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 어디쯤에서 고개 숙이는지 보자(3)
허선영은 간혹 지치거나 힘들 때면 왼손을 펼치고는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를 본다.
고맙지. 당연히.
짓밟혀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 다가섰던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거짓말처럼 다독여주었으며, 사랑으로 감싸준 사람이 천중명이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고, 다음으로 가슴 설렜다.
그렇게 그를 사랑하게 된 뒤로 지금은 천중명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루에 몇 번을 주문처럼 외우는 단어이고 말이었다.
이러면 힘이 난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맛있는 음식을 마주하면 천중명이 떠오르고, 덜컥 세상이 갑자기 끝나면 어떡하나 하는 엉뚱한 염려도 한다.
반지를 본 허선영이 천중명을 떠올리며 홀로 미소 지었을 때였다.
“대표님. 대송그룹 윤세계라는 분이 전화하셨는데요? 2번이요.”
밖에 있던 직원이 노크와 함께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허세직 의원 딸로 코리아클럽 가봤던 허선영이었다.
윤세계를 몇 번 보았고, 얼굴도 기억한다.
무슨 일이지?
허선영은 본능적으로 천중명이 코리아클럽에 갔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허선영입니다.”
- 오랜만이네요? 나 기억하죠?
“네.”
허선영은 일부러 사무적으로 짧게 답했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와 자주 어울리는 송중대와 박영철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요즘 바쁘다면서요?
“디자인 일을 맡아서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요?”
- 만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죠?
“죄송하지만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그런데 전화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허선영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거친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 그럼 뭐 우선 전화로 하죠. 솔직히 말해서 지난 모임에 나온 천중명 회장님과 교감이 있었거든요. 능력 있는 남자와 매력 있는 여자가 만난 거니까 그런 것쯤 선영 씨도 이해하죠?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이번엔 픽 비웃는 웃음이 날아왔다.
- 천 회장님은 선영 씨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지닌 것 같더라고요. 요즘 그런 남자 흔하지 않죠.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천중명 회장님 힘든 것 알고 있어요?
힘든 일?
허선영의 뇌리에 코리아클럽 모임에서 일찍 돌아온 천중명이 잠시만 안고 있자던 순간이 퍼뜩 떠올랐다.
- 조승필 회장을 해임한 건 알아요?
“그 정도는 들어요.”
- 그럼 잘 알겠네요. 사촌 형인 조철행 장관이 벼르거든요. 그것 말고도 지경을 제외한 그룹들이 천 회장을 노린다는 거 선영 씨도 잘 알 거 아녜요? 이럴 때일수록 천중명 회장님에게 힘이 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요.
허선영은 수화기에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윤세계 씨.”
- 아이! 코리아클럽에 나와 봤으면 우리끼리 서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텐데? 디자인 회사 하나 맡았다고 같은 급으로 나오면 곤란해요.
“그런 급은 당신들이나 알아서 따지고, 중명 씨에게 헛물켜는 거 그만뒀으면 싶어요.”
- 오! 자신 있나 보네?
대뜸 말투가 바뀐 윤세계를 향해 허선영은 들으라는 의미로 픽하는 코웃음을 건넸다.
“그날 밤에 영화 보고 맥주 마시면서 윤세계 씨가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다 들었거든요. 좀 추하다? 이런 모습?”
윤세계는 당장 대꾸가 없었다.
“중명 씨는 윤세계 씨 같은 여자 안 좋아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전화를 끊을 줄 알았는데 허선영이 던진 질문의 답이 궁금했는지 윤세계는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뿜으며 버티고 있었다.
“당신, 진짜 재수 없거든!”
달칵.
수화기를 내려놓은 허선영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입 앞으로 가져갔다.
당연하게 천중명은 윤세계가 수작 부렸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았다.
허세직의 딸로 산 게 몇 년인데?
윤세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설치는 살짝 모지리에 삼촌들만 믿고 까부는 속 빈 여자쯤 된다.
“후-.”
당찬 대꾸를 날린 허선영이 뛰는 가슴을 누르기 위해 숨을 내쉴 때였다. 형광등 불빛을 받은 반지가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서 빛났다.
잘 말해놓고 뭘 불안해해?
힘들 땐 내 뒤에 있으라고 했잖아.
잘했어. 선영 씨.
정 속상하면 둘이서 욕하는 연습 더 하면 되지. 그렇지?
“나 이렇게 자신 있어도 되는 거죠?”
반지를 보며 혼잣말을 건넨 허선영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신 뒤에 커다란 눈으로 구내전화기를 홱 노려보았다.
“재수 없어.”
고개를 털어낸 허선영은 그리던 디자인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
박승양과 남부증권 회장에게 인사한 이명선은 증권사에서 제공해준 승용차를 이용해 일찍 퇴근했다.
털썩!
방에 들어간 그녀는 던지듯이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 힘들어!”
