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 은혜고 원수고 따따블로 (3)
월요일 아침, 남부증권 회장은 출근과 동시에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뭐하느라 출근이 이렇게 늦어?”
생각이나 해 봤나?
천하의 박승양이 먼저 나와서 종이컵을 우그러트리며 타박을 던질 거라고?
“왜 여기 계십니까? 안에 계시죠!”
“주인도 없는 방에서 날 더러 뭘 하라고?”
“얼른 들어가십시오. 얼른.”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박승양을 챙겨 방으로 들어간 회장은 상석을 그에게 양보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저, 거기, 이명선 과장 오라고 해 봐.”
“아, 예!”
차를 가져오는 여직원을 보았던 남부증권 회장은 박승양의 욱하는 눈빛을 보고는 얼른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아, 이명선 과장? 얼른 내 방으로 좀 와요.”
통화를 마친 남부증권 사장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타악.
박승양이 테이블에 수표를 한 장을 내려놓았다.
수표 한 번, 박승양 한 번, 다시 수표 한 번, 박승양 한 번.
“1조야. 현금 처리할 수 있지?”
“예에?”
“잘해. 잘. 내일, 모레, 그리고 목요일까지 계속 아침마다 1조를 통장에 넣을 거니까.”
“아이고, 회장님!”
박승양의 입금을 제외하면 남부증권은 아직 고객 예치금 전부를 합쳐도 1조 원이 안 된다.
벌떡 일어난 남부증권 회장이 깊게 고개를 숙일 때였다.
이명선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직후에 박승양의 표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바뀌었다.
“아, 이 과장. 얼른 와. 앉아. 천 회장께 말씀은 들었지?”
“네, 회장님.”
공손하게 무릎을 붙인 채 바라보는 남부증권 회장 앞에서 박승양은 이명선이 예뻐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오늘부터 장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까 커피부터, 점심, 하여간 필요한 건 다 말해. 내가 막 뛰어다니면서 구해줄게.”
“아니 그걸 왜 회장님께서?”
“이명선 과장이 아직 비서가 없을 거 아냐!”
“준비합니다. 바로 배치하겠습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시간은 8시 30분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됐고?”
“네, 회장님.”
“그래. 여기 내가 1조 원을 더 가져왔어. 바로 현금 처리해서 입금할 테니까 염려 말고, 응?”
“네. 천중명 회장님께서 어제 따로 전화 주셨습니다.”
“아이고! 우리 천 회장님! 꼼꼼하시기도 하지!”
그저 눈에 집어넣을 것처럼 이명선을 보던 박승양이 다시 피 묻은 고기를 보는 듯 홱 시선을 돌렸다.
“뭐해? 입금 안 시키고? 9시면 장 시작되는 거 몰라? 현금으로 처리해줘야 주문을 넣지. 그리고 입금증도 주고.”
화다닥 일어서던 남부증권 회장이 테이블에 정강이를 세차게 찍혔다.
“괜찮습니다.”
그는 전혀 안 괜찮은 표정으로 절룩이며 방을 뛰어나갔다.
“이명선 과장.”
남부증권 회장이 나가자 박승양은 확실히 승냥이 같은 표정으로 이명선을 불렀다.
“인생을 살다 보면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는데 그거 다 개 거짓말이야.”
“네, 회장님.”
박승양의 눈빛이 무섭고, 분위기가 살벌해서 이명선은 잔뜩 긴장한 채 답을 꺼내놓았다.
“준비되지 않을 때 나타난 기회는 오히려 독이 돼. 사람을 망치거든. 언제고 기회가 올 거라 믿고 노력하는 사람도 막상 기회가 오면 놓치기 쉬워. 세 번의 기회?”
같잖다는 듯 박승양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나머지 두 번은 독이야. 준비되지 않았는데 오는 기회는 인생을 거저먹는 거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람을 망가트리거든. 이명선 과장은 그 기회를 잡았을 뿐이야. 좀 이르긴 하지만.”
이명선은 대꾸도 못 한 채 박승양에게 집착했다.
그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어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돈이다. 돈. 평생 만져보지 못할 큰돈. 월화수목, 4일간 이명선 과장의 인생이 결정 나. 목요일에 장 마치고 쓰러져 며칠을 앓든 그건 몰라. 하지만 4일은 독하게 버텨.”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이명선이 긴장한 채 대답을 마친 직후였다.
여전히 절뚝이는 걸음으로 회장이 들어와 입금증이 담긴 작은 쟁반을 박승양 앞에 놓아주었다.
“이명선 과장은 가 봐. 나는 이곳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한 시간에 한 번은 들를지도 몰라.”
