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24화 (124/315)

# 124

124. 은혜고 원수고 따따블로 (2)

일요일에 지경 본사의 그룹발전본부는 평일과 다름없이 직원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유진교 본부장이 세 명의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

소식을 들은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한 명, 두 명씩 출근했는데 천중명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 본부장님. 점심 인원에 나를 포함시키세요.

이 한 마디가 워낙 컸다.

느닷없이 비서실 직원들이 달려왔고, 곽대출, 주인영을 포함한 그룹발전본부 전 직원이 출근하면서 일요일이 평일 분위기로 바뀌었다.

사업 계획서만 두 개다.

어설프게나 만들 수 있나?

그룹발전본부가 회장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규모마저 엄청난 사업 계획서였다.

청정원료인 블루크루드와 LTE급 와이파이 무료 공급.

두 가지 사업의 수익구조, 투자금, 이익회수 기간, 예상 이익, 부가 수익을 추정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어설프게 발표했다가는 설익은 계획으로 주가만 조작했다며 언론에 집중포화를 맞아야 한다.

게다가 직원을 함부로 대하던 지경전자의 회장과 사장단, 임원이 한순간에 날아간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엄청난 사업계획을 급하게 준비한다는 것이 천중명의 지시라는 사실을 짐작 못 하는 발전본부 직원은 없다.

천중명과 통화를 마친 유진교는 굳은 얼굴로 휴대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 본부장님. 김준후입니다.

“통화 괜찮나?”

- 주말을 망칠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확실히 김준후는 미국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대화에 여유가 있었다.

“다음 주 계획에 관해 의논하려고 전화했어.”

유진교는 천중명의 계획을 제법 상세하게 김준후에게 알려주었다.

- 회장님이 금융계 출신입니까? 아니면 그쪽을 전공했다거나?

“그렇지는 않아.”

-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기는 한데, 그 정도 화력이면….

“결과를 어떻게 보나?”

유진교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던진 질문에도 답은 바로 건너오지 않았다.

긴장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홍콩물고기 황채산은 이번에 중국 삼합회와 일본 야쿠자의 자금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아마 못 견딜 겁니다.

“못 견딘다는 말의 의미가 내가 생각하는 건가?”

- 무얼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나쁠 겁니다.

유진교가 무거운 얼굴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였다.

- 제 쪽에서 선물을 매입하려고 준비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가 나설 일은 없겠는데 하나만 하겠습니다.

“뭔가?”

- 5조 원의 주문이 어느 곳을 통해서 나옵니까? 기관 이름 말씀입니다.

“남부증권이라고 들었네.”

- 그렇다면 그리로 제가 협조공문을 보내겠습니다. 선물을 한국에서 매입하고 싶다. 우리의 펀드가 한국의 금융권에 신고하기에는 만기까지 시간이 부족하다. 그 외에 금융감독원에도 같은 내용을 공문으로 보내겠습니다.

“문제는 없나?”

연필을 든 유진교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 첫 번째로 남부증권이 드러나고, 다음으로 제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 외에 주문 내용을 상대방도 알게 되는데 그건 남부증권을 통해서도 새나갈 테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파생상품에는 좀 약해서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못 알아듣는 부분을 나중에 파악할 정도니까. 이번 일에 승산이 있나?”

유진교의 질문이 뜻밖이라는 것처럼 김준후의 가벼운 웃음이 넘어왔다.

-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이익이냐, 손해냐, 나머지는 전문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홍콩물고기가 대항하지 못할 정도로 회장님이 준비한 계획의 파급력이 대단한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군.”

- 만약 일반 투자자들까지 가세한다면 홍콩물고기는 절대 이 수준에 대항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한국을 노리는 대규모 자본에게 지경그룹이 있다는 좋은 교훈을 알려주는 단점도 있습니다.

메모를 하느라 유진교의 대꾸가 늦었다.

- 저는 저대로 이곳에서 상황을 체크할 테니 변동사항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알았네. 또 연락하지.”

유진교는 통화를 마쳤다.

