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 도깨비가 회장으로 있는 그룹엔 덤비지 마라 (3)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비록 물러난 명예회장이라 하더라도 천호득은 앉아서 지경을 들여다보는 수준이었다.
유진교와의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김준후가 전화를 걸어서는 화요일 거래 상황을 그나마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총수님! 그래도 제가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금융전문가 아닙니까?
“그렇지.”
원체 자유분방한 김준후의 넉살에 천호득이 추임새처럼 대꾸를 던졌다.
- 그런 제가 감탄할 정도로 멋진 계획이었습니다.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밀어붙인 강단은 또 어떻고요. 총수님. 축하드립니다.
“뭘?”
- 이렇게 훌륭한 후계자를 육성하셨으니 지경그룹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시겠습니다.
“흐헤헤헤헤.”
나직한 천호득의 웃음이 평창동 저택의 정원에 흘렀다.
- 한국에서는 속칭 5:5 계좌라고 부릅니다. 수익을 반반씩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박승양 회장의 수익금 절반이 신임 회장의 비자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구만.”
- 얼마 전에 한국의 그룹 회장 한 명이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비자금은커녕 다 털리는 바람에 망신당한 일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신임 회장은 명분까지 쌓았으니 하여간 대단한 분입니다.
김준후는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 그럼 총수님.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건강 살피십시오.
“자네도 잘 지내.”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셋을 뽑은 뒤에 평창동 정원 위의 하늘 위로 고개를 들었다.
이 계절에 보기 힘든 하얀 구름이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에이! 저것들 때문에 마음 놓고 구름도 못 보겠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천호득은 입맛을 다시며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저택 벽에 붙어 장승같이 서 있는 장만섭도 버거운데 그 옆에 서 있는 반 토막만 한 여자 직원은 어째서 또 저 모양인지, 저것들이 저러고 있으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차가 마시고 싶어.”
“준비하겠습니다.”
깔끔한 외모만큼이나 말투까지 똑 부러지는 송달순이 고개를 숙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스물다섯 살인 아이 이름이 ‘송달순’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저 아이가 무술에 능하다는데 또 놀랐으며, 마지막으로 장만섭의 반 토막 정도로 체구가 작은 것에 놀랐다.
서울의 중위권 대학 법학과를 나왔다는 송달순이 천호득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수행비서가 꿈이었다는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이 마음을 흔들었고, 결정적으로 송달순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만섭을 보고는 그만 대뜸 채용을 결정했다.
그랬는데! 그렇게 배려해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작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장만섭은 송달순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모자란 놈! 좋으면 좋다고 해야지, 오히려 외면해?’
천호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장만섭은 또 그런다고 눈썹 하나 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때 송달순이 쟁반에 차를 가져왔다.
기가 막히다.
저렇게 가져온 차를 장만섭 앞으로 먼저 가져간다. 그러고는 맛을 본 그가 통과시켜야 천호득이 마실 수 있다.
뭔가 대우를 받는 것 같기는 한데 또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게 아니겠나 싶었다.
짜증이 울컥 올라오려는 순간에 다행히 송달순이 휠체어 옆의 테이블에 차를 놓아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신 천호득은 문득 장만섭의 이력서조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각.
찻잔을 내려놓은 천호득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우직한 사나이의 표상 같은 장만섭에게 시선을 주었다.
“모자란 놈! 너는 집이 어디야?”
“강원도 고성입니다.”
“흥! 촌놈이 출세했네?”
“그렇습니다.”
우렁우렁 울리는 장만섭의 답을 듣는 순간, 천호득은 맥이 쭉 빠졌다. 저놈은 진심으로 이렇게 천호득을 지키는 것이 출세한 일이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고성은 뭐가 유명해?”
“막국수, 물회, 생선구이 정도입니다.”
천호득이 익히 들어본 것들이었다.
“머리 깨졌던 놈이 소개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총수님.”
“가족은?”
질문을 던졌던 천호득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장만섭이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계십니다.”
“부모나 형제는?”
“없습니다.”
이어진 천호득의 질문에 답은 바로바로 나왔다.
“할머니는 뭘 하시는데?”
“민박집 청소와 식당일을 번갈아 하십니다.”
지금 장만섭은 천호득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얼굴에 감정이란 걸 묻히고 있었다.
