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36화 (136/315)

# 136

136. 현명하고 날카로우십니다 (3)

길었던 화요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명선은 그대로 침대에 들어갔고 그 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엄마….”

늦게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았던 김순례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이명선은 힘겨운 상태였다.

“잠깐만 일어나 봐. 약 먹고 눕자, 응?”

김순례는 우선 상비약을 먹였고, 이어서 흠뻑 젖은 이명선의 옷을 갈아입혔으며, 다음으로 이불까지 바꿔주었다.

“엄마…. 나 오늘 잘했어.”

“그래. 잘해줘서 고마워, 내 딸.”

열이 올라와 눈마저 붉게 물든 딸의 이마에 김순례는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지금껏 힘들게 키워서 엄마가 미안해….”

“아냐, 엄마. 엄마 덕분에 기회 얻었던 거, 실수하지 않고 잘했다고 말하는 거야.”

울음을 삼키느라 김순례는 대꾸를 못 했다. 대신 열에 들뜬 딸의 이마와 머리칼을 연신 쓸었다.

“엄마. 나요. 세금 제하고도 10억 원가량 벌었고요. 수고했다고 따로 1억이나 받았어요. 우리 그 돈으로 빚 갚고, 이런 기회 만들어 준 회장님께 은혜도 갚아요.”

돈도 놀랍고, 이런 말을 해주는 딸이 기특한데, 이상하게 김순례는 자꾸만 가슴이 아팠다.

“우리도 이제 행복하게 살아요, 엄마.”

해열제 덕분인지 딸 이명선은 잠에 빠졌다.

코를 훌쩍인 김순례는 딸의 귓가와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아내다가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이렇게 될 정도로 버텨준 딸이 대견하다.

한없이 고맙고 미안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험한 세상에서 힘겹던 자신과 딸에게 기회를 준 천중명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회장님.’

김순례는 산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늙은 엄마처럼 같은 말을 계속 되뇌었다.

**

수요일 아침이었다.

“갑갑해서 바람이나 쐬고 올까 하는데 당신 시간은 어때?”

아침 식사를 마친 천호득이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이은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디 생각해 둔 곳은 있으세요?”

“지금 출발하면 밤늦게나 올 거야. 뭐하면 근처에서 하루 자고 와도 좋고.”

확실히 천호득답게 질문과 상관없는 엉뚱한 답이 있었다.

“갈 거야, 아니야?”

“가요. 대신 30분만 주세요.”

“그럴 게 뭐 있어? 양치만 하고 바로 출발하면 되지.”

“하루 자고 올지 모른다면서요. 얼른 준비할게요.”

못마땅한 천호득을 달래 거실로 옮겨준 이은명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짧은 애!”

“예, 총수님.”

“차 대기하라고 하고, 하루 자고 올지 모른다고 알려줘.”

“네, 총수님.”

송달순이 얼른 현관에 있는 인터폰을 향해 움직일 때 천호득은 힐끔 장만섭을 보았다.

“저기 짧은 애도 데려가? 아니면 원래대로 우리끼리 다녀?”

뜻밖의 질문을 받은 장만섭이 눈을 껌벅였다.

“다 같이 움직이려면 승용차 자리가 부족하잖아! 그러니 다 같이 가려면 승합차를 준비해야지.”

“총수님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에효!”

한숨을 푹 내쉰 천호득이 시선을 현관으로 돌렸다.

“짧은 애! 승합차를 준비하라고 해!”

“네, 총수님.”

똑 부러지는 송달순과 우직하기만 한 장만섭을 번갈아 본 천호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천중명이 직접 나서서 고객의 클레임을 해결했다는 보고에 지경화장품의 임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모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상하던 참입니다. 다른 곳은 전혀 그런 일이 없는데 유독 강남스퀘어로만 비슷한 클레임이 몰렸었습니다.”

영업이사 오승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의견을 꺼내놓았다.

“이게 어젯밤에 김민희 매니저에게서 회수한 케이스입니다. 안을 닦아낸 것처럼 깨끗합니다. 이런 용기를 들고 와서 영수증 없이 교환해달라고 하면 저라도 거부했을 겁니다.”

“시간도 정해져 있다면서?”

“예. 고객이 가장 집중적으로 몰리는 오후 6시부터 1시간 안에 방문했답니다.”

이중성은 오승현의 말뜻을 대뜸 알아들었다.

“오늘부터 오 이사가 그쪽 매장에 상주하면서 분위기를 살펴. 문제 고객이 나오면 직접 응대하고.”