“네,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나 곱다랗게 인사를 마친 이명선이 회장실을 나섰다.
“확실히 천 회장 대단하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나간 뒤에 박승양이 혼잣말처럼 감탄을 쏟아냈고, 변죽을 맞추는 것처럼 남부증권 회장이 질문을 던졌다.
“이명선 과장 말이야. 눈빛 못 봤어?”
“눈빛이요?”
입맛을 다신 박승양이 시계를 힐끔 보고는 찻잔을 들었다.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이번 작업 끝나면 내가 데려가서 한번 키워 볼까?”
박승양이 시선을 천장으로 향해 고민하는 옆에서 남부증권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
최만호는 아침부터 찾아온 지경전자 임원 세 명과 소파에 앉았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어제도 출근하셨습니까?”
“일이 좀 있어서요.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임원 한 명이 눈치를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방문하신 날 말입니다. 분위기 때문에 눌려있던 바람에 우리는 억울하게 해임된 겁니다. 이점을 회장님께 꼭 말씀드려 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습니다.”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남 없는 방문에 최만호는 나직하게 숨을 먼저 내쉬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지경전자의 임원 발령이 있습니다. 이미 결정 난 사안이라 지금은 어찌할 방법이 없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회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임원 임명이라니요?”
방문한 세 사람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였다.
“현재 이사급과 부장급을 우선 상무보와 이사로 승진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임원 세 명이 옆구리를 찔린 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당분간 대표이사 회장은 천중명 회장님께서 맡으시고, 이번에 승진한 임원들을 평가해서 사장과 부사장으로 다시 승진시킨다는 계획입니다.”
임원 세 명은 아예 따귀를 제대로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지경전자 같은 회사에서 임원이 될 기회가 어디 흔하겠나.
어제까지 자신들을 따르겠다던 부장급들이 승진 통보를 받은 뒤에도 계속 그럴 리는 절대 없는 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승진한 상무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 테고, 심지어 대리점 관리에 인격적인 모욕은 없는지를 살필 게 분명했다.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껏 반도체와 새로운 배터리 생산시설 준공에 지난 몇 년을 바치는 것처럼 일했습니다.”
“그룹의 최고경영자 앞에서 반기를 들었던 분들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거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분위기가….”
“냉동창고와 지경건설의 임원들이 어떻게 됐는지 빤히 아시잖습니까? 그분들이 돌아오셨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있을 겁니다.”
최만호의 태도를 확인한 세 명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를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오전 9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
일요일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던 천중명은 7시 전에 집무실에 도착했다.
일요일에 많은 결정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결재서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지경전자 임원 승진에 관한 건을 결재한 천중명은 다음 결재 판을 펼치고는 컴퓨터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거나 궁금한 사안들을 메모했다.
전국의 계열사에서 상소문 올라오듯 급한 결재들이 날아들고 있어서, 이걸 모두 살피고 결재하려면 오전이 훅 지나간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결재 판을 살피던 천중명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8시 45분이었다.
천중명은 팔을 뻗어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지경건설 박준환 전무를 전화 연결해 줘.]
[네, 회장님.]
용인의 크레인 사고 이후로 지경건설은 지경화장품에 못지않을 정도로 인기폭발이었다. 재건축 아파트들의 조합원들이 지경건설에 맡기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겠다고 나설 정도였으니 말 다한 수준이었다.
[회장님. 1번에 박준환 전무 전화 연결했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보고를 들은 천중명은 수화기를 든 뒤에 바로 1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박준환 전무입니다, 회장님.
“네, 고생 많습니다. 오늘 올라온 결재서류를 보고 있는데요. 재건축 사업을 수주하는 데 왜 220억이라는 비용이 필요한가요?”
- 회장님. 그 부분은 관례대로 조합원을 위한 선물과 여행, 그리고 별도의 경비를 지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입니다. 그 외에 조합 간부들을 위한 특별 행사 비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흐음.”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먼저 뱉어냈다.
“그런 비용을 하나도 들이지 말라면 안 되겠지만, 이걸 20억 이내로 줄이세요. 그리고 남는 비용을 공사에 사용하는 거로 합시다. 하나 더.”
- 예, 회장님.
풀이 팍 죽은 전무의 답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수주하지 마세요. 우리 공사 안 하면 안 했지, 이따위로 돈 쓰고 그 핑계로 공사 부실해지는 거 그만합시다.”
- 회장님. 지시는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경건설은 설립 이후에 두 번째로 최대 수주를 앞두고 있습니다. 아무리 조합원들이 지경건설을 선택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선의 향응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천중명은 시계를 슬쩍 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수주를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 말고, 더 단단하고, 더 방음 잘 되고, 더 좋은 내장재 사용한 아파트를 그만큼 적은 비용으로 짓겠다고 홍보하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지경건설에서 올린 결재 판을 부결란에 올렸다.
