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 난 기본만 지킨다 (1)
용인으로 옮겨 간 천상기는 실제로 정신감정을 받았고, 그 결과 망상장애와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미친 새끼들!”
니트 셔츠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천상기가 윤만석이 건네준 의견서를 보고 뱉어낸 반응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자기중심적? 나만큼 지경그룹과 주변을 염려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천상기는 느닷없이 악을 버럭버럭 질렀다.
물론 그런다고 윤만석이 기죽을 사람은 아니어서, 그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천상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필요하다면 약물치료도 병행하겠답니다.”
“미쳤네. 내가 아니라 이 의사 놈하고, 윤 실장 당신! 그리고….”
천중명의 이름을 떠벌이려던 천상기가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윤만석의 한쪽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어서였다.
“치료는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하, 씨발!”
천상기가 뱉어낸 욕을 완전히 무시한 채 윤만석이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휠체어를 움직인 천상기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용인의 주택 바깥으로 어둠이 깔려서 불빛에 홀린 날벌레들이 창으로 달려드는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 네, 오빠. 말씀하세요.
“알아봤어?”
- 예. 성창욱이란 사람의 고등학교 때 사진이랑 학적부, 그리고 대학교 때 기록을 챙겼어요. 신기한 게요. 성창욱이 군대를 6년이나 있다가 나왔거든요.
“뭐? 6년? 대학생이란 놈이 뭔 군대를 그렇게 오래 있어?”
천상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튼 직후였다.
- 지도 교수가 그랬는데요. 해군특작부대 나왔대요. 그쪽에서는 훈련병을 도깨비라고 부른다네요. 인터넷에 UDU라고 찾아보니까 그런 말이 실제로 있어요.
“도깨비? 유치하기는?”
비웃음을 피워내던 천상기의 얼굴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너 지금 해군특작부대라고 했어? 그거 무슨 특수부대 이런 거야?”
- 꽤 유명한가 봐요. 북파공작원 뭐 그런 말도 있고요. 심지어 비밀을 유지하려고….
오지은의 말이 잠시 끊긴 뒤에 자료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 여기 있다! 무조건 예비역 병장이라고 기재한대요. 특수부대 중에서도 훈련 독하기로 유명하다네요.
천상기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래! 큰형이나 내 말에도 벌벌 떨던 새끼가 갑자기 깡패들을 열댓 명이나 상대한 게 이상하기는 하지?
“너 말야. 혹시 성창욱이란 놈 의료기록이 있는지 알아 봐. 천중명이도. 이것들이 혹시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을 바꿨을 수도 있잖아?”
- 그것 말고도 이상한 게 또 있어요, 오빠.
“뭔데? 그게?”
- 천중명이요. 성창욱의 죽은 엄마를 변호사까지 써서 시체를 넘겨받았고, 심지어 분당에 있는 납골묘에 넣었어요. 이상하죠?
천상기는 휴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또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이상해.
확실히 이상해.
“그러니까 그게 언젠데? 시체를 넘겨받았다는 게?”
- 날짜도 얼마 안 됐어요. 이 자료 보내드릴까요?
“아냐. 그러지 마. 여기 윤 실장이란 놈이 알면 괜히 일 망가진다. 저 새끼들 다 한통속이거든.”
오지은을 말린 천상기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하자. 내가 욕구가 넘쳐서 너를 부른다고 할 테니까 문자 하면 바로 달려와. 서류를 가방 깊숙이 숨기든가 몸속에 넣어서 안 들키게 하고.”
- 네, 오빠. 나 그런 거 잘해요.
“그래. 알았다. 시간 나는 대로 혹시 더 알아볼 건 없는지 살펴보고.”
통화를 마친 천상기는 책상에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래!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뀐 데는 반드시 뭔가 있는 거지! 이걸 먼저 팠어야 하는데 엉뚱한 잡년한테 정신이 팔려서 기본을 놓친 거라니까!
이 새끼가 만약 진짜 천중명이 아니면?”
천상기가 상체를 불쑥 세웠다.
“뭐야? 큰형 죽고, 막내 뒈졌으니까 진짜는 나밖에 없는 거잖아?”
그런 뒤에 그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만있어 봐?”
그는 또 급하게 휴대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번호를 눌렀다.
- 네, 여보세요?
“조 회장님. 나 천상기입니다.”
