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 난 기본만 지킨다 (2)
점심을 먹은 뒤였다.
화요일 마감을 두 시간가량 남겨놓은 시간인데도 홍콩물고기 쪽에서 특별한 매도 주문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천중명이 제시한 목표 327.50을 향해 이명선은 차분하게 매수를 진행할 수 있어서 오후 1시 20분의 코스피 선물지수는 320.05에 올라서 있었다.
멍청아!
이맘쯤이면 주둥이가 제법 아플 텐데?
이미 너무 늦은 거 아냐?
천중명은 모니터를 보며 픽 웃었다.
가끔 나오는 100개 단위의 매도가 있기는 했다.
당연하게 홍콩물고기 쪽의 주문으로 보이기는 했는데 상승세에 지장을 줄 수준은 아니었다.
천중명은 고개를 짧게 저으며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황채산은 욕심에 사로잡혀 기본을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코스피 선물시장의 주인이랍시고 자만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지수가 320.05까지 올라오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어쩌면 오늘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천중명은 지독했었던 과거의 훈련을 떠올렸다.
“방심하면 죽어! 적의 움직임을 알아챘다고 먼저 움직여도 죽고! 까불고 나서도 죽는다! 어떻게 해야 사냐고? 어디서 어떻게 날아들든 막아낼 수 있게 준비해! 그리고 배운 대로! 적이 가장 아파할 부분을 찔러!”
쇳소리 가득 묻은 교관의 고함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한 번 찔리면 아파서 계속 낑낑댈 곳! 그 한 방이 적을 죽이고 너를 살린다!”
당시를 떠올리며 천중명은 모니터에 집중했다.
홍콩물고기 황채산은 중국과 일본의 검은돈까지 당겨서는 어제 315.50에서 1조3천억 원을 매도했다.
오늘 아차해서 손을 털려고 해도 이미 지수가 320.05인데 문제가 있었다.
숫자 따지면 복잡하다.
그냥 오늘 황채산이 오늘 털고 나가든 이대로 있든 현재 스코어, 4천3백억쯤의 손실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말 무서운 상황이 아직 남았다.
지금 320.05에서 4천3백억의 손실인 거지, 천중명의 지시대로 327.50에 도달하면 황채산의 1조3천억 원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이명선 씨. 2시부터 3시 사이에 매도 물량이 쏟아질 수 있으니까 긴장 유지하고. 매도 물량이 나오더라도 그에 구애받지 말고 우리 목표 지수까지 밀고 올라갑시다.]
이명선에게 문자를 보낸 직후였다.
지이이잉.
[네, 회장님.]
이번엔 그나마 여유가 보이는 이명선의 답문이 들어왔다.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이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휴대 전화기에 또다시 문자가 들어왔다.
[회장님. 천상기 회장이 욕구가 쌓여서 그걸 풀겠다는 이유로 오지은을 부르고 싶답니다.]
용인에 있는 윤만석이 보낸 문자가 액정에 떠올랐다.
“하여간 한결같은 맛은 있어. 두 사람 다.”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오지은이 도착하면 들여보내 주고, 대신 약을 할 것에 대비해서 다음번 정신과 진료 때 약물검사를 하겠다는 경고만 부탁합니다.]
[네, 회장님.]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두 번이나 수정해서 올라온 사업계획서에 시선을 주었다.
**
황채산은 얼굴빛이 누렇게 떠서 히죽거리던 오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 미친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선물지수를 이렇게 올리는 법이 어디 있어! 목요일에 고꾸라질 걸 아는 놈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이럴 줄 몰랐다.
한국의 코스피 지수 선물을 초짜인 천중명과 촌년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줄 몰랐다.
지금 지수 320.05도 기가 막힌 데 만약 7포인트 이상 선물지수가 더 올라가면 황채산은 어제 투입한 1조3천억을 탈탈 털리고 판도로 사과를 깎는 놈을 만나야 한다.
“이 병신들아! 너희는 저걸 보고만 있었어!”
목요일을 위한 중요한 미팅에 참석하고 돌아온 황채산이 딜링룸을 향해 악을 바락바락 써댔다.
“이젠 정말 전쟁이다! 나중에 살려달라고 매달려도 소용없어! 이거 네가 시작한 거야!”
딜링룸에 있는 직원들이 눈치를 살필 정도로 거친 소리를 지껄인 그가 휴대 전화기를 들고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예. 홍콩입니다.”
그는 능숙한 영어로 통화를 시작했다.
“코스피 선물지수 보셨죠? 이대로 있다가는 내일이 오기 전에 우리 투자금이 사라지게 생겼습니다. 일단 미국에서 시작해 주세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황채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야간이긴 하지만 사정이 급하니 부탁하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2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딜링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가진 거 다 부어서라도 지수를 317까지 끌어내려! 그거 못하면 우리 다 죽어!”