정말이지 피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고, 오늘 거래를 견디는 대신 원래 수명에서 일주일쯤을 깎아 먹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리산을 꼭대기까지 달린 듯한 피곤함이 이명선을 덮칠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진동으로 해놓은 그녀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왼손으로 휴대전화기를 들었던 이명선은 누가 멱살을 잡아당긴 것처럼 삽시간에 몸을 세웠다.
“네, 회장님. 이명선입니다.”
- 오늘 고생 많았어요. 예상보다 굉장히 잘해줬어요.
“아닙니다, 회장님. 저는 지시해 주신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가볍게 웃는 소리가 넘어왔는데 이명선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휴대전화기를 받쳐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내일은 박승양 회장이 2조를 넣을 겁니다. 내일 우리 목표는 327.50입니다.
그러나 상체를 세우던 이명선은 천중명의 다음 말에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버티는 게 아니라 우리 쪽에서 선방을 날리는 거라고?
그것도 12포인트나 높게?
- 숫자 기억하죠?
“네! 회장님. 327.50이라고 기억합니다.”
- 그래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내일 오전 동시호가 직전에 대략 2포인트 높게 잡아서 시작하세요. 그리고 그대로 계속 밀고 올라가요. 내일 박승양 회장이 입금한 돈이 부족하면 내 쪽에서 2조5천억을 더 투입할 예정이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네, 회장님.”
이명선이 고개를 숙여 답한 다음이었다.
- 내일도 고생 부탁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회장님.”
짧은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이명선은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박승양이 2조를 넣으면 남부증권 계좌에 현금이 2조7천억, 거기에 2조5천억을 더해준다고 했으니까 모두 합치면?
“히익!”
이명선은 태어나서 처음 내는 해괴한 비명을 질렀다.
5조2천억의 주문을 하는 거라고?
오늘 315.50에 매수한 게 1조3천억 원인데 그게 327.50이 되면 무려 200틱을 먹는다.
그럼 도대체 얼마의 수익이 잡히는 거야?
1조에 수당이 3억 원이니까 내일 거래가 끝나면 얼마를 받는 거지?
이명선은 잠이 홀랑 달아나고 말았다.
**
황채산은 왼쪽에 앉은 남자를 불편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런 건 도대체 어디에 넣고 다니는 거냐.’
누가 중국 놈 아니랄까 봐 왼편에 앉은 남자는 넓적한 판도를 꺼내 사과를 잘도 자르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황채산이 엉뚱한 생각을 했을 때였다.
“오늘 본전인 건 아시지?”
판도로 잘라낸 사과를 주둥이에 넣은 삼합회의 조직원이 능숙한 우리말로 질문을 던졌다.
“월요일부터 이렇게 불편하게 하면 목요일까지 어떻게 일하겠어요? 내가 정동방 회장에게 전화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그럼 믿고 나가 있겠습니다. 모쪼록 공항이나 항구 쪽으로는 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누가 도망이라도 간다는 거요?”
“그렇다는 거지요.”
뻔뻔하게 대꾸를 건넨 조직원이 일어서자 문 앞을 지키던 두 놈이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후유-!”
황채산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 계획을 알고 있어.’
오늘 장을 마감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이명선이라는 초짜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하고 박승양이라는 인간이나 그 뒤에 있는 누군가가 황채산의 계획을 알아내고는 뒤통수를 갈기는 게 분명했다.
확실히 박승양은 아니야.
황채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박승양 같은 사채업자는 어찌어찌해서 이런 계획을 눈치챘다고 쳐도 조용하게 묻어 들어와서 한몫 챙기지, 절대 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가면서 달려들지 않는다.
그럼 누구냐?
박승양 말고 다른 누군가는.
황채산의 결론은 아무래도 천중명이었다.
반기를 들려던 조승필과 임원을 싹 날리고, 그들이 추대하려던 천상기를 용인에 가둬버린 인물이니까. 게다가 지경그룹의 회장인 그가 지닌 정보망이라면 조승필을 뒤지다가 황채산쯤 충분히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래. 그게 맞지.”
황채산은 소태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뱉어냈다.
그동안 승승장구했던 것을 믿고 자만했었다.
한국의 장관 사촌 동생이자 지경전자의 회장이 도움을 요청하는 수준이 되었다며 목에 힘이 들어간 것도 있었다.
‘철부지 회장이 돈을 쏟아 부었다 이거지? 사채업자를 앞세워서? 그럼 돈을 먹어줘야지.’
그는 독하게 변한 눈으로 휴대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두 번쯤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굵직한 조승필의 대꾸가 넘어왔다.
“황채산입니다, 회장님.”
- 말씀하시오.
“천중명 회장과 박승양의 관계에 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무래도 사채업자가 이번 일에 끼어든 게 수상해서요.”
