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 현명하고 날카로우십니다 (1)
천중명이 남부증권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를 10분쯤 남긴 시간이었다.
곧장 올라갔다가 공연히 남부증권 직원들이나 박승양, 혹은 이명선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싶어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꺼냈다.
곽대출의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누른 다음이었다.
- 예! 회장님!
“남부증권 앞이다.”
- 계단으로 3층에 올라오시면 바로 앞에 문 닫은 카페가 있습니다. 그리 오셔요.
지금은 혼자 있는지 곽대출의 대꾸가 편안했다.
천중명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수행 비서가 빠르게 다가왔다.
“개인적인 일이니까 적당한 곳에서 20분에서 30분 정도 대기했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빌딩의 입구를 향해 홀가분하게 걸었다.
1층과 2층은 은행이 사용하고, 3층은 카페와 보증기관, 그리고 4층부터 남부증권이 사용하는 총 7층짜리 빌딩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천중명은 계단의 입구에서 휴대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남자를 흘깃 보았다.
체형부터가 남달랐고, 서 있는 자세나 천중명을 빠르게 훑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짧게 눈이 마주친 직후에 그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어서 천중명은 빠르게 계단을 통해 3층으로 달렸다.
“회장님.”
낮에는 커피를 팔고, 밤에는 맥주나 양주를 파는 가게였던 것처럼 유리를 시커멓게 만든 카페의 문을 열고 곽대출이 천중명을 불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불법 영업하는 카페 주인이 단골손님을 맞이하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천중명은 잠자코 안으로 들어갔다.
영업을 안 한 지 좀 됐었던 모양이었다.
두 개의 낡은 테이블에 역시나 낡아빠진 소파와 의자가 있었고, 바깥 창으로 싸구려 블라인드가 걸려 있었다.
“커피 드려?”
“됐어. 1층에 수상한 남자가 있던데?”
“점퍼에 정장 바지, 휴대 전화기 들여다보는 남자 말씀이시지?”
카운터 옆으로 걸어간 곽대출이 급하게 가져다 놓은 게 분명한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두 병 들고 왔다.
“좀 전에 이명선 씨가 먼저 퇴근해서 그쪽에 세 명이 붙었고, 박승양 회장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감시하기 위해 한 명, 남부증권 입구 복도 끝에 한 명, 건물 바깥에 한 명 붙어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천중명은 낡은 소파 옆에 놓인 철제 의자에 앉았다.
“유비캅이라고 이번에 새로 생긴 경호회사인데 저 양반들이 그래도 비무장지대를 누비던 역전의 용사 아니겠습니까?”
“그래? 눈매나 자세는 괜찮아 보이던데 너도 알지만 싸움 잘하는 인간들은 따로 있다.”
곽대출이 물병을 천중명 앞에 놓아준 뒤에 담배를 꺼내 권했다.
둘이서 모처럼 불을 붙인 다음이었다.
“수색대와 민정경찰로 조직이 개편된 뒤부터 밀려난 꼴이라 그렇지, 실전 경험은 도깨비 이상입니다.”
담배 연기를 풀풀 뿜어내는 곽대출의 설명이 있었다.
“너는 또 저 양반들은 어떻게 알았어?”
“현관에서 본 양반이 서상현이라고 유비캅 넘버 투, 이명선 씨를 따라붙은 세 명 중 한 명이 김태진이라고 유비캅 대표인데 그 양반이 우리 바닥에서 워낙 유명합니다.”
“우리는 제대 후에 연락 못 하게 돼 있잖아?”
천중명이 의아한 눈으로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이럴 때 보면 우리 회장님, 참 순둥순둥 합니다.”
곽대출이 뻔뻔한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뭘 그런 생각을 하셔. 내가 하나둘 연결했는데 또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전달되는 특수부대 출신들끼리의 연결점이 있거든. 유비캅에 사람도 소개했고.”
“너 예전에 그 해결사인가 뭔가 하는 쪽과 아직 연락 주고받는 거 아니지?”
“에이, 회장님도. 그 사장 새끼는 내가 장만섭 데리고 나오면서 영업 접었습니다.”
천중명은 모처럼 여유 있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딱딱한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커피 있냐?”
“거 봐! 달라고 할 거면서!”
곽대출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카운터 쪽으로 움직였다.
숨 막혔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이런 임무를 맡게 된 곽대출의 얼굴에 진하게 나타난 과거의 눈빛과 표정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뜨거운 물에 풀어진 달달한 커피향을 맡으며 천중명은 담배 하나를 더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여기 있어, 회장님.”
“미안하다.”
종이컵을 놓고 의자에 앉으려던 곽대출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힘든 일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지랄하시네, 우리 회장님.”
“미친 도깨비 새끼.”
둘이서 모처럼 거친 말을 주고받자 느닷없이 웃음이 터졌다.