빌어먹을 놈의 관례.
먹는 사람과 주는 사람만 좋고, 나머지 대다수가 손해 보는 그 더러운 관례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천중명 역시 비슷한 인간으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9시까지 5분이 남은 상황이었다.
천중명은 마우스를 움직여 코스피 선물지수란을 화면에 올렸다.
매수와 매도에 주문이 잔뜩 쌓였고, 10, 30, 5, 따위의 추가 주문이 수시로 떴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홍콩물고기?”
천중명이 혼잣말처럼 던졌을 때, 모니터 구석의 디지털시계가 8시 58분으로 변했다.
“나는 지경 도깨비거든. 누가 이길까?”
천중명이 픽 웃는 동안에도 주문 숫자는 계속 변하고 있었다.
**
박승양은 남부증권으로 아침에 날아든 미국의 세계적인 투자회사 ‘포드앤제이슨’의 공문을 보고서 감동을 멈출 길이 없었다.
박승양 같은 선수가 내부자 거래로 몰릴 위험을 모를 리 있겠나. 그래서 그는 목요일까지 여기저기 손을 써놓을 생각이었고, 최악에는 뭐, 집행유예도 각오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천중명은 어떡했는지 그걸 또 이 공문으로 모두 정리해 버렸다.
감동이 짜르르 올라오는 것과 별개로 장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박승양은 이상하게 소변이 자주 마려웠다.
10분 전에도 들렀던 참인 데다, 마신 거라곤 물 한 모금이 전부라 나올 게 있을 리도 없었다.
소변기에 붙어선 박승양은 인상을 찌푸리다 몸을 떨고는 뒤로 물러났다.
“에이, 씨! 오줌도 안 나와? 미치겠네, 진짜!”
남부증권 회장 앞에서 큰소리 뻥뻥 쳤지만, 박승양도 속이 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공하면 말할 것 없고, 실패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200만 원이라는 글귀가 박힌 찌라시를 돌리며 살아야 한다.
“하느님. 이번 일이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10퍼센트!”
박승양은 세면대의 거울 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2천5백억 원은 솔직히 좀 많다.
“1퍼센트를 뚝 떼서 드리겠습니다.”
2조5천억을 먹는데 그깟 250억, 마누라가 다니는 교회에서 이참에 얼굴 한 번 세워주지, 뭐.
“정말입니다. 진짜 드립니다.”
박승양은 간절한 심정으로 눈을 감은 채 세면대에 대고 약속했다. 눈을 뜬 그가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향해 방향을 튼 직후였다.
“흐이! 뭔 소변이 또 마려워?”
짜증을 벌컥 낸 박승양은 다급한 걸음으로 소변기를 향해 움직였다.
**
장 시작이 가까워질수록 가장 긴장한 사람, 이명선은 모니터 앞에서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장 시작 전에 315.50의 지수 포인트에 매수주문을 넣은 게 이미 3천 계약이 넘는다.
깔끔하게 20억 주문이었다.
매도가 많으면 지수가 떨어져서 출발하고, 매수가 많으면 올라가서 시작한다.
그래서 장 시작과 동시에 7포인트, 틱 수로 140틱이 위아래로 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타다닥. 탁.
매도 주문이 올라오는 것을 본 이명선은 곧바로 매수에 다시 100계약을 더 넣었다.
모니터에 플러스 100이란 숫자가 떴다가 사라지고, 매수주문 계약 수에 100개가 늘었다.
장 시작까지 30초 남은 시간이었다.
그때 매도 주문이 갑자기 500이 확 늘었다.
타다닥. 탁.
이명선은 단박에 600개의 매수주문을 넣었다.
주문을 마치자 누군가 손으로 이명선의 코와 입을 꽉 틀어막는 느낌마저 들었다.
“후.”
장 시작 15초를 남겼을 때였다.
갑자기 매도 주문이 700개가 들어왔다.
장 시작 동시호가에, 그것도 15초를 남기고 이런 주문을 넣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타다닥. 탁!
그녀가 급하게 1,000 계약의 매수 주문을 넣고 엔터키를 치기 무섭게, 화면이 툭 튀는 것처럼 숫자가 움직이더니 장이 시작되었다.
‘됐어!’
이명선은 눈을 독하게 떴다.
월요일 한국의 코스피 지수 선물의 동시호가는 315.60이었다.
“회장님. 지켜봐 주세요.”
이명선은 키패드에 손을 올린 채 눈도 껌벅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