그의 살벌한 눈매와 고함에 직원들이 각자 앞에 놓인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후.”
직원들의 뒤통수를 향해 숨을 내쉰 황채산은 잠시 뒤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철부지 회장에게 엮여 들어가는 느낌이 들지?
코스피 선물시장의 황제인 홍콩물고기가?
황채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은 선물지수를 끌어내려서 1조3천억 원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것이 급했다.
‘이 망나니 재벌 새끼는 어떻게 직진만 있어?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일직선으로 방향을 잡기 쉽지 않을 텐데?’
황채산은 처음으로 입술 바로 아래에 왼손을 괴고는 천중명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
윤만석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상기가 전화를 걸었고, 거짓말처럼 5분 만에 오지은이 도착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알아챌 정도로 빤한 수작이었는데 윤만석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그는 오지은을 1층 거실 안쪽의 천상기 방으로 들여보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약을 하시면 다음 검진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 불편한 일이 없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문밖에서 경고를 보낸 뒤에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힌 직후였다.
“오빠!”
진한 색 미니스커트에 착 달라붙는 셔츠 차림의 오지은이 앞섶을 열고 있던 베이지색 외투를 벗었다.
“여기요.”
그리고는 등으로 손을 돌려 미니스커트와 셔츠 안에 두었던 서류를 꺼냈다.
휠체어에 앉은 천상기가 비닐 랩에 쌓여 있던 서류를 보는 동안 오지은은 그의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사그락. 사각.
20장쯤 되는 서류를 다 본 천상기가 지루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는 오지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의미였다.
“교수가 말했다는 성창욱의 성격이나 강단, 그리고 특수부대의 경력이 완전히 지금 그 개망나니와 똑같잖아? 그렇지?”
“그러게요, 나도 보고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둘이서 볼을 마주 대다시피 하고서 주고받은 속삭임이었다.
“여기 봐. 뭔가를 고민할 때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는 성창욱의 버릇 말이야. 이게 지금 천중명에게서 나오면 얘기 끝나는 거야. 내가 조승필 회장에게 문자해서 이거 알려주고 곽대출하고 장만섭이 UDU 출신인지도 알아보라고 할게.”
“네, 오빠.”
귀가 간지러웠는지 목을 한쪽으로 움츠렸던 오지은이 웃음을 참으며 대꾸를 내놓았다.
“너는 앞으로 이틀에 한 번씩 내게 와. 그리고 조승필 회장이 기자회견을 하든, 아니면 기사에 터트리든 간에 그 옆에서 증언하고.”
“그런데 이런 주장을 사람들이 믿어줄까요?”
“믿게 만들어야지.”
“네에.”
오지은이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정 안되면 전에 총수님에게 썼던 약 있잖아. 그걸 구해줄 테니까 네가 망나니를 만나.”
대꾸 대신 오지은은 놀란 눈을 하고는 천상기를 보았다.
“그거 오빠가 했던 거예요?”
“나도 들은 거지!”
천상기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무튼, 총수님 때 봤지? 그거 증거가 안 남아. 그냥 심장마비로 끽! 살아나도 지금 총수님처럼 평생 휠체어 타고 손 떠는 거야. 그럼 그다음에 지경을 누가 맡을까?”
오지은의 눈 아래에서 떠오른 욕망이 두려움을 슬쩍 밀어내고 있었다.
“당장 할 건 아니니까 망나니에게 약을 먹일 방법을 생각해 봐. 내가 총수 되면 너 안 잊는다.”
“오빠! 오빠는 말 바꾸면 안 돼요.”
천상기가 심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오지은이 침대에서 일어나 휠체어로 다가왔고, 그 바람에 그녀의 배와 가슴이 천상기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냥 가면 서운하잖아요. 우리 배신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뭔가 나눠야죠.”
“배신하지 않는다는 의미?”
고개를 든 천상기가 떠올린 야비한 웃음을 오지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받았다.
“오빠. 나 문자 한 통만 하고요.”
백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낸 오지은은 녹화 애플리케이션을 찾아 누른 뒤에 백과 함께 천상기의 등 뒤에 있는 책상에 세웠다.
“오빠. 이리 오세요.”
무릎이 불편한 천상기의 상체를 오지은이 안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정면, 휠체어에 앉은 천상기의 뒤쪽에 놓인 휴대 전화기는 오지은만 볼 수 있었다.
**
오후 2시 20분에 코스피 선물지수 매도란에 천 개 단위의 주문이 떠올랐다.
‘이제 알아챈 모양인데 좀 늦지 않았어?’
천중명이 눈빛을 빛낸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휴대 전화기가 울며 액정에 유진교의 이름이 떠올랐다.
“네, 본부장님.”
- 회장님. 미국에서 우리 지경전자의 백색가전 상품 수출에 덤핑이 의심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쪽은 새벽일 텐데요?”