상황이 벌어지면 곽대출이 지닌 스마트폰으로 무전이 떨어지게 돼 있었고, 세 명이 각자 맡은 지역을 감시하는 터라 당장 특별한 위험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명선과 박승양이 이동할 때는 승용차와 오토바이로 따라붙어서 놓칠 일이 없다는 설명도 들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였고, 또 모처럼 누구 눈치 볼 것 없는 장소여서 20분쯤 유쾌하게 떠들었다. 심지어 삼합회 정동방의 협박까지 전하는데도 그랬다.
천중명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20분쯤 되었다.
“간다.”
“퇴근은 아닐 테고 어디로 가십니까?”
천중명이 일어서자 곽대출의 말투가 달라져 있었다.
“강남스퀘어에 있는 지경화장품 매장의 매니저가 고객에게 시달렸나 보더라고. 원래는 지난 토요일에 들르려고 했는데 그날 총수님과 말이 길어져서 오늘 들러볼 참이다.”
“에이, 그런 건 내가 모셔야 하는 건데.”
“더 중요한 일을 하잖아.”
곽대출을 향해 웃어준 천중명은 곧장 카페를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입구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방향을 보았을 때, 저 안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아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편이라고 짐작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주는 감정이 아까와는 달랐다.
천중명이 짧게 고개를 숙인 직후에 멈칫했던 그가 비슷한 느낌으로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저 정도면 믿을 만하겠다.
천중명은 건물을 나서 기다리던 승용차에 올랐다.
“강남스퀘어로 가줘.”
목적지를 말한 뒤에 뒷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기댈 때 남부증권이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해라, 대출아.
이럴 때 진짜 미안하다.
대신 우리 가기로 했던 길을 묵묵하게 가 보자.
도깨비답게.
빌딩이 승용차의 뒤로 사라진 뒤에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박승양은 남부증권의 경리과 부장과 직원 한 명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파생상품양도세를 이렇게나 뗀다는 게 말이 돼? 주식은 안 그러잖아!”
“주식은 지분율이 1퍼센트거나, 총액이 25억 이상일 때만 주식 양도세를 부과하지만, 파생상품은 다릅니다.”
“거래세 떼고, 너희가 수수료 떼먹고, 내가 몇 푼이나 먹었다고 양도세를 또 떼? 떼기를!”
차마 6조를 넘게 잡수셨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경리과 부장과 직원이 애꿎게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가 책임지고 줄여봐! 탈세하라는 게 아니라 절세 방안을 만들어 보라고!”
“20퍼센트가 최선입니다.”
세금으로 1조2천억 원을 넘게 내라고?
하마터면 박승양은 부장의 목을 정말로 물어뜯을 뻔했다.
“이봐! 이거 내가 출금한 뒤에 세금 안 내고 버티면 어떻게 돼? 막말로 돈 다 썼다고 배째라 하면 그만 아냐?”
“법이 바뀌어서 자금을 추적할 테고, 은닉했다고 판단되면 추징금에 추가징수, 그리고 심할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것들이 진짜? 왜 나한테만 이래! 왜!”
“죄송합니다, 회장님.”
사실 경리과 부장과 직원이 죄송할 일이 있다면 하필 오늘 박승양에게 걸린 것 말고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이 양도세 문제가 불거지면 지경그룹에도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후우. 그렇다면 우리 천 회장에게 누가 된다는 거 아냐?”
“그렇습니다.”
“에이! 나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까 일단 20퍼센트에 맞추는데 최대한! 한 푼이라도 줄일 수 있는 구석이 있는지 악착같이 좀 따져봐!”
더는 직원들을 쪼아대기 미안했던 박승양이 짜증을 털어내며 화장실로 향했다.
세상에 날강도들도 아니고, 정신줄을 놓칠 정도로 마음고생 해가며 번 돈을 이렇게나 뚝 잘라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원!
“확실히 돈은 밑바닥에서 조용하게 굴리는 게 최고인 건데.”
투덜거리며 소변을 해결한 박승양은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5년은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번에 했던 기도가 떠올랐다.
이번 거래만 성공하게 해주면 1퍼센트를 드리겠다며 약속했던 그 기도 말이다.
“하아.”
박승양은 마치 그곳에 신이 있다는 것처럼 감탄하는 표정으로 거울 위를 바라보았다.
“현명하고 날카로우십니다. 내 마음이 변할까 봐 이렇게 세금으로 알아서 떼어 가시는군요. 20퍼센트는 좀 심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시선을 내린 박승양은 한결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
강남스퀘어에 도착한 천중명이 현관으로 들어설 때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3번 출입구 안쪽 로비예요. 얼마나 걸려요?]
고개를 돌려 입구 위쪽을 바라본 천중명의 시선에 2번 게이트라는 글자가 보였다.
에스컬레이터가 내려오는 정면의 3번 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직후에 정장 바지와 재킷에 백을 든 허선영이 보였다.
저렇게 예뻤었나?
허선영을 보는 순간 그냥 떠오른 생각이었다.
강남스퀘어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처럼 허선영의 모든 모습이 빛나고 있었다.
허선영이 휴대 전화기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멍하니 더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중명이 다가가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들었던 허선영이 환하게 웃었다. 예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건 또 입이 좀 간질거렸다.