- 내가 알아보리다. 다만, 지금은 회사에서 나와 있는 상태라 수요일쯤에나 답을 드릴 것 같은데 괜찮겠소?
“그렇게 해주십시오.”
답을 건넨 황채산은 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상기 회장은 어떻습니까?”
- 지금 용인에 있고. 천호득 회장의 심복이었던 윤 실장이 지키는 모양인데 목요일이 지나면 내가 납치, 감금으로 터트릴 예정이오.
조승필의 답은 시원시원했다.
“알겠습니다. 목요일에 다 끝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황채산이 건넨 넉넉한 대꾸로 통화가 끝났다.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문을 힐끔 쳐다본 뒤에 야비한 웃음을 그려냈다.
“나도 나지만, 자기들 돈 2조 원이 날아가는데 사채업자 하나 작업 못 해주겠어? 안 되면 경고 차원에서 겁 없이 주문 넣은 년의 손가락을 싹 자르라고 하면 되겠지.”
그는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자! 그럼 천중명이 뒤에 있다고 계산하고 내일을 준비해 볼까?”
양쪽 팔걸이를 짚은 황채산이 책상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
오후 3시 30분쯤에 천중명이 비서실 직원들과 들어서자 그룹발전본부의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힘들겠지만, 목요일 오전까지만 고생합시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기운 내라고 부탁하는 마음도 담아서 커피와 샌드위치 준비했으니까 간식으로 생각하세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천중명은 가장 앞에 있는 여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본부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여직원이 안쪽 문을 향해 한 걸음 움직인 다음이었다.
“그거 두 개만 이리 줘.”
천중명은 뒤따라 온 비서실 직원에게서 일회용 컵 두 개가 담긴 종이 캐리어와 작은 봉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유진교의 방으로 향했다.
지경이란 세상의 왕인 천중명이었다.
그룹발전본부에 들어오려고 바랐던 이유가 바로 천중명 가까운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룹 회장을 직접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회장님 지시로 준비한 커피와 샌드위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회장 비서실 직원이 직접 건네주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받았다.
직원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서려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천중명이 들어서자 유진교가 바로 책상에서 일어섰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져왔습니다. 간식 괜찮으시면 함께 먹으려고요.”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일요일부터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서 밖에도 돌릴 겸해서 가져왔습니다.”
얼른 다가온 유진교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냥 앉으세요. 이게 뭐 무겁다고요.”
천중명은 상석의 왼편 소파에 앉고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테이블에 놓았다.
상석에 앉기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유진교는 중앙의 자리를 비워둔 채 천중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장은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긴 천중명이 그걸 입에 물고는 말을 이었다.
“목요일에 발표 끝나면 금요일부터 발전본부는 휴가를 내줄 생각입니다. 어떠세요?”
“그러시면 과장급까지만 쉬게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발전본부로 몰려드는 계열사 업무가 많아서 금요일을 완전히 비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둘이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눈 대화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유진교가 슬쩍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시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래 보이세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유진교의 확신에 찬 답을 들은 천중명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인터넷 은행을 설립해볼까 합니다. 사전 작업은 역시 그룹발전본부에서 해야겠지요?”
“샌드위치가 갑자기 목에 걸립니다.”
“그럴 줄 알고 커피도 가져온 겁니다.”
편안하게 오간 대화였다.
“와이파이를 무료로 개방하면 인터넷 쇼핑 분야를 좀 더 키워볼 생각입니다. 그걸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결제시스템과 연계할 카드를 발행할 수 있는 은행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월요일부터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직원을 보강할 생각입니다.”
“알아서 해주세요.”
유진교는 커피를 마시며 천중명을 살폈다.
아직 남았다.
인터넷 은행을 준비하라는 천중명에게 분명 말하지 않은 이유가 더 있다. 어쩌면 대규모 자본의 공격에 대비한 포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유진교는 천중명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을 거다. 천중명이 입을 다물고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에는.
“경제학자들과 공부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실전은 처음인데 선물 포지션은 어떻게 결정하신 겁니까?”
유진교가 화제를 바꾸려는 것처럼 오늘 선물거래에 관해 슬쩍 질문을 던졌다.
“공부하면서 주식이나 파생상품은 확실히 많이 가진 사람이 유리한 싸움이라고 느꼈습니다. 그 이론에 맞춰 내가 가진 만큼 정석대로 지시했을 뿐입니다.”
답답해하는 유진교의 표정을 보며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게다가 오늘은 황채산이 방심했다가 당한 꼴이어서 더 쉽게 끝났을 겁니다. 내일은 분명 독하게 달려들겠죠.”
“그렇다면 회장님의 내일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정석대로 갑니다. 편법이 쉬워 보이지만, 정석을 이기는 법은 없습니다.”
답을 전하는 천중명을 보며 유진교는 솔직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나이 때의 천호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데다, 강단까지 갖춘 천중명의 모습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