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 도깨비가 회장으로 있는 그룹엔 덤비지 마라 (2)
선물거래가 동시호가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남자가 딜링룸 안으로 들어왔다.
판도로 사과를 깎았던 남자와 그의 수하 네 명이었다.
“내가 정동방 회장께 직접 전화해서 설명할 테니까 당신들은 나가 있어!”
“아직도 세게 나오시네?”
판도로 사과를 깎아 먹었던 남자가 웃음기를 싹 뺀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곧장 황채산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우리 회장님께서 직접 보자 하시니까 갑시다.”
“그걸 어떻게 믿어?”
엉뚱한 곳에 끌려갈 것을 두려워한 황채산의 대꾸가 나온 다음이었다.
스윽.
남자는 판도를 재킷 품에서 꺼냈다.
“정 그렇다면 그냥 목만 잘라서 가는 수가 있어. 어차피 회장님께서는 우리 황 사장 얼굴을 보겠다고 하셨지, 꼭 살려서 데려오란 말씀은 안 하셨거든.”
이미 네 명의 남자가 빙 둘러싸고 있어서 황채산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였다. 판도를 꺼낸 남자가 딜링룸의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여기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혀를 이렇게 만들어준다!”
잔인한 눈으로 경고를 던진 그가 천천히 황채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이래?”
황채산이 놀란 소리를 낸 직후였다.
쉑!
남자가 빠르게 판도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고,
“아아악!”
왼쪽 귀를 감싸 쥔 황채산의 비명이 딜링룸을 거칠게 메웠다.
“아악! 악!”
“어떻게 하겠어? 얌전히 따라갈래? 아니면 정말 목을 잘라 갈까?”
축 깔린 남자의 말은 결코 허투루 던지는 게 아니었다.
“갑니다! 끄윽! 간다고.”
겁에 질린 황채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판도를 든 남자가 고개로 문을 가리켰다.
덥석!
왼쪽 귀에서 흘린 피로 고급 셔츠를 흠뻑 적신 황채산을 남자 두 명이 양쪽에서 붙들어서는 거칠게 끌고 나갔다.
침묵이 무겁게 딜링룸을 덮칠 때, 판도를 든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황채산의 귀를 집어 들고 직원들을 향해 책상에 엉덩이를 기댔다.
“황채산은 거래가 끝난 뒤에 급하게 나갔어.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고. 아무래도 거래에 실패하자 잠적한 거 같지?”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그는 왼손에 든 황채산의 귀를 판도로 쭉쭉 갈랐다.
“공연히 입을 나불거리면 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을 본다. 알았어?”
손에 든 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남자가 눈을 하얗게 위로 치켜뜨며 직원들을 노려보았다.
“알았냐고 묻잖아?”
“예.”
공포에 질린 얼굴로 가장 앞에 있는 남자가 답을 했다.
거기까지였다.
판도를 든 남자를 시작으로 아직 딜링룸에 남았던 두 명의 남자가 문을 나섰다.
털썩!
지친 얼굴의 직원들이 의자에 몸을 던지다시피 앉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이제 황채산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손가락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5조였는데….”
누군가의 허탈한 음성이 딜링룸을 맴돌았다.
막판 뒤집기의 귀재이자 코스피 선물지수의 황제, 홍콩물고기라는 닉네임을 지닌 황채산의 최후를 지켜본 직원의 혼잣말이었다.
**
4조 원이라는 상상도 안 되는 돈을 홀랑 날리는 줄 알았다가 마지막에 뒤집기에 성공하며 화요일 장이 끝났다.
그것도 프로그램 매수가 들어오면서 선물지수가 하늘로 치솟으며 말이다.
숨 막히는 동시호가를 거친 화요일의 코스피 선물지수는 332.75로 마감되었다.
꿀꺽!
이명선의 옆에서 박승양은 침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이명선 과장….”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이명선을 부르고는 넋이 나간 얼굴로 모니터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정산. 그러니까 우리가….”
“수익입니다, 회장님.”
이미 모니터의 손익란의 숫자가 붉은색이어서 그건 박승양도 잘 알고 있었을 일이었다.
“우리가, 우리가 얼마 먹은 거지?”
질문을 받은 이명선은 모니터의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숫자 하나 잘못 보면 조 단위가 바뀐다.
“6조3천3백2십9억입니다.”
“흐엑!”
박승양의 희한한 비명이 좁은 딜링룸을 가득 메웠다.
“내가, 내가 반을 먹어. 그러면 그게….”
“3조1천6백6십4억5천만입니다, 회장님. 여기에서 수수료 제할 테니 실제 입금액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반응이 없어서 이명선이 고개를 돌린 다음이었다.
