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37화 (137/315)

# 137

137. 경고를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1)

천중명이 황성규의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 네,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신호음도 제대로 들리기 전에 대꾸가 넘어왔다.

“조사를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 그렇지 않아도 찾아뵐까 하던 참입니다, 회장님. 의논드릴 것도 있는데 시간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시간을 부탁한다는 표현도 그렇고 전에 없이 공손한 질문이 건너왔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까 편할 때 오시면 됩니다.”

- 본사 건물 앞에 있습니다.

도착해서 연락하려던 모양인지 황성규는 본사 앞에 있었다.

“바로 올라오세요.”

- 감사합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어깨를 들썩했다가 내려놓았다.

천하의 황성규가 이 정도로 어렵사리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

천중명의 집무실을 나선 유진교는 모처럼 최만호를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시원한 음료 한 잔 어떤가?”

“감사합니다.”

답을 들은 유진교는 구내전화기의 인터폰을 이용해 음료를 부탁했다. 그의 비서가 잔 두 개와 두 병의 음료를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음료수 좀 따라주는 건데 뭘 그렇게 당황해?”

유진교는 병을 들어 최만호의 잔을 먼저 채워주었다.

“들어.”

그렇게 둘이서 먼저 음료를 들이켰다.

“제가 그렇게 표시 났습니까?”

“지쳐 보이긴 하더군.”

계면쩍어 하는 최만호의 질문에 유진교가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나도 그렇거든. 일은 끝이 없고, 회장님께서는 정석을 밟으시려고만 하니 갑갑한 순간이 많지. 그런데 말이지.”

음료수 잔을 들고 안을 들여다보던 유진교가 말끝에 시선을 들었다.

“엉뚱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써지는 신화를 옆에서 지켜보는 게 아닌가 싶거든. 늘 지금 같은 상상을 하고는 했었지. 직원들에게, 고객에게, 그리고 한국의 모든 기업에 표준이 되는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상상.”

말을 마친 유진교가 시원하게 음료를 들이켰다.

“회장님 덕분에 꿈을 이루기는 했는데 과정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지.”

말을 마친 유진교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었다.

“본부장님은 지금 우리 지경그룹이 제대로 된 길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당돌한 질문일 수도 있었다.

“그룹에서 오너는 방향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시지. 그런 뒤에 주어진 방향으로 갈 가장 좋은 방법을 구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야. 그게 싫다면 오너를 모시는 부서에 남아있을 필요가 있을까?”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듭니다.”

최만호의 대꾸에 유진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나? 여자 연예인이나 여직원을 건드린 뒤치다꺼리 따위 아예 없어졌다는 걸? 저 젊은 나이에 10년이나 20년 뒤를 가리키는 분을 모시고도 무언가 이루지 못한다면 나중에 너무 억울하지 않겠나?”

유진교의 이어진 질문에 최만호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선물거래로 주식회사 지경과 건설 계좌에 1조5천억 원을 혼자 만드셨는데 그걸 비자금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안 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기운이 좀 나겠지?”

“음료수에 산삼을 잔뜩 갈아 넣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최만호는 기운을 많이 되찾은 얼굴이었다.

**

황성규를 맞은 천중명은 그가 원하는 커피를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았다.

“회장님. 조사할 내용을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황성규의 요청에 천중명은 어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이어서 어천수와 전에 어둠에서 보았던 연구원, 그리고 클레임을 걸었던 여자 고객과의 연결점 등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황 선생님이 부탁하실 건 어떤 내용입니까?”

그런 뒤에 천중명은 궁금했던 점을 그에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화요일에 황채산을 정리하신 것을 보며 제 부족함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거대 자본이 들어온다면 그렇게 빠르고 무섭게 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천중명을 바라본 상태에서 황성규가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본사로 들어와서라도 조직을 보강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는데, 제가 하는 일이 회장님과 지경그룹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차피 황 선생님이 하는 일이 드러나면 밖에 있다고 해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와 기술 분야의 인원을 대폭 보강할 생각이었으니 그 조직에 포함되는 것으로 하지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며, 그룹은 왕국과 같다고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누군가는 음지에서 애써줘야 합니다. 미국이 공연히 황 선생님 같은 분을 교육하고 임무를 맡기겠습니까? 같은 맥락인 거죠.”

“그렇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황성규는, 요 며칠 사이에 천중명이 더 성장했다고 느꼈다.

“필요한 자금과 설비, 그리고 보강해야 할 인원이 정리되면 바로 보고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손도운은 그가 전부터 친분이 있던 개발자들을 찾아다녔다.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축하해.”

