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35화 (135/315)

# 135

135. 현명하고 날카로우십니다 (2)

쇼핑객들이 몰리는 시간이었다.

강남스퀘어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장품 코너에 사람들이 몰려 웅성대고 있었다.

무릎을 꿇으라는 중년 여자 고객과 그 앞에서 고개를 떨군 매니저, 그 중간에서 심판처럼 불편한 얼굴로 서 있는 강남스퀘어 고객상담실 과장까지.

심심해서 둘러볼까 하고 들른 이들에게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고객상담실 과장 노진래와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시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침묵이 김민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거 보라니까! 나를 무시하고 있잖아!”

중년 여자의 고함이 김민희의 어깨를 찍어 누르는 순간이었다.

세 사람의 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 수트에 구두를 신은 남자였다.

“누구십니까?”

“지경그룹 천중명입니다.”

노진래의 질문에 천중명이 내놓은 답을 들으며 김민희는 생각이 딱 멈추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회장님? 우리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

김민희는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당신 뭐야?”

“우리 매장을 살피는 길에 마침 고객님의 항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보상을 말씀해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저 여자의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사과는 이미 두 번 했습니다.”

천중명의 단호한 대꾸가 나온 직후에 노진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분이 정말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일까?’

TV나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제대로 봐둘 걸 싶었다.

하긴, 지경화장품 직원이라면 노진래를 이렇게 무시할 리는 없는 일이고, 반대로 눈앞의 남자가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라면 수행비서 하나 없이 돌아다닐 건 또 아니었다.

“치료를 원하시면 지경병원으로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보상은 우리 지경그룹 고객지원팀을 보내드릴 테니 충분히 논의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짧게 눌렀다.

“나야. 강남스퀘어 1층 매장으로 와줘.”

통화는 정말 간단하게 끝났다.

“김민희 매니저. 왜 고객의 반품 요구를 거부했습니까?”

천중명이 김민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용물을 이미 다 사용하시고 케이스만 가져오셔서 거부했습니다.”

“그 케이스 이리 가져와 봐요.”

천중명과 김민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라서 반품 받았던 케이스를 들고 왔다.

“뭐야? 이게? 망신 주는 것도 아니고! 관둬요!”

중년 여자가 좌우를 둘러보며 물러서려 할 때였다.

비서실 직원 두 명이 급하게 천중명의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분을 모셔. 우리 제품을 사용하고 부작용으로 고생하시니까 지경병원 예약해서 치료받으실 수 있게 배려하고, 고객지원팀에 연락해서 원하시는 보상을 받으시도록 해.”

“예, 회장님.”

비서실 직원의 답이 떨어진 직후에 중년 여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봐봐! 맞잖아!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 지난번에 공사장에서 떨어졌던 사람!”

누군가가 억울했다는 투로 쏟아낸 말에 중년 여자가 뒷걸음질로 물러났고, 그걸 또 비서 두 명이 따라갔다.

소란이 마무리되면서 구경하던 이들 대부분이 자리를 떴고, 몇몇이 천중명을 힐끔대거나 휴대 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찍고 있는 게 전부였다.

천중명은 먼저 노진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 매장 때문에 소란이 있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노진래가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처럼 방문하셨는데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면 우선 제가 모시고 안내해 드리고, 쇼핑을 원하시면 귀빈실로 따로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잠시 들르기만 한 거니까 그럴 정도는 아니고, 명함 있으면 하나만 부탁합니다.”

아차하는 얼굴로 명함을 꺼낸 노진래가 절하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노진래 과장님.”

“예, 회장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천중명은 상체를 세운 노진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런 쇼핑센터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직원들이 억울한 상황에서 사과를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실제로 그러기는 어려울 텐데도 노진래는 천중명에게 예의를 다하겠다는 것처럼 충직한 태도로 답을 내놓았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번 봅시다.”

“네, 회장님. 저는 그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살펴 돌아가십시오.”

노진래가 몸을 돌린 다음이었다.

“대표님?”

다가온 허선영을 발견한 김민희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손님들이 몰려드는 시간이었고, 미라클을 찾거나 샘플을 써보고 싶다는 고객들이 줄을 잇고 있어서 길게 시간을 빼기는 어려웠다.