“흐으! 흐으으!”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린 박승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허벅지에 고개를 묻었다.
저러는 박승양의 심정을 다는 몰라도 대강은 이명선도 이해할 만했다.
“회장님.”
이명선은 위로하는 마음으로 박승양을 불렀다.
주문을 넣었던 그녀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힘겨운 시간이었는데 지옥에 떨어졌다가 천국행 급행열차에 올라탄 모양새인 박승양이야 오죽하겠나.
거래가 끝나며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명선은 어깨며 허리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또 저런 박승양을 홀로 둔 채 그녀가 먼저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울음이 줄어든 박승양을 이명선이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책상에 있던 이명선의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휴대 전화기를 들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회장님. 이명선입니다.”
-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이렇게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제고 꼭 갚겠습니다.”
울먹이는 이명선을 그새 몸을 세운 박승양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 나중에 밥 한번 먹지요.
“네, 회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명선이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순간이었다.
박승양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급하게 가리켰다.
“회장님. 박승양 회장님이 통화를 원하십니다.”
- 그래요.
이명선이 공손하게 건넨 전화기를 박승양이 덥석 가져갔다.
“천 회장님! 내가! 나는! 원래부터 우리 천 회장님 믿었습니다! 내가 말했었지요? 진짜! 진짜! 진짜로! 우리 천 회장님 믿는다는 말?”
- 마음고생 많으셨을 텐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고생은요? 나는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쭈욱 우리 천 회장의 판단을 지켜봤어요!”
눈물이 번져서 번질거리는 입으로 박승양은 뻔뻔한 말을 잘도 쏟아냈다.
- 회장님. 어차피 금요일에 정산이니까 이명선 씨는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쉬게 했으면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뭔 그런 일에 가능이란 말을 하십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걸 못하면 내가 박승양이 아니라 개승냥이입니다.”
다부진 대꾸를 건넸던 박승양이,
“하여간 천 회장. 옥체를 보존해야 합니다. 옥체를. 내가 심마니들을 쫙 풀어서라도 산삼을 다 쓸어갈 테니 큰일을 하실 우리 천 회장은 그저 건강, 또 건강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곰살맞은 말들을 연신 쏟아냈다.
- 조만간 뵙지요.
“네, 천 회장. 내가 우리 천 회장 연락만 목 빼고 기다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휴대 전화기를 이명선에게 건네준 박승양이 눈물을 쓱 닫고는 독한 눈으로 일어섰다.
“이명선 과장. 피곤하겠지만, 잠시만 기다려요.”
짧은 말을 건넨 그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에 붙어서 안을 살피고 있었던지 남부증권 회장이 급하게 몸을 세웠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박승양은 먼저 남부증권 회장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명선 과장 말이지. 이번 주에 쉬어도 되겠지?”
“예?”
“내일부터 이번 주말까지 푹 쉬게 하고 다음 주에 출근하게 하자고. 왜? 안 돼? 안 되겠어?”
“당연히 됩니다! 그럼요! 쉬어야죠! 저런 거래를 하고 났는데 휴식이 필요하지요!”
박승양의 눈초리를 정면으로 받은 남부증권 회장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독한 눈빛으로 남부증권 회장을 노려보던 박승양이 이명선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명선 과장.”
언제 바꿨는지 그는 더할 수 없이 자상한 눈빛과 음성이었다.
“네, 회장님.”
“들었지? 이번 주는 쉬고 월요일에 출근해. 그리고 내가 우리 이명선 과장의 급여 계좌에 1억을 넣어둘 테니까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해. 알았지?”
“회장님?”
놀라고 당황한 이명선을 향해 박승양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고생했다는 이유로 돈을 준다는 생각을 못 해봤는데 우리 이명선 과장은 이 박승양의 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고생했어. 애썼어. 혹시 살다가 깡패니 권력이니 여기 남부증권이니 힘든 일이 있으면 한 번은 찾아와.”
박승양은 세상 다정한 모습이었다.
**
장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됐어! 됐다고!”
목숨 건 노병처럼 3시 10분까지 기다렸던 기관의 10년 차 펀드매니저 주광술은 허공을 향해 오른손 주먹을 몇 번이나 올려쳤다.
딜링룸의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주는 앞에서 주광술은 가슴이 부풀 정도로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천천히 내쉬었다.
“정산은?”
“1천7백4십2억 수익입니다. 우리 회사 파생상품 딜링룸 개설 이후 하루 최고 수치입니다.”
보고를 들은 주광술은 울컥 올라온 눈물을 감추기 위해 딜링룸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직장 생활이다.
그 세월 동안의 애환이 왜 없었겠나.
그러나 그가 딜링룸을 나선 뒤에도 앞으로 몇 년, 길게는 십몇 년 동안 주광술이 오늘 만든 실적이 전설처럼 떠돌게 분명하니 이것으로 됐다.