그를 부러워하는 개발자들의 삶은 몇몇을 제외하고 다들 이전의 손도운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들에게 밥도 사고, 적게는 백만 원, 많게는 몇백만 원의 봉투도 슬쩍 건네주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회장님을 한번 믿어 봐.”

“이 사람이? 제품 하나 성공하더니 지경그룹 회장을 우리 회장님이라고 불러?”

“내가 다리 놓으면 한번 믿어보기는 할 거야?”

손도운의 제안에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했다.

“절대 제품 빼앗기는 일은 없다니까. 내가 약속할게. 개발에 도움도 주실 거고, 내가 받은 것처럼 로열티 확실히 챙겨주신다고. 나 봐. 미라클 성공하고 받은 수당이 90억 원이 넘어.”

“흠.”

“자네 지금 개발하는 거, 개발비가 얼마나 필요해? 정 못 미더우면 내가 부담할게. 성공한 뒤에 회장님께 말씀드리면 믿겠어?”

손도운의 음성이 좀 더 가늘고 높다랗게 나왔는데 그는 이제 그런 목소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자네가 다리를 놓아줬다고 치자. 그래서 지경그룹의 지원을 받아 연구했는데 실패하면? 그럼 또 그때까지 개발했던 걸 내놓아야 하잖아.”

“이러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싸움을 하느니 한번 제대로 해보자. 내가 보장한다니까. 절대 변할 분이 아니야. 솔직히 말할까? 나도 미라클 최소 개런티 받은 거로 끝날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손도운의 맞은편에 앉은 개발자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커피전문점의 소음을 배경으로 침묵하던 상대방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렇게 가족들 고생시키느니 한번 해보기나 하자. 말씀드려봐 줄 수 있어?”

“잘 생각했어. 내가 꼭 기회를 만들게. 요즘 워낙 바쁘셔서 다른 임원이 오더라도 그건 이해해줘.”

“아무렴 그룹 회장님이 나 같은 개발자 만나러 올 정도로 한가하겠나? 그나저나 제수씨도 이젠 좀 걱정 덜었겠네.”

상대방의 말에 손도운이 계면쩍은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중명을 떠올리며 기대에 찬 숨을 들이마셨다.

풀처럼 발라도 되고, 종이 형태로 만들어 케이스 안쪽에 깔아도 되는 배터리다. 심지어 뒷면에 발라놓으면 DDR4 메모리의 전력소모량 1.25 볼트를 30일간 유지할 정도였다.

맞은편의 괴짜가 개발 중인 그 제품을 천중명에게 건넬 수만 있다면?

나노셀룰로오스 배터리가 제품화된다면 기존의 스마트폰 배터리는 아예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휘는 플렉시블 스마트 폰의 가장 아픈 부분도 해결한다.

두께며 성능이며, 혁신도 이런 혁신이 없었다.

‘회장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제품을 있는 대로 쓸어 담아서 가겠습니다.’

갑자기 감정이 울컥 올라와서 손도운은 시선을 떨구고 눈을 껌벅였다.

지경화장품 구석을 향해 서서 눈물을 닦으며 다짐했던 일이었다.

베풀어준 은혜를 꼭 갚는 손도운이 되겠다는 것 말이다.

**

정동방은 느닷없이 날아온 미국인 스케이지 사이몬이란 남자를 향해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갈색 머리칼, 마흔 중반, 파란 눈까지는 이해한다. 그런데 헤지 펀드의 부사장이라는 그가 정동방을 마주하고도 눈썹 하나 위축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머리를 밀어서 번쩍이는 정동방은 홍콩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터였다.

가슴둘레 엄청나지, 팔뚝은 어지간한 여자 허벅지보다 굵지, 눈매 사납지, 그런 정동방을 맞은편의 스케이지는 오다가다 만난 홍콩 아저씨 보듯 하고 있었다.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그려낸 얼굴을 하고서 정동방은 다시 스케이지의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양손을 앞으로 모은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실내에서 유난 떨기는.’

저 정도야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자세가 남달라서 뭔가 께름칙하니 켕기는 건 분명히 있었다.

“정 회장. 다시 묻겠습니다. 황채산은 어디 있습니까?”

불편한 정동방의 시선을 무시한 채 스케이지가 나직한 질문을 건넸다.

어색하기는 했는데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중국어였다.

