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27화 (127/315)

# 127

127. 어디쯤에서 고개 숙이는지 보자(2)

월요일 오후 3시 20분부터 동시호가에 들어가면서 지수가 315. 50에 멈춘 상태에서 또다시 매도와 매수 주문이 번갈아 치고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3시 26분이었다.

4분 남았다.

매도에 불쑥 3,500개의 주문이 올라오자 4,000개의 매수 주문이 달려들어 덥석 잡아먹었다.

잘하고 있다. 잘해냈다.

그러나 전권을 쥐지 못한 이명선은 분명 한계가 있을 테고, 특히나 장 마감을 앞둔 지금 같은 상황에 더욱 그렇다.

천중명은 모니터에 올라온 시황을 노려보며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홍콩물고기 황채산은 마지막에 얼마를 던질까?

지금까지 주문으로 천중명과 황채산 양쪽 모두 얼추 1조2천억의 돈이 코스피 선물지수 315.50에 물린 꼴이었다.

천중명은 올라야 수익이 발생하는 콜, 황채산은 내려가야 돈을 버는 풋의 포지션이었다.

어차피 목요일에 결판나는 싸움이었다.

그러니 오늘 종가를 완전히 밀어봐야 당장 크게 이익 날 것은 없었다.

대신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들 확률이 높았다.

계산을 마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이명선 씨. 장 마감 직전에 만 개의 매수 주문을 넣으세요. 마감 직전일수록 좋습니다. 오늘 정말 잘해줬어요.]

문자를 마친 천중명이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을 때였다.

지이이잉.

[네.]

정말 짧은 답이 액정에 올라왔다.

얼마나 마음이 급하면 이럴까 싶어 천중명은 픽 웃었다.

하긴, 동시호가에 휴대전화기 자판을 오래 누를 시간이 어디 있겠나.

천중명이 다시 시황에 눈을 돌렸을 때는 3시 28분이었다.

2분 남았다.

죽겠지, 홍콩물고기?

그러게 왜 아무나 깨물려고 덤벼?

불쑥 올라온 5,000개의 주문을 5,500개의 주문이 삼킨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회장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황성규의 문자가 들어왔다.

[집무실에 있습니다. 퇴근 전에 편할 때 오세요.]

천중명이 답문을 넣기 무섭게,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하는 답이 있었다.

3시 29분이었다.

**

남부증권 회장실에서 모니터를 노려보던 박승양이 불안한 표정으로 숫자를 살폈다.

“아무래도 마감 직전에 대량 매도를 낼 것 같은데?”

그가 말을 중얼거릴 때, 시간이 29분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먼저 선방을 날려!”

주가 조작의 고수 박승양이다.

이렇게 포지션을 지켜야 하는 날의 마지막에는 역시 상대방이 반항 못 할 정도로 강한 한 방이 약발을 잘 먹는다.

눈치를 살피는 남부증권 회장 옆에서 박승양은 핏물 가득한 고기를 노려보는 승냥이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패를 보여 봐.”

그가 혼잣말을 날리기 무섭게 불쑥 3,000개의 매도가 나왔고, 기다렸다는 듯 매수 3,300개가 튀어나와서는 매도주문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초 단위로 흘렀다.

장 마감까지 17초 남았다.

“3초 언저리에서 매도주문이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입력하는 순간 끝난다니까!”

박승양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디지털 숫자는 11초를 가리켰다.

10초, 9초, 8초, 7초.

개미들이 내놓는 낱개 주문과 어쩌다 개인치고는 큰 주문인 10개, 20개의 주문이 떠오르기는 했는데 그 외는 잔잔하게 진행되었다.

3초 남았다.

“어떻게 하려고? 지금 얻어맞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어어어!”

중얼거리던 박승양의 옆에서 남부증권 회장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매수 주문란에 10,000이라는 숫자가 불쑥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박승양은 숨이 턱 막혔다.

1만 개 주문이었다. 1만 개.

그것도 박승양의 바람대로 선방을 날리는 주문이었다.

“우와!”

종일 얻어맞기만 하던 우리 편 초짜가 막판에 제대로 한 방 날린 꼴이었다.

1만 개의 주문에 얼이 빠졌을까?

주문도 못 넣었을 걸?

화면에 있는 숫자가 3시 30분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화면이 툭 튀면서 오늘 장이 마감됐다.

“됐어! 이거지!”

월요일 코스피 선물지수는 315.50으로 끝났다.

벌떡 일어선 박승양이 주먹을 움켜쥔 채 세리머니를 펼쳤고, 그 옆에서 남부증권 회장은 승리한 선수를 보는 관객처럼 연신 박수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남부증권 회장이 아부성 발언을 꺼낸 다음이었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르.