- 비슷한 수출을 하는 다른 전자회사들의 제품은 놔두고 굳이 우리 지경전자를 지정해서 발표한 점, 그리고 미국 현지시각으로 야간에 기습적으로 발표한 상황들을 비교해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발표입니다.
그 짧은 보고를 받는 동안 매도에 주문량은 아예 선물지수를 고꾸라트리겠다는 양, 늘어나고 있었다.
“본부장님의 판단은요?”
- 우선 지경전자의 기용도 부사장과 의논하겠습니다.
기용도는 엄밀히 말해 부사장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인 부사장보였다. 그러나 호칭으로 부를 때는 부사장이라고 하지, 콕 짚어서 부사장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럴 것 없이 내가 직접 통화해보죠. 3시 40분에 최만호 실장과 제 방으로 와주세요.”
- 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이번에 승진한 지경전자 기용도 부사장을 연결해 줘.”
[네, 회장님.]
지시를 끝내는 것과 동시에 천중명은 곧바로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문자를 입력했다.
[지경전자의 덤핑 발표가 있었는데 흔들리지 말고 지금처럼 꾸준하게 매수하세요.]
이명선에게 문자를 보낸 직후였다.
[회장님. 내선 1번에 기용도 부사장을 연결했습니다.]
인터폰이 울려서 천중명은 구내전화기를 바로 들었다.
“여보세요?”
- 기용도 부사장입니다, 회장님.
이번에 부사장보로 승진한 기용도는 천중명과의 통화에 대한 긴장을 털어내지 못한 음성이었다.
“덤핑 발표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 네, 회장님.
“우리가 덤핑에 해당하는 수출을 한 적이 있습니까?”
- 베트남 공장에서 제조해서 미국에 수출한 제품에 대한 덤핑 발표인데 그런 판정을 받을 만한 수출 건이나 품목은 없었습니다.
긴장한 상태에서도 기용도는 자신 있게 답을 건네 왔다.
“이에 대한 지경전자의 대책은요?”
- 내일 진위를 파악하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적극적으로 반론을 펴겠습니다. 그리고 허락해 주시면 미국에 수출하기로 한 메모리를 중국으로 돌리겠다는 제스처를 보일 생각입니다.
“계약을 그렇게 바꿔도 됩니까?”
- 공장 증설 당시 미국의 스마트 폰 제조업체와 구두로 협의했던 내용이라 법적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협상하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에는 한 분기 물량을 중국에 집중해도 된다는 허락이 필요합니다.
천중명은 의자를 돌려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미국을 상대로 협박하겠다는 전자회사 부사장이라니?
늘 강단 있게 나서는 천중명을 천호득이 이런 심정으로 지켜보았나 싶었다.
“부사장은 알지 못하는 중대 발표가 있습니다. 이번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내면 좋은 결과를 얻겠지만, 실패했을 경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사장에게 불리할 수 있습니다.”
- 제 직책을 걸겠습니다, 회장님.
“미국 시장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우리가 받아야 하는 충격은요? 예를 들어 반도체 시장을 중국에 집중했다가 그들이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 회장님.
“말씀하세요.”
- 미국은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어서 우리가 생산하는 반도체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장 이만한 효과를 낼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천중명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양반도 생각보다 꽤 직선인데요?
꼴통 재벌에 어울리는 꼴통 부사장의 등장인가 봅니다?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마음을 정했다.
시간을 더 끌기도 어려웠고, 새로 승진한 부사장보가 직책을 걸고 내민 제안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용도 부사장을 믿고 맡기겠습니다. 본부장에게 지금 통화 내용을 알려주고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회장님.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고 올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5분이어서 오늘의 장 마감까지 55분 남았다.
이제야 바늘에 걸린 것을 깨달은 홍콩물고기가 미늘을 빼내려고 무섭게 매도를 쏟아내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천중명은 선물지수로 시선을 돌렸다. 320.05였던 지수가 그사이 319.90까지 밀려 있었다.
“3시 10분까지만 견뎌, 이명선 씨. 그러면 오늘 홍콩물고기를 물 밖으로 끌어낸다.”
모니터를 향해 혼잣말을 뱉어낸 천중명은 다시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 네, 회장님. 지금 막 지경전자 기용도 부사장에게서 통화 내용과 대책을 들었습니다.
통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바로 유진교의 보고가 있었다.
“본부장님. 상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지경전자 상장 진행하세요.”
- 지금 말입니까?
“네. 목요일까지 갈 것 없이 오늘 끝낼 생각입니다. 통화 마치는 대로 바로 상장 주관사에 통지해 주세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나직한 유진교의 숨소리가 먼저 들렸고,
- 예, 회장님. 바로 주관사에 연락하겠습니다. 대략 30분에서 40분 뒤에 발표가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시 10분쯤 발표가 나왔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 적당하게 우리 사업계획을 흘려주면 더 좋습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그의 단단한 답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