지경그룹 만만세다!
그는 앞으로 영원히 이런 영광을 안겨준 지경그룹의 제품만 쓸 거다!
믿고 기다린 사람을 지켜주는 기업!
내막도 모르면서 그저 발표가 고마웠던 그는 계속해서 숨을 거듭 내쉬었다.
**
파생상품 거래를 잘 모르는 유진교가 봐도 천중명의 화요일 계획은 완벽한 성공으로 보였다.
2조5천억 원을 예치했던 남부증권의 계좌에 9천억, 증권사에 연결했던 주식회사 지경의 계좌에 다시 5천5백억 원가량의 수익을 확보했으니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하시려는 거지? 내가 이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던 유진교가 고개를 저은 다음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의 휴대 전화기가 울어댔다.
“여보세요?”
- 본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목요일이라고 했던 작업이 오늘 끝난 겁니까?
“오늘 끝나다니?”
- 모르셨습니까?
유진교는 진심으로 김준후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가 파생상품에 관해 잘 모르거든.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게.”
유진교의 솔직한 부탁에 기가 막힌 듯한 김준후의 감탄사가 먼저 넘어왔다.
- 홍콩물고기의 계좌가 털렸습니다. 증거금 부족으로 그의 계좌에 입금했던 예치금 5조가 단숨에 날아갔다고요. 이제 어느 증권사도 만기일에 주식을 내다 팔지 못합니다. 이해되세요?
김준후는 전에 없이 흥분한 음성이었다.
“그렇군. 내가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나서 다시 전화하지.”
- 꼭 좀 전화 주십시오. 프로그램 매수가 일어나게 만든 타이밍이 믿기지 않을 정도거든요.
“이따 전화하지.”
통화를 마친 유진교는 멍하니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저 친구가 혀를 내두를 만큼 엄청난 계획이었나?
그렇다면 천중명은 이미 유진교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
나직하게 숨을 내쉰 유진교는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회장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
이명선과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시간을 확인했다.
3시 40분에 유진교와 최만호를 불렀던 터라 소파로 가서 잠시라도 쉴까 하던 참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때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며 발신자 제한 표시를 띄워 놓았다.
지금 천중명이 사용하는 휴대 전화기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에 사용한 적이 없는지 엉뚱한 사람을 찾는 전화도 없었다.
잠시 액정을 보았던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천중명 회장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듯한 음성에 천중명은 짧게 답했다.
- 전화로 인사드려서 미안합니다. 나, 홍콩의 정동방이라고 합니다.
천중명은 잠자코 있었다.
- 황채산이라고 아실 테니 다른 말 않겠습니다. 다만, 내 책임인 그가 한국 돈으로 2조 원이나 되는 우리 조직의 돈을 날리는 바람에 홍콩 책임자인 내가 무척 곤란하게 됐습니다.
천중명의 대꾸가 없는데도 정동방은 말을 계속 이었다.
- 거래를 하다가 손해난 것을 무턱대고 돌려달라면 그건 또 예의가 아니니 5천억 원은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내 얼굴을 봐서 1조5천억 원만 돌려주시오.
그의 마지막 말투와 억양이 꽤 묘해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 우리가 어느 조직인지에 관해 아실 것 같은데?
“싫다면 어떻게 되지?”
천중명의 대꾸가 뜻밖이었는지 잠시 침묵했던 상대가 헛바람 소리 가득한 웃음을 꺼내놓았다.
- 배포가 대단하시군. 하긴, 그러니까 홍콩물고기를 이 꼴로 만드셨겠지. 하지만 나는 달라. 좋은 답이 없으면 당신 주변 사람의 머리만 보게 될 거야.
정동방이 건네는 섬뜩한 경고가 그의 바람 소리 섞인 음성과 제법 잘 어울렸다.
“한국에 도깨비가 있어.”
- 도깨비?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그 도깨비를 말하나?
“쓸데없는 짓을 하면 눈알을 파내는 도깨비가 있으니까 조심하고. 다음부터 이런 무례한 전화 안 하는 게 좋아. 여차하면 당신 눈알도 파낼지 모르거든.”
- 이봐?
“내가 바빠서 헛소리 들어줄 시간이 없어.”
천중명은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직후에 노크 소리와 함께 유진교와 최만호가 들어섰다.
“앉으세요. 문자 하나만 보내면 됩니다.”
두 사람에게 소파를 권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에 문자를 입력했다.
[삼합회가 움직일 모양이다. 조심해라.]
문자를 보낸 천중명이 소파로 움직여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나 정말 흥분돼. 회장님아.]
염려스러운 곽대출의 답문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