박승양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그는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누른 뒤에 휴대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천 회장. 나요. 박승양.”

-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나야 지켜보기만 했는데 고생이랄 게 있겠소? 우리 이명선 과장이 애 많이 썼지요. 흐하하하.”

박승양은 오늘 처음으로 통쾌하니 웃었다.

- 회장님. 내일 혹시 2조를 입금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어진 천중명의 질문에 박승양은 뚝 웃음을 그쳤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그럼 혼자만 알고 계시다가 내일 장 시작 전에 2조 원을 입금하십시오. 남부증권 입단속도 부탁드립니다.

박승양은 당장에라도 남부증권 회장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건 염려 마시오. 내 계좌의 정보가 나가면 내가 바로 알거든요. 그런 일이 생기면 여기 책임자는 내가 아예 산 채로 파묻어 버릴 생각이고, 관련된 인간들은 털털 털어서 거지를 만들어 버릴 거요.”

박승양의 독한 눈빛과 각오를 지켜본 남부증권 회장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 그럼 내일 또 통화하겠습니다.

“천 회장님.”

박승양은 통화를 마치려는 천중명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몸을 살펴야 합니다. 이제 천 회장은 혼자 몸이 아니란 거 잘 아시지? 산삼도 좀 자시고. 내가 구해드릴까?”

그래놓고는 결국 친분을 쌓기 위한 아부 가득한 말을 쏟아냈다.

- 감사합니다만, 나는 아직 건강하니까 박 회장님 건강을 먼저 챙기시기 바랍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햐! 확실히 보통 인물이 아니야.”

휴대전화기를 바라보며 감탄을 쏟아낸 박승양이 홱 그려낸 도끼눈을 남부증권 회장에게 돌렸다.

“뭐해요? 회장은 가서 임직원들 단속해야지. 하여간 내 계좌의 예치금이나 거래 현황이 얼마라고 말이 도는 날이면 법이고 지랄이고, 나 알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남부증권 회장이 얼른 방을 뛰쳐나갔다.

“내일은 2조 원을 넣으라 이거지? 오늘 7천억이 남았을 텐데? 하아! 이거 내가 제대로 만났어! 인생 꽃피는 거야! 흐하하하!”

웃음을 쏟아내던 박승양이 급히 몸을 움직여 회장실을 나섰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이명선을 보러 갈 참이었다.

**

최만호는 그의 집무실에서 방은경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네, 실장님. 그동안 많이 바쁘셨지요?”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가끔 남자들처럼 “허허허.”하는 웃음을 낼 때가 있다. 수더분한 표정의 방은경이 바로 그런 웃음을 흘리며 최만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회장님께 들었습니다. 주식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네, 실장님. 아이가 정리하기에는 금액도 크고 말이 돌 수 있어서 제가 가져왔습니다.”

방은경은 말과 동시에 안고 있던 백을 열어 주권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직원이 들어와 차를 놓아주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가격은 얼마나 됩니까?”

“30억쯤 하나 봐요. 멍청한 것이 지난번 가격이 올랐을 때 정리했으면 좋았을 걸, 공연히 욕심 부리다가 여러 사람 불편하게 만들었지 뭡니까?”

말을 마친 방은경이 또 남자처럼 “허허허.”하는 웃음을 붙였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실장님. 아이한테는 40억 주시고, 제게 귀 하나 붙여주세요.”

최만호의 질문에 방은경은 바로 답을 꺼내놓았다.

어차피 선수끼리다.

이런 일로 흥정은 추하고 디딤 수 놓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거나 인생 망가지는 수가 있다는 것쯤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걸 보시죠.”

“뭔가요? 이게?”

“제주도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1층 상가, 아니면 5층 사무실, 꼭대기 층의 라운지. 이 셋 중 하나를 드릴까 합니다.”

카탈로그를 향해 고개 숙인 방은경의 눈에서 번쩍하는 불꽃이 튀었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룹의 처리 방식을 잘 아실 테니 긴말 않겠습니다. 이 세 곳은 돈이 있어도 분양받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층 상가가 정말 좋네요.”

“그럼 현금 40억과 방은경 씨가 정하는 명의로 상가를 넘겨드리겠습니다. 대신 이후에 아이의 입에서 우리 그룹과 관련된 말이 나오면 그 뒤에는 우리 방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방은경은 테이블에 놓인 카탈로그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이하연에게 10억을 더 받았다고 해서 5억 현찰 챙기고, 방은경은 이렇게 상가도 챙긴다.

“그럼 주식은 놓고 가시고 현금을 받을 계좌를 직원에게 알려주십시오.”

“몇 명으로 나눠서 받아도 되겠지요, 실장님?”

“물론입니다.”

“그럼 실장님. 남은 일은 직원분과 처리하기로 하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회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 말씀 꼭 전해주세요.”