“그의 계획을 믿었다가 우리도 한국 돈으로 무려 2조 원의 손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를 잠시 만나볼 권리쯤 있지 않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는 이미 물고기가 먹어치웠소.”

정동방은 머리칼 하나 없는 정수리 근처를 검지로 긁으며 답을 내놓았다.

“고기 가는 기계 아시나? 거기에 산 채로 다리부터 넣고 갈아버렸지. 그런 뒤에 주먹만 하게 뭉쳐서 바다에 던졌소. 너무 늦은 거지.”

섬뜩한 말이었는데 스케이지는 ‘그랬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우리 정산만 남았는데 정 회장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어떻게 하다니?”

“그냥 계실 분은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입맛을 다신 정동방은 입술을 내민 얼굴로 스케이지를 바라보았다.

“천 회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그런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거야!”

“흥분할 일은 아닙니다. 협조할 부분은 협조하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불끈한 정동방을 향해 스케이지는 다독이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한국은 치안이 엄격해서 총을 사용하면 절대 조용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교통사고인데 그건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교통량이 워낙 많아서 제 속도로 들이받기 어려우니까요.”

이게 헤지 펀드의 부사장이야, 조직의 부두목이야?

정동방의 눈빛에 담긴 생각을 알아챘는지 스케이지는 깊게 들어간 눈을 늘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안중을 통해 조직원을 보냈을 것 같은데, 박승양과 이명선, 허선영, 천호득, 이렇게 네 명을 제거해 주시오. 칼을 이용해서 정 회장의 방식대로.”

“그런 걸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도 손해를 봤으니까요.”

입술을 뒤튼 정동방을 향해 스케이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를 퇴사한 직원 열 명이 규정을 어기고 그쪽에 붙었습니다.”

“그럼 이번에 우리가 당한 게 그 배신자들 때문이라는 거요?”

“그렇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럼 그놈들 목을 잘라야지!”

“어쨌든 돈을 가져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다음번을 위해 경고를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정 회장이 일을 제대로 마치면 우리에게 황채산이 세운 것보다 더 확실한 계획이 있으니 큰 수익이 있을 겁니다. 그 전에.”

정동방의 의심 가득한 눈을 본 스케이지가 품에 손을 넣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그 직후에 정동방의 뒤에 있던 부하들이 권총을 꺼내 들었고, 스케이지의 뒤편 남자 둘도 거침없이 권총을 뽑아서 정동방을 겨누었다.

‘이것들이….’

스케이지의 뒤에 있는 두 명이 단순한 조직원이 아니라는 것쯤 권총을 뽑아 드는 실력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백지수표요.”

스케이지는 엄지와 검지만으로 누런 종이봉투를 꺼냈다.

“내가 말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면 그곳의 빈칸에 이번에 손해 본 금액을 적어서 은행에 제출하면 됩니다.”

“오호?”

“조건은 마음에 드십니까?”

“페이창하오(非常好, 아주 좋아)!”

고개를 크게 끄덕인 정동방의 호쾌한 답이 있었다.

**

천중명은 집무실 창으로 의자를 돌린 뒤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께름칙한 느낌이 창밖에서 달려드는 햇살처럼 천중명의 주변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창밖을 보던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옆에 누구 있어?”

- 편하게 말씀하셔, 회장님.

“대출아. 우리 산 넘는 훈련받았을 때 기억하지? 그때 추적조가 다가오면 아무리 소리를 내지 않아도 살기가 느껴졌었거든.”

천중명의 음성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곽대출의 대꾸는 없었다.

“지금이 꼭 그렇다.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고 좀 더 조심해.”

- 인원을 보강해 볼게, 회장님아.

분위기를 알아챈 곽대출의 답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때?”

- 박 회장은 증권사에 있고, 이명선 씨는 집에 계속 있어. 조금 전에 김순례 씨가 퇴근해서 돌아왔다는 보고도 있었어요.

“김순례 씨가?”

천호득이 평창동을 떠나지 않는 한, 김순례가 오전에 퇴근할 일은 없었다.

“전화 끊어봐. 내가 총수님께 전화 드려볼 테니까.”

- 혹시 그쪽에 일이 생기면 혼자 되시겠어? 이쪽 사람을 좀 보내드릴까?

천중명은 소리조차 없이 픽 웃었다.

“총수님을 또 노리는 놈이 있다면 정말 목을 뽑아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목소리가 워낙 살벌해서 그런지 대꾸 대신 곽대출의 거친 숨소리가 넘어왔다. 피가 끓어서 씩씩댈 때 나오는 곽대출 특유의 숨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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