“예, 대표님.”

오승현의 대답이 갑갑하게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제품에 날개가 달린 듯 팔려나가는 마당에 영업을 총괄하는 오승환이 매장 한 곳에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대표님. 이거 아무래도 어천수 쪽에서 작업 치는 거 같습니다.”

그 뒤로 개발담당이사 김태환이 내놓은 의견에 이중성과 오승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사람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쪽에서 신제품 용기를 제작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분명 우리 제품을 흉내 낸 제품을 내놓을 겁니다.”

“어천수, 이 인간이 아직도 남대문에서 땡처리할 때 쓰던 수법을 사용한다 이거지?”

“어천수 쪽 영업하는 애들과 선이 닿는데 상품 진열을 새로 한답시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오늘부터 뒤를 한번 캐보면 어떻겠습니까?”

들었던 것이 있는지 이중성의 질문을 무는 것처럼 오승현이 연달아 의견을 내놓았다.

화장품 바닥에서는 잔뼈가 굵은 이중성과 이제 막 뼈가 굵어가는 오승현과 김태환이 번갈아 시선을 맞추었다.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제품을 만들어주셨는데 이렇게 무너지면 할 말도 없지. 김 이사는 어떡해서든 걔들 용기와 디자인을 구해봐. 내가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그룹 법무팀에 협조를 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저, 어제 클레임 건 고객을 비서실 직원이 따라갔다는데 혹시 신원을 파악했는지도 한번 여쭤봐 주십시오.”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늘도 다들 고생하자고.”

고개를 끄덕인 이중성이 생산설비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뭘 하느라고 이러지? 설마 어천수와 손을 잡는 건 아니겠지?”

사흘의 여유를 달라고 하고는 나타나지 않는 손도운이 염려돼서였다.

**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회사 생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너만 알고 있어. 그룹발전본부에서 대대적으로 인원 보강한대.’

이렇게 돌기 시작한 말이 삽시간에 퍼져서 그룹발전본부의 임직원들은 이번에도 빗발치는 전화에 시달렸다.

인터넷 은행, 블루크루드, 와이파이 망 개방에 따른 신사업, 듣기만 해도 짜릿한데 그룹 회장이 직접 챙기는 사업이다 보니 야망 있는 직원들의 청탁은 끝이 없었다.

천중명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장기 집권이 당연한 터라 이럴 때 신사업에 발탁되어서 능력껏 눈도장만 받는다면 임원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또 세상에는 천중명 같은 꼴통회장과 유진교 같은 대쪽, 최만호 같은 얼음덩어리들이 있는 법이었다.

“인사 청탁과 관련해서 잡음이 발생하거나 그와 유사한 어떤 조언이라도 건넨 직원이 있다면 잔인할 정도로 가혹하게 징계할 테니 각오해.”

냉정한 면에서는 천중명에게 뒤지지 않는 유진교의 경고가 있었고,

“목요일까지 보안유지가 회장님 직접 지시사항이니 방문은 무조건 금지, 통화는 알아서들 해주리라 믿는다. 지시를 어긴 직원은 다른 부서로 가고 싶은 것으로 간주하겠다.”

최만호의 얼음장 같은 주의사항도 받았다.

천중명 회장이 직접 샌드위치와 커피를 배려해주는 부서에서 나가고 싶은 직원이 있냐고?

친분 있는 직원들의 전화가 올라치면 그룹발전본부 직원들은 대개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곤 했다.

**

오전 8시 30분에 천중명은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중요한 사항들을 챙겼다.

“인터넷 은행은 어떤 경우라도 고객의 과실이 입증되지 않으면 우리 잘못이라는 방식으로 준비해주세요. 고객의 패턴을 파악해서 수상한 송금이나 카드의 해외사용을 즉시 확인하는 조치 등이 필요합니다.”

천중명의 지시를 유진교와 최만호가 급하게 적고 있었다.

“인터넷 은행이 설립된 뒤에는 쇼핑몰을 운영할 생각입니다. 배달이나 제품의 불량이 나오면 우리가 먼저 보상하고 업체에 페널티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검토해 주세요.”

그 외에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한 천중명이 차를 권하면서 잠시 틈이 있었다.

“본부장님. 판매직 직원과 전화 상담 직원들이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을 때, 직원들의 대응방침은 어떻습니까?”

천중명이 건넨 질문에 유진교는 최만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인바운드의 경우에는 3회 경고 후 통화차단, 이후에는 책임자가 받게 되어있습니다.”