월급이 적지 않을 텐데 하나밖에 없는 할머니가 민박집 청소와 식당일을 한다고 답했다. 저 잔머리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인간, 장만섭이 말이다.
“너도 사연이 많은 놈이구나.”
대꾸는 없었다.
천호득은 고개를 가져가 하얀 구름을 보며 차를 마셨고, 장만섭은 계속 꿋꿋한 자세로 서 있었으며, 송달순은 그 옆에서 힐끔 장만섭을 올려다보았다.
**
유진교와 최만호를 맞은 천중명은 보고서를 앞에 두고 블루크루드와 와이파이 개방, 그리고 지경전자의 상장에 관해 의논했다.
“유럽은 2025년부터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생산을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우리 시장은 문제가 좀 더 복잡합니다.”
보고서에서 고개를 든 천중명을 향해 유진교가 보고를 이었다.
“국내시장을 해외 자동차에 모조리 빼앗길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전기차 시장과 청정연료 사용을 강제하기 어려운 모양새입니다.”
“어렵군요.”
“회장님. 블루크루드와 배터리 기술을 이용한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로 유럽을 공략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방법은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공하는 블루크루드와 배터리를 이용한 자동차를 생산할 기업을 찾는 것과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흠.”
천중명은 유진교가 펼쳐준 계획서를 보며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대략 3조 원에서 5조 원이면 차종이나 디자인이 부족해 적자 상태인 자동차 생산 회사를 인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본기에 우리 기술을 얹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유럽은 전기자동차만 생산하게 한다면서요?”
천중명의 질문에 유진교는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2025년까지 블루크루드를 자체 생산하는 자동차를 만들 수만 있다면 지경의 100년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블루크루드의 원재료가 물이잖습니까?”
“그렇습니다. 물을 부으면 달리는 자동차입니다. 물론 불순물을 제거한 물이어야 합니다.”
천중명은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이게 그냥 들으면 미친 소리 같은데 이론을 알고 있으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서 부으면 달리는 자동차라?
“태양열로 충전되는 배터리를 장착하면 리터당 주행거리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차만 사면 되는 거군요. 물 붓고, 태양열로 충전하니까요.”
“2025년까지의 큰 그림은 그렇습니다. 이 개발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결국, 전기자동차 역시 반짝했다가 사라지게 될 겁니다. 다만, 개발비로 대략 6조 원이 소요됩니다.”
천중명은 방향만 제시하면 된다는 말뜻을 새삼 떠올렸다.
기가 막히든, 어처구니가 없든, 천중명이 제시한 방향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결과가 그려지고 있었다.
“일단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하기로 하지요. 다음으로 와이파이 망 개방은 어떻습니까?”
“기존의 와이파이 망을 조건 없이 전면 개방하고, 다음 주부터 LTE급 와이파이 설비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부터 설치할 계획입니다.”
답은 시원시원하게 나왔다.
“이번에 선물 거래로 얻은 이익을 먼저 사용하고, 부족한 예산은 지경전자의 상장을 통해 조달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회장님.”
유진교와의 논의가 끝난 다음이었다.
“실장님. 계열사 전체로 보면 접대비 비율이 꽤 높던데 그걸 줄였으면 합니다.”
천중명은 최만호에게 그동안 결재를 하며 느낀 문제점을 전했다.
“지경건설 부회장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다만, 회장님. 급격하게 줄이기는 어렵다는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싶습니다.”
“그건 실장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접대비를 줄일 기본 방안은 다음 주까지 올려주세요.”
“예, 회장님.”
중요한 대화가 대강 끝났다.
“방은경에게서 회수한 주식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자사주로 편입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만호가 짧은 보고를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돌아가신 큰형님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을 막은 것 같습니다. 힘드시겠지만, 목요일 발표와 지경전자의 상장에 최선을 다해주세요.”
천중명의 말을 끝으로 유진교와 최만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잠시 고민했다.
믿고 맡겨?
아니면 가서 눈으로 확인해?
들뜬 곽대출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간다! 가서 도대체 어떤 준비를 했길래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지 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옆에 누가 있는지 곽대출의 음성이 단단하게 들렸다.
“내가 그리 갈 건데 필요한 거?”
