔가 좀 떼로 몰려오든가.”

종일 창밖에 펼쳐진 하늘이나 도로를 지켜보던 곽대출이 혼잣말을 떠든 다음이었다.

우우웅.

그의 휴대 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곽대출은 빠르게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삼합회 정동방의 최측근 양청이 오늘 오전에 평택의 안중항을 통해 입국했습니다. CCTV 확인 결과, 동반 인원은 네 명입니다. 안중에는 삼합회 조직원이 상주하고 있는데도 네 명을 새롭게 보낸 것은 각자 목표를 가졌다고 판단합니다. 그들이 노리는 목표는 네 명이고, 이미 행동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황성규가 보낸 문자였다.

“뭐야, 씨발! 박승양, 이명선 말고 두 명은 누구야?”

문자를 확인한 곽대출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살폈다.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

가평휴게소에서 천호득을 만난 천중명은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뒤에 함께 고성으로 향했고, 오후 3시경에 가진항의 횟집에 자리했다.

평일에다 점심과 저녁의 중간이었고, 아직 시즌이 아닌 탓에 작디작은 항구 가진항은 다른 손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다의 바로 앞에 있는 횟집이었다.

천호득은 주인이 권한 문어와 자연산 광어회, 물회를 주문했다.

“밖에 있는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준비해주세요.”

“그렇게 나요? 알겠습니다.”

주문에 감사한 주인이 나간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리면서 황성규가 보낸 문자를 액정에 올려놓았다.

저쪽이 네 명을 노린다고?

천호득, 박승양, 이명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천상기? 아니면 허선영?

아무래도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천중명을 천호득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급한 결재가 있나 봅니다. 잠시 나가서 통화 좀하고 오겠습니다.”

이런 모습에 익숙한 듯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중명이 밖으로 나오자 송달순, 운전기사와 함께 있던 장만섭이 테이블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총수님 잘 살펴.’

눈짓을 전한 천중명은 횟집을 나섰다.

가장 먼저 허선영에게 전화를 넣었다.

- 여보세요? 도착했어요?

“좀 전에 바닷가에 도착했어.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선영 씨. 놀라지 말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천중명의 음성을 느낀 허선영이 “무슨 일이에요?”하고 놀란 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냥 혹시 몰라서 그래. 내가 윤 실장을 통해 사람을 보낼 테니까 그 사람들 도착할 때까지 잠시 피해 있으면 싶어. 그럴 만한 곳이 있을까?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고 선영 씨가 집무실에 있는 것처럼.”

- 눈에 안 띄게요?

“안 되겠으면 경찰을 불러. 고 상무에게 부탁해서 최대한 많은 숫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해.”

경찰을 불렀다가 아무 일도 없으면 공연히 소란만 떠는 꼴이 된다. 그래도 허선영이 다치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 눈에 안 띄게 피할 수 있으면요?

“윤 실장이 보낸 사람들과 삼성동으로 이동해. 그 뒤엔 내가 갈 때까지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마. 아니면 특급 호텔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투숙하든가. 윤 실장에게 부탁해서 바깥을 지키게 할게.”

-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면 어느 게 나아요?

정치인의 딸답게 허선영은 그사이 평정을 되찾은 음성이었다.

“호텔보다는 차라리 삼성동 집이 나아. 문만 열어주지 않으면 되고, 윤 실장이 판단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경찰을 부를 수도 있을 것 같거든.”

- 알았어요. 조금 뒤에 포장 박스 나가는 게 있으니까 우선 창고로 피해 있을게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중명 씨는 괜찮은 거예요?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휴대 전화기 진동으로 바꾸고, 윤만석 실장이 전화하면 받아. 뒷번호만 알려줄게. 그리고 가능하면 서둘러 올라갈 테니까 내가 갈 때까지는 절대 문 열어주지 마.”

허선영에게 번호를 알려준 천중명은 곧바로 윤만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회장님.

통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천중명은 황성규, 허선영과 나눈 이야기들을 전했다.

“경찰에 협조를 구해주거나, 대원을 보강해 주세요.”

- 경찰의 협조를 구할 수는 있지만, 제가 대원들과 해결하겠습니다. 그게 한결 조용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쪽도 조심하시고요. 네 곳을 노린다니까 더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 맡겨주십시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무거운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때 천중명이 늘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설마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준비하면 실패가 거의 없었다.

설마하니 대낮에 횟집에 있는 사람을 노리겠어?

설마 영업 중인 증권사에 들이닥쳐서 박승양에게 칼을 휘두르겠어?

그 설마가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이 횟집을 향해 몸을 돌릴 때였다.

바닷가 위로 난 외길 도로를 타고 승용차와 승합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젠장.”

설마하니 저 두 대에 삼합회 놈들이 타고 있겠어?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천중명의 시선 앞에서 외길 도로를 타고 달린 승용차와 승합차가 주차장이 있는 이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천중명의 재킷과 머리칼, 바지를 거칠게 흔들 때 승용차와 승합차가 천천히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바로 덤비겠어?

멈춰 선 승합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촌스러운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염병할.

설마하니 내가 저놈들을 죽이기라도 하겠어?

천중명은 참 오랜만에 도깨비 특유의 무서운 눈빛을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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