방은경은 주권을 테이블에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박승양과 통화를 마친 천중명의 집무실로 황성규가 들어왔다.

“뭘 그렇게 불편하게 그러세요? 앉으세요.”

깍듯하게 인사하는 황성규에게 소파를 권했을 때,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황채산의 주변을 살피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게 그 조사내용입니다.”

황성규는 제법 많은 분량이 담긴 반투명 서류철을 천중명의 앞에 놓았다.

“황채산이 관리하는 계좌 전체 금액은 전부 6조4천억 원입니다. 광동과 홍콩지부에서 관리하는 삼합회 자금 2조 원, 일본의 야쿠자 조직에서 입금한 2조 원, 나머지는 미국계 사모펀드에서 조달했습니다.”

천중명은 입금계좌와 관리자 이름, 이어서 대머리를 한 인상 험악한 남자의 사진을 본 뒤에 서류를 넘겼다.

“지금 보시는 내용은 황채산과 조승필 회장의 통화 내역입니다. 회장님께서 조승필 회장을 해임한 날은 일곱 차례 통화했고, 가장 긴 시간은 27분입니다.”

픽 웃은 천중명이 다시 서류를 넘기자 이번엔 익숙한 번호가 눈에 띄었다.

“천상기 회장과 조승필 회장의 통화 내역입니다. 아래에 따로 기록한 통화는 오지은과 천상기 회장의 통화입니다.”

“용인에서 제법 바쁘게 살고 있네요.”

천중명은 뒤에 있는 서류를 살폈다.

“황채산에게 투자한 사모펀드를 조사한 내용입니다. 미국에서 6개월 전에 설립했는데 실적은 전혀 없고, 이번이 첫 투자입니다.”

“수상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다만, 사모펀드가 황채산의 계획을 알고 나서 접근했는지, 저들이 계획을 먼저 세우고 황채산을 꼬드겼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천중명은 서류를 내려놓고 시선을 들었다.

“아버지를 노린 사람들은 알아냈습니까?”

“일주일 안으로 찾아내겠습니다. 사모펀드를 살피는 과정에서 대강 윤곽은 나왔습니다.”

충직한 표정으로 답을 건네는 황성규를 보며 천중명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와 방법이 어떻든 간에 저쪽은 차곡차곡 준비하는 모양새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황 선생님이 있어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회장님을 뵙고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 같습니다.”

말을 마친 황성규는.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주 볼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밀려 있는 일이 많았다.

그를 보낸 천중명은 책상으로 움직여 휴대전화기를 들고서 바로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어디야?”

- 아래층입니다.

“잠깐 보자.”

- 예, 회장님.

씩씩한 곽대출의 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소파로 향했다.

천중명의 계획대로 목요일을 마친다면 삼합회와 야쿠자가 무려 4조 원의 손실을 보게 된다.

돈이라면 사람 몸뚱이도 잘라 파는 놈들이 4조 원을 손해 봐야 한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나.

에이, 재수 없는 새끼들.

그냥 손해 보고 끝나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한국까지 날아와서 엄지손가락을 구부린 도깨비에게 공연히 눈알까지 잃게 생겼다.

곽대출을 기다리며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다시 들어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실장님. 오늘부터 전산망과 내부 보안에 신경 써 주세요. 목요일 오전까지입니다. 전산망 해킹, 도청에 특히 주의하고 이 시간 이후로 목요일 오전까지 발전본부와 기획실에 외부인의 방문을 막겠습니다.”

-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회장님.

답을 들은 천중명이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곽대출이 들어왔다.

“커피 부탁해.”

부속실 직원에게 차를 부탁한 천중명은 소파로 곽대출을 불렀다.

“우선 이걸 봐.”

곽대출이 서류를 대강 살피는 사이에 커피가 들어왔다.

“거기 있는 놈이 삼합회 소속이란다. 그쪽에서 박승양 회장이나 이명선 씨를 노릴 가능성이 높아. 아니라면 일본에서 사람이 건너올 수도 있고.”

곽대출이 주인영의 집에서 자고 온 것만큼이나 만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가 지켜줬으면 싶다.”

“이런 건 무조건 내가 해야지,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몸뚱이가 굳어가는 것 같아서 죽는 줄 알았는데!”

대꾸를 한 곽대출이 사진으로 시선을 떨군 뒤에 오른손 엄지를 까딱거린 다음이었다.

“혼자서 되겠어?”

“지켜야 할 사람이 두 명이라 제가 알아서 사람 쓰겠습니다. 이번에는 중국이나 일본 놈들일 테니까 전부 눈알을 파줘도 되겠습니다, 회장님?”

차라리 그냥 경호업체에 시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곽대출의 눈빛이 과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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