-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끄러워. 어디로 가면 돼?”
- 남부증권 건물 3층입니다. 공간이 빈 게 있어서 그곳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출발할 거야.”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이번엔 문자를 입력했다.
[지난번에 못 간 강남스퀘어에 가볼 생각이거든. 시간 어때?]
허선영에게 문자를 넣은 직후였다.
[6시까지 갈게요.]
답은 바로 들어왔다.
**
소파의 상석에 앉은 어천수의 왼쪽 앞으로 연구원이 앉았다.
“어떻게 됐어?”
“이걸 먼저 보십시오.”
스마트폰을 꺼낸 연구원이 몸을 비틀고는 어천수가 보기 좋게 들었다.
[제품 좀 유명해지니까 고객 한두 명은 아쉽지 않다는 거야! 뭐야!]
스마트 폰에서 중년 여성의 악쓰는 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오? 좋은데?”
[왜 지경화장품만 이래! 별 효과도 없는 제품을 가지고 소문 좀 났다고 이러는 거야! 이런 제품을 다른 회사는 개발하지 않을 것 같냐고!]
“하! 이럴 때 어천수 코스메틱을 가보라고 해야지!”
“너무 노골적이면 곤란할까 봐 그랬습니다. 이중성 사장하고, 그쪽 영업부 오승현 이사가 워낙 구렁이여서요.”
“하기는 그렇지. 어? 그런데 혹시 그 인간들이 눈치채고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연구원의 답에 어천수가 작은 눈을 더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머라클의 출시 뒤에 스카우트하는 조건으로 지경화장품의 이범준 노조위원장을 삶아 놨습니다. 이중성 사장과 오 이사, 혹시 몰라 김태환 이사의 움직임을 보고해 주는 조건입니다.”
코보다 높게 올라온 볼을 가진 어천수가 연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만간 미라클의 정확한 성분과 배합비율, 과정까지 넘어옵니다, 그때부터 우리 머라클이 시장을 지배할 겁니다.”
“크하하하하!”
만족한 웃음이 어천수의 집무실을 가득 메운 다음이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이범준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두 명이 가서 제대로 한 번 터트릴 겁니다.“
고구마를 세워서 앞뒤로 흔드는 것처럼 어천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 봐. 가서 오늘을 준비해!”
“예, 회장님.”
연구원이 나가자 어천수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는 삐뚜름하게 앉았다.
“내일이 월급날만 아니면 얼마나 좋아?”
사타구니가 가려웠는지 그곳을 문지른 어천수가 심드렁한 얼굴로 협탁에 있던 잡지를 집었다.
**
오후 6시가 다가올수록 강남스퀘어 지경화장품의 매니저 김민희는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고, 지금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갈수록 미라클은 인기는 점점 더해서 지금은 선금과 전화번호를 남긴 고객만 매일 20여 명이 넘는 수준이었다.
물량이 달려서 제품을 판매하지 못하는 건, 판매직원이 감당해야 할 가장 큰 고통이자, 또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인데도 그녀는 늦은 오후부터 점심 먹은 것이 얹힌 사람처럼 자꾸만 가슴을 두드렸다.
매장이 가장 붐비기 시작하는 오후 6시경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진상고객들 때문이었다.
명동과 강남의 매장을 맡는다는 건 그만큼 능력과 경력을 인정받는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인정받은 김민희도 요 며칠은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고통스러운 지경이었다.
“매니저님. 저녁이요!”
5시 경이면 김밥이나 떡볶이, 아니면 순대 따위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다.
“괜찮아. 먼저 먹어.”
김민희의 표정을 모를 리 없는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이 안타까운 얼굴로 휴게실로 움직였다.
‘내가 매니저야.’
김민희는 진상고객을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기지 않는다. 그들이 당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느니 당하고 만다.
아무튼, 독하디 독한 눈빛, 말도 안 되는 트집,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도 막무가내로 고함과 삿대질을 날리는 고객들을 상대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대표님. 좀 도와주세요!’
6시가 다가오자 이상하게 애가 타기 시작한 김민희는 애꿎은 허선영을 떠올리며 매장의 진열대를 고운 천으로 닦았다.
할 수만 있다면 김민희는 매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떼쓰는 아이처럼 발을 뻗어가며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