“판매직은요?”

“담당 매니저가 감당하고, 그 이상은 그룹 계열사 고객지원실로 이관하도록 규정해놓았습니다.”

천중명의 의도를 알아챈 모양인지 최만호는 곤란한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 고객과의 분쟁이 커지거나 반복되면 고객보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가 먼저 우리 제품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최만호는 천중명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싶은 눈치였다.

“또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들과 맞서다가 자칫 그룹의 이미지가 거칠고 불친절하다고 인식되는 것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손실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부당한 클레임을 일선의 직원이 모두 담당하는 구조는 불리합니다. 이 점에 관해 대비책을 만들어보세요.”

“예, 회장님.”

지시를 메모하는 최만호를 향해 천중명은 생각하던 바를 꺼내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 다르다는 거,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접대비, 부당한 교환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선량한 고객들에게 돌려주는 개선책이 필요한 시기라고 여겨주세요.”

“예, 회장님.”

30분에 걸친 의논을 끝내고 두 사람이 나간 다음이었다.

책상으로 움직인 천중명은 어제 강남스퀘어에서 고객을 따라갔던 비서의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세 번이나 간곡하게 요청했으나 마지막까지 엉뚱한 번호를 불러주고는 택시를 타는 바람에 더는 방법이 없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뭔가 냄새가 나지?

천중명은 인터폰을 눌렀다.

이런 거 정말 잘 알 만한 사람이, 화장품 업계에서 잔뼈가 제대로 굵은 사람이 있었다.

“지경화장품 이중성 대표 연결해줘.”

[네, 회장님.]

천중명은 오늘 올라온 결재서류를 펼치며 이중성과의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

출근했던 남부증권 회장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정말 출근 이렇게 널널하게 할 거야?”

회장실의 앞에 앉아있던 박승양이 눈을 부라리며 종이컵을 우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회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 6조 원이 넘는 내 돈이 이 증권사에 묶여 있는데 어쩐 일이냐고? 내 돈을 누가 찾아가기라도 하면 그거 책임질 수 있어?”

“얼른 들어가십시오.”

또다시 박승양을 안다시피 떠받든 남부증권 회장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회장님. 증권예탁원에 묶여 있는 돈을 우리가 무슨 수로 찾겠습니까? 내일 오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비서실 직원이 차를 놓아주는 앞에서 남부증권 회장은 좋은 말로 박승양을 달랬다.

홰액!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역시나 목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박승양의 매서운 눈빛이었다.

“돈은 이상한 놈이라서 욕심을 내는 사람에게 온갖 추악한 방법을 알려줘요. 설마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겠어? 죽여! 죽이고 가져가! 남편이나 마누라, 자식을 어찌하겠어? 해!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약 처먹여서 죽여! 그래서 나는 돈만 믿어!”

말을 확 뱉어냈던 박승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천 회장님을 믿는다는 말을 빼놨네!”

“그러시죠. 그럼요.”

박승양이 건넨 말을 남부증권 회장이 얼른 받아들었다.

**

이중성과의 전화는 바로 연결되었다.

천중명은 먼저 비서실 직원의 보고서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중성에게서 어제와 같은 일들이 어천수가 즐겨 쓰는 수법이란 설명과 어천수 코스메틱에서 ‘미라클’과 흡사한 용기와 디자인을 준비한다는 보고도 들었다.

- 김태환 이사가 공장 쪽을 알아보고 있어서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그쪽 용기와 디자인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만약 어천수가 그런 짓을 했다면 그룹 법무팀에서 판매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도록 회장님께 부탁드립니다.

“그건 내가 알아보겠습니다.”

상황을 대강이나마 짐작한 천중명이 전화를 마치려는 참이었다.

- 회장님. 손도운 개발자가 내일까지 사흘간 일이 있다며 출근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양반의 성품이나 성격상 다른 일은 없겠지만, 워낙 큰돈이 넘어가서 염려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중성의 걱정스러운 말이 건너왔다.

“내일까지라니까 우선 지켜보죠.”

- 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천수 코스메틱이라?

천중명은 의자를 돌려 집무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달리기도 바쁜데 얻어맞지 못해서 안달하는 인간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고구마는 찜기에 넣고 쪄 줘야 하는 거야, 아니면 불에 넣고 구워야 하는 거야?

따귀를 예약한 윤세계에 천상기와 오지은, 조승필까지, 천중명은 고개를 저은 뒤에 책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꽤 바쁘겠는데? 우선 순서대로 고구마부터.”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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