천중명은 진열된 제품을 살피는 사람처럼 서서 김민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지난번에도 그랬다던데? 혹시 미라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회장님. 미라클은 다른 매장 직원들이 몰래 구해달라고 할 정도로 반응도 좋고, 부작용으로 고생했다는 의견도 없었습니다.”

천중명의 표정을 본 김민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변명을 드리자는 게 아니라 유독 우리 매장만 비슷한 클레임이 집중되어서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패턴도 늘 같았습니다. 빈 케이스를 들고 와서 영수증도 없이 반품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저런 식으로 거칠게 항의하곤 했었습니다.”

김민희의 똑 부러지는 설명을 들으며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희 매니저님.”

“네, 회장님.”

“고객을 함부로 대하는 건 안 되겠지만, 부당한 요구를 강요하는 고객을 상대로 절대로 무릎을 꿇는 따위의 일은 하지 마세요. 최선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인격을 무시당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네, 회장님.”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천중명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회장님.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왈칵 올라온 감정을 누르며 김민희가 곱다랗게 고개를 숙였다.

저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겠나.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지경화장품 매장을 빠져나왔다.

“나 아까 너무 조마조마했어요.”

강남스퀘어를 나선 허선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건넨 말이었다.

“중명 씨가 화내면 어떡하나? 여자 손님이 중명 씨에게 못된 소리를 하면 어떡하지? 그런 거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허선영의 모습이 또 보기 좋은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원.

“저녁은 뭐 먹을까?”

“중명 씨가 선택해요. 매일 늦어서 점심, 저녁을 도시락으로 해결하잖아요.”

“초밥 먹으러 갈까? 괜찮아?”

“그래요.”

천중명은 차를 부른 뒤에 함께 온 비서에게 초밥을 먹기 적당한 식당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도산공원 앞에 적당한 식당이 있습니다. 가시는 동안, 제가 예약하겠습니다. 대표님. 혹시 차를 가져오셨으면 키를 주십시오.”

“고마워요.”

천중명은 차 키를 건네준 허선영과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디자인 일은 어때?”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가끔 반짝이는 다른 회사 제품을 보면 샘도 나고요. 그런 날은 잠을 못 잘 정도예요.”

허선영의 말을 듣는 동안 승용차가 도산 공원의 앞쪽 건물에 멈췄다.

갤러리의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가게였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 지배인이 왼편에 있는 방으로 천중명과 허선영을 안내했다.

“초밥을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요. 그리고 밖에 우리 직원들도 저녁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네, 회장님.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천중명이 차를 마신 뒤였다.

주방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회 몇 가지를 가지고 들어와 각각의 재료 이름과 조리 방법을 설명했고, 이어서 돌로 된 소금을 칼로 깎아 뿌려준 뒤에 나갔다.

“먹는 게 좀 복잡하지?”

“중명 씨는 어떤 게 편해요?”

“난 역시 도시락 스타일인가 봐. 쭉 펼쳐놓고 이거저거 마음 놓고 먹는 거.”

둘이서 그렇게 조금 늦은 저녁을 먹었다.

“중명 씨. 혹시 일 생각해요?”

두 번째 초밥이 들어온 뒤에 허선영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미안해.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직원들을 지켜줄 방법이나 인격적인 모독을 피할 방법이 없는지를 잠깐 생각했었는데 그게 머리를 안 떠나.”

“미안하기는요? 나도 계속 김민희 매니저가 생각나는데요. 일 생각할 때 중명 씨 눈이 반짝이는 거 알아요?”

“내가?”

대답 대신 허선영이 예쁘게 웃었다.

**

황성규는 그가 사용하는 오피스텔에서 직원들과 둘러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 이런 식으로 일하면 우리의 목표는 관두고 회장님께 누가 되는 조직이 된다.”

비록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내리깔지는 않았지만, 황성규의 나직한 말에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사채업자와 여직원, 그 둘을 이용해 회장님이 홍콩 물고기를 상대해서 결과를 내는 동안, 우리가 준비한 정보가 뭐가 있어? 다른 사람들의 뒤나 캐는 수준은 이미 한국에 차고 넘친다.”

“팀장님. 그러지 마시고 해결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경그룹으로 들어가서 인원과 시스템을 보강하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조직을 좀 더 키울 생각이다.”