-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내가 말이죠. 알아볼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우리 조 회장님이 가장 확실할 것 같아서요.”
- 어떤 내용 때문에 그러시는지 우선 들어보겠습니다.
천상기는 지금까지 이상했던 점, 그리고 조금 전에 오지은이 알려주었던 정보들을 쭉 조승필에게 전했다.
- 흠.
“그러니까 병원 기록을 우선 찾아보시자고요. 아무렴 그런 일에 의료보험을 쓰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거기에 한알저축은행 직원들 접촉하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고요. 또 시체 확보할 때 도움 줬던 변호사도 알아보세요.”
- 알겠습니다. 마침 홍콩에서 부탁한 것이 있어서 사람을 고용한 참이니까 이참에 말씀하신 것까지 살펴보겠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말끝에 조승필이 안부를 물어오자 천상기는 왈칵 감정이 복받치는 표정을 그려냈다.
“말씀도 마십시오.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서 약을 먹이려고 합니다. 우리 조 회장이 애써주면 내가 이 고마움을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 약해지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상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번득.
그리고는 광기 넘치는 눈으로 창을 노려보았다.
“이 개새끼. 가짜가 얼굴을 바꾼 건가? 만약 가짜가 자리를 차지하고서 나를 이 꼴로 만든 거면 너는 내가 산 채로 묻어버린다.”
그의 독한 말이 용인의 방을 떠돌았다.
**
화요일 오전 8시였다.
장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남아서 황채산은 커피를 마시며 오전 동시호가 전의 여유를 즐겼다.
“철부지 회장께서 사채업자와 촌년을 앞세워두고 하루쯤 까불었다만 오늘부터는 다를 겁니다.”
그는 여유로운 자세로 의자에 기댄 채 혼잣말을 지껄였다.
“아하!”
기다리기 지루한지 의자에서 일어난 황채산은 팔을 위로 뻗어가며 기지개도 켰다.
“오늘 내가 준비한 거 보고 나면 아플 건데?”
황채산은 의기양양이었다.
**
오전 8시 30분에 남부증권은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조 단위 돈을 구경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되겠나.
1자 뒤에 달라붙는 동그라미만 무려 12개다.
부동산 사기꾼들이 만들어서 들고 다니는 가짜 통장이나 잔액증명 말고 저런 숫자를 본 사람, 대한민국에 흔치 않다.
그런 수표를 두 장 딱 테이블에 올려놓자 남부증권 회장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월요일 거래 하루로 남부증권이 챙긴 수익만 100억에 가깝다.
그런데 오늘 또 2조를 추가로 입금했다.
황급히 뛰어나간 그가 말 새나가면 다 죽일 거라고 임원들을 다그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각오는 어때?”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장님.”
박승양의 질문에 이명선이 내놓은 답이었다.
“오늘까지 사흘 남았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긴말 안 할게. 세상은 있잖아. 캄캄해. 그냥 새카만 색인 거야. 그러다가 퍼뜩 불빛을 주거든. 그게 자주 있을 것 같아?”
박승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말 알지? 키보드 한 번 누를 때마다 집중하고, 오늘부터 목요일까지의 사흘이 이명선 씨의 인생 전체를 바꾼다는 것 잊지 마.”
“네, 회장님.”
“가 봐. 가서 마음도 다지고 해.”
자리에서 일어난 이명선이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남부증권 회장실을 나섰다.
“아이, 씨! 이제 적응할 때도 됐잖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힘들어 죽겠구만!”
인상을 버럭 찌푸린 박승양은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
천중명은 그룹발전본부에서 올린 사업계획서의 초안을 살피며 연필로 궁금한 점이나 부족한 점을 적어나갔다.
그렇게 집중하던 천중명은 힐끔 모니터에 올라온 시간을 확인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는 일은 엄청나다만, 허선영과 반나절도 함께 있지 못하고, 그렇다고 곽대출과 킬킬거리며 떠들 여유조차 없어서 참 재미없는 날의 연속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2조가 넘는 거래를 지시했고, 5조가 넘는 돈을 투입하는 사업계획서를 검토하는데 정작 천중명은 남들 출근하는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책상에 붙어 있었다.
멍하니 새로운 아침을 맞아 분주한 빌딩과 도로를 내려다보던 천중명이 픽 웃었다.