“힘들었지? 오늘 하루.”
“오늘은 중명 씨 덕분에 일찍 나왔잖아요. 그리고 나 일하는 거 정말 행복해요.”
고개를 끄덕여준 천중명은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일단 매장에 들렀다가 저녁 먹자.”
퇴근 시간 직후인데도 강남스퀘어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수입 브랜드의 화장품 매장을 지난 다음이었다.
굳이 허선영이 알려주지 않아도 천중명은 지경화장품 매장을 바로 찾았다.
“너희가 뭐가 그렇게 잘 나서 나를 무시해-애!”
악에 받친 중년 여자의 고함이 1층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어서였다.
“여기 책임자 나오라고 해!”
“제가 매장 책임자입니다.”
“너 이름이 뭐야!”
천중명이 지켜보는 저쪽 너머에서 웨이브가 굵은 머릿결을 한 중년 여자가 매니저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손으로 툭 쳤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언짢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매니저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다음이었다.
“저분이 여기 매니저 김민희 씨예요.”
놀라고 안쓰러워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 허선영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천중명의 귀에 들어왔다.
“당황하지 마. 이럴 때 높은 직급이나 지휘자가 당황하면 직원들은 길을 잃어. 김민희 매니저라고 그랬지? 저렇게 꿋꿋하게 버티는 이유에는 직원들을 보호하려는 것도 있을 거야.”
솔직히 화장품 매장에 관해 잘 모른다.
이렇게 악을 쓰는 것이 화장품 매장의 특성일 수 있다는 생각에 주변 매장과 지경화장품 직원들의 모습을 먼저 살폈다.
매장 직원들 역시 놀라고 당황하는 눈빛으로 김민희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여기 강남스퀘어 담당자 부르라고!”
시선이 흩어지려하자 중년 여자가 또 고함을 질렀고,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린 천중명의 눈에 휴대 전화기를 들어 앞의 장면을 찍어대는 여자도 보였다.
저거야 뭐 요즘 세상에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이 정도 항의가 당연한 거야?”
“아니에요. 직원들이 어지간히 무시했다거나 정말 함부로 응대하지 않는 한, 저럴 일은 거의 없어요.”
“해보자는 거야!”
여자가 또다시 악을 쓸 때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당신은 뭐야?”
“강남스퀘어 고객상담실 노진래 과장입니다.”
“당신 잘 왔어! 내가 어제 여기에서 화장품을 사 갔거든. 딱 한 번 발랐어! 그런데 여기 보여? 여기? 두드러기 올라온 거? 그런데도 아르바이트생을 시켜서 환불이 안 된다고 하더니!”
여자가 독한 눈으로 구석 안쪽에 고개를 떨군 스무 살 초반의 여자를 매섭게 노려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치료비도 못 주겠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냐고! 말이!”
“우선 고정하시고, 저와 함께 가셔서 잠시 차라도 드시지요. 그동안, 제가 매장과 의논해서 조치하겠습니다.”
“차를 마시러 가는 건 좋은데 나는 사과부터 받아야겠어!”
여자의 항의에 노진래가 김민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과하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언짢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고객님.”
“사과하는 말투가 그게 뭐야! 비꼬는 거야!”
“일 처리가 미숙했습니다. 그 점을 사과드립니다.”
또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김민희를 보며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르바이트?
천중명도 이전의 삶에서 숱하게 해봤다.
항의?
말도 안 되는 항의 역시 무지하게 받아봤다.
제품에 대한 하자나 서비스에 관한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저런 수준의 항의는 못마땅했던 자신의 일상에 대한 분풀이거나 혹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치료비는 어떻게 할 거야?”
“진료비 영수증을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보라니까! 지금 나를 사기꾼으로 몰고 있잖아? 내가 치료도 안 받고 진료비를 내놓으라고 했다는 거야!”
당최 말이 안 통하는 수준이었다.
“당신, 진짜 사과할 마음이 있으면 무릎 꿇어! 얼른!”
노진래 과장이 김민희에게 눈짓하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입술 끝만 움직여 웃었다.
무릎을 꿇으라고?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아내이며, 어떤 아이들의 엄마일 저 여자가 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제품을 판매하며 산다는 죄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건가?
“내가 거지야! 이따위 샘플 주면 좋아할 줄 알았어!”
중년 여자가 앞쪽 진열대에 놓인 작은 종이백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퍽! 틱틱틱.
종이백이 바닥에 떨어진 직후에 화장품 샘플 몇 개가 굴러 나왔다.
손도운의 열정과 지경화장품 직원들의 노력, 허선영의 바람이 담긴 미라클의 샘플이었다.
김민희가 떨구고 있는 시선과 그녀의 얼굴에 담긴 참담한 심정을 지켜보던 천중명은 발 앞으로 굴러온 샘플을 집어 들었다.
“중명 씨?”
허선영의 놀란 음성을 뒤로 한 채 천중명은 김민희를 향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