황성규가 의견을 내놓은 다음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불법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지경그룹의 품으로 들어갔다가 그런 사실이 발각되면 회장님께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팀장님. 제 생각에는 회장님께서 그런 제안을 하셨다고 하니까 다른 복안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라리 회장님께 현실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 명의 팀원이 연달아 의견을 내놓았다.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경그룹에 들어가는 데 반대하는 사람 있어?”

“용인 사건 때 이미 고개 숙인 데다, 이번에 홍콩물고기 잡아내는 것까지 봤는데 무슨 다른 생각이 있겠습니까? 팀장님 말씀대로 뭔가 방법을 찾지 않으면 거대 자본은 고사하고, 뒷조사나 하는 조직 되게 생겼는데요.”

팀원들을 대표해서 컴퓨터 전문가 문상훈이 답을 내놓았다.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바람에 뒷북을 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조직이 보강되어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 뒤에 경제전문가 제임스 김도 나직하게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내가 회장님을 뵙고 의논한 뒤에 결정하자. 우선 함께했으면 하는 명단 선별해 봐. 지경그룹에 못 들어가더라도 보강은 해야 하니까.”

황성규의 말을 끝으로 짧은 회의가 끝났다.

**

조승필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천중명에게 홀랑 뺏긴 느낌이었다.

목요일이면 큰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지경그룹 주가가 폭락하면서 천중명이 곤란한 상황에 놓일 거라고 기대했는데 모든 기대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아.”

그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 참 더럽게 됐다.

덤핑이 의심된다는 발표를 하면 찌그러들 줄 알았더니 새로 승진한 지경그룹의 임원 놈들이 광견병 걸린 개들처럼 사방에 짖어대며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고 있었다.

새로 증설한 메모리 생산공장을 이용해 천중명을 흔들 계획은 또 어떻게 된 게 그 공장을 천중명이 움켜쥐고 미국의 멱살을 흔들어 대는 꼴이 되었다.

사촌 형인 조철행 장관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중국에 반도체 물량 전체가 넘어간다면 우리는 그걸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비선이 전한 마지막 경고가 아팠다.

“고약한 놈.”

조승필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지경전자의 기용도 부사장을 떠올리고는 오른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어차피 가만있으면 이대로 찌그러들 일만 남았으니 천상기가 알려준 내용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우는 일밖에 없었다.

“흠.”

조승필은 천상기의 말을 믿지 않는다.

세상에 성형수술로 그렇게 완벽하게 얼굴을 바꾸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물론 느닷없이 바뀐 성격, 눈빛, 강단, 그리고 천상기의 말대로라면 심지어 싸움 실력과 생활태도까지, 사람이 완벽하게 변한 꼴인 건 맞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그 모든 자료를 모두 모아서 천호득을 흔드는 일이었다.

절대 만만치 않은 천호득이 넘어올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

즐겁게 저녁을 먹은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양평으로 향했다.

밤 10시쯤이었다.

정원에 내려앉은 습기가 조명을 받은 잔디의 색을 더욱 진하게 만들었고, 옷과 손을 적신 풀냄새가 숨결과 눈빛에 배어드는 시간이었다.

“목요일까지 바쁘다고 했잖아요. 일찍 들어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일은 오늘 끝났어. 그리고 선영 씨와 여기에 오는 게 내 유일한 휴식이잖아.”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는 허선영을 보며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윤세계가 전화했었어?”

질문을 던진 직후에 바로 알았다.

허선영의 눈에 ‘어떻게 알았지?’하는 감정이 글자로 쓴 것처럼 떠올라서였다.

천중명은 먼저 코리아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 그냥 넘어갔었는데 차라리 말해줄 걸 그랬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 그날 전화 받으면서 자신 있었거든요.”

허선영이 왼손을 앞으로 들어서 반지를 보여주었다.

“중명 씨는 싫으면 싫다고 하지, 다른 생각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해줬어요.”

“뭐라고?”

“당신 재수 없다고 했어요.”

유쾌하게 웃는 천중명을 바라보던 허선영의 웃음이 그친 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따귀 때리는 거 아니죠?”

“왜? 나는 그런 약속은 꼭 지키는데?”

허선영의 눈에 이번에는 ‘말도 안 돼.’하는 감정이 분명하게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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