몸이 바뀐 이유가 죽어라고 일만 하라는 뜻인가 싶어서였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꼴통회장이 되는 길은 참 힘들고도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뭐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보았던 허선영의 표정에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윤세계가 연락했었나?’
천중명은 그날 테라스에서 있었던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정말 그런 이유라면 고개가 꺾일 정도로 시원하게 따귀 한 대 때려주면 되는 거지, 뭐.
짧은 휴식을 취한 천중명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허선영과 함께 양평에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좀 더 집중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자리에 앉은 천중명은 먼저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이미 동시호가에 들어선 뒤라서 매도와 매수가 표시되고 있었는데 당장 큰 주문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와 또 다르다.
이미 홍콩물고기도 분위기를 눈치챘을 게 확실해서 동시호가보다는 종가가 중요했다.
천중명은 머릿속에 그려놓은 차트를 떠올렸다.
홍콩물고기?
난 기본만 지킨다.
네가 어떤 짓을 하든 간에.
픽 웃은 천중명은 사업계획서에 시선을 돌렸다.
**
동시호가에 들어가기 직전인데도 황채산은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내일 오후 3시 전에만 나오면 됩니다. 그렇죠.”
그는 몹시 만족한 얼굴로 경쾌하게 답을 꺼내놓았다.
하얀 셔츠에 붉은색 타이를 걸었고, 소매 끝에서는 루비가 박힌 커프스버튼이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이제 좀 마음이 놓입니다. 혹시 모르니까 내일까지 한 번 더 확인해 주십시오. 그리고 참. 한국 쪽에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황채산이 야비한 눈으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동시호가가 시작되었다.
화요일 한국의 코스피 지수 선물은 317.85로 시작되었다.
“우리 장 선생이 보낸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다 잘 될 거고, 또 피를 보는 일이야 없었으면 하는데 워낙 큰돈이 걸렸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라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요.”
몇 마디 더 빤한 대화를 나눈 황채산은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다시 번호를 찾아 또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 선물지수는 318.30까지 갔다가 다시 317.95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이구. 우리 재벌 회장께서 많이 버셨겠는데?”
모니터를 살피며 비웃음을 던지던 황채산이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황입니다.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창한 영어였다.
“지경그룹이 개입한 정황은 거의 확실합니다. 중국은 이미 협조하기로 해서 내일 발표만 남았습니다.”
전화기에 집중하던 황채산의 눈빛이 또다시 야비하게 빛났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통화를 마친 그는 고개를 들어 여유 있는 태도로 딜링룸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대략 5천억 수준에서 적당하게 놀아줘. 대량 매수 내지 말고 백 개 단위로 분위기만 맞추는 선에서. 저쪽에서 어디까지 가는지 살펴보자고.”
황채산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
급한 결재를 마친 시간이 벌써 오전 10시 30분이었다.
그동안 틈틈이 모니터를 살피던 천중명은 양손을 책상에 올린 자세로 주문을 5분쯤 살펴보았다.
이명선이 500개에서 1,000개 단위로 주문을 통해 지수를 서서히 올리고 있었는데 동시호가에서부터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매도에 큰 주문은 없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 예에, 회장님!
“뭐가 그렇게 신나?”
- 이상하게 나는 몸을 쓸 때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회장님!
곽대출의 흥분한 대꾸를 듣자 먼저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준비는?”
-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남부증권에 있어서 걱정할 건 없어 보입니다. 네 명 준비했으니까 이쪽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출아.”
느닷없이 예전처럼 이름을 부르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곽대출의 대답이 없는 게 그랬다.
“적당히 해라. 다치지 않게.”
- 뭐라는 거야? 놀랐잖아, 회장님 놈아!
곽대출의 뻔뻔한 대꾸 덕분에 모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수고해.”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연속해서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황 선생님. 홍콩물고기가 반드시 뒤를 칠 준비를 했을 겁니다. 혹시 걸린 게 있나요? 정치나 행정, 아니면 미국에 있다는 펀드와 연계한 보도자료, 그런 것일 확률이 높은데요.”
- 그렇지 않아도 오전에 황채산이 했던 12통의 통화기록을 살피던 참입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모니터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낚싯바늘에는 미늘이라는 게 있거든. 그게 주둥이에 걸리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 안 빠져. 알았어? 이 매운탕 거리야.”
천중명은 전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