**

이명선은 머리에 책을 욱여넣는 느낌으로 공부했다.

진즉에 이런 집중력으로 공부했다면 아마 지금쯤 판검사가 되고 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김순례가 출근한 오전이었다.

진한 커피를 앞에 두고 이론을 파고 있는 이명선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모르는 번호라 고개를 갸웃했던 이명선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명선 씨?

젊은 남자의 음성이었다.

“네. 그런데 누구세요?”

- 지경그룹 천중명입니다.

벌떡! 콰다당!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책상 의자 대신 사용하던 식탁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 여보세요? 괜찮아요?

“아, 네! 회장님! 저는 아무 일 없습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회장님! 인사드리지 못했는데! 감사하단 말씀을 못 드렸는데 그건 바쁘실까 봐….”

이명선은 당황해서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 그랬군요. 바쁘니까 본론만 이야기합니다. 내일부터 목요일까지 박승양 회장이 1조 원씩, 총 4조 원을 더 예치할 겁니다.

이명선은 마른침만 삼켰지 대꾸조차 꺼내지 못했다.

- 메모 가능합니까?

“네! 회장님!”

상체를 책상으로 구부린 이명선이 공부하느라 두었던 연필을 집어 들었다.

- 내일 장이 시작하면 선물지수 315.50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매도 주문 나오는 모든 물량을 매수하세요.

“콜 포지션입니까, 회장님?”

- 그렇죠.

이명선의 질문에 천중명이 간단하게 답했다.

- 선물 한 계약당 콜 옵션 0.03, 0.05, 0.09, 이렇게 세 포지션에서 두 계약씩 매수, 다시 콜 옵션 0.10, 0.15, 0.20, 이렇게 두 계약씩 매수하세요.

“예, 회장님.”

- 숫자 입력을 잘못해서 곤란한 상황이 실제로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주문이 나가면 우리 포지션을 다들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주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마세요.

“절대로 그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회장님.”

- 주문은 70개, 80개, 100개, 이런 식으로 매번 바꿔서 내세요. 그리고 매도 물량이 200개 나오면 우리는 매수 250개로 시원하게 밀고 올라가세요.

“네, 회장님.”

이명선이 각오를 단단히 세우며 답을 한 다음이었다.

-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실수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감추려 하지 말고 바로 보고해 주세요. 이 번호가 내 직통 번호니까 곤란한 일이나 부당한 지시를 받으면 바로 연락하면 됩니다.

“네, 회장님.”

통화가 끝날 것을 알게 되자 이명선의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후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5조 원의 싸움에 참여했고, 가장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명선 본인이란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 잘 부탁합니다.

“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심지어 이명선은 그토록 중간 간부들을 보며 흉보던 그 모습 그대로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책상을 향해 고개까지 숙였다.

통화가 끝났다.

“하아.”

그제야 이명선은 자신의 손이 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관이 아닌 개인은 반드시 주식을 사야 팔 수 있다.

그러나 선물은 누구나 먼저 팔 수 있다.

315.50의 포지션을 놓고 보자.

누군가 선물지수가 내려갈 거라 예상해서 그 포지션에 1계약을 매도했다고 하면 한 틱 내려갈 때마다 2만5천 원을 먹는다.

반대로 이게 올라가면 2만5천 원 손실이고.

별거 아닌 거 같다.

그런데 하루 등락폭이 최소 60틱에서 심한 경우에는 200틱을 오르내릴 때도 있다.

1계약으로 150만 원에서 500만 원을 먹는데?

이명선은 노트를 펼쳤다.

내일 박승양 회장이 1조 원을 더 넣는다고 들었으니까, 하루 선물거래량을 감안하면 월요일에 최소 1조 원 이상의 선물을 매수하게 될 게 확실했다.

4천 주문이면 300억, 4만 주문이면 3천억이 필요한데?

이명선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315.50을 지키라고 했으니까 적어도 40만 계약을 매수할 테고, 그러면 1조2천억이 들어간다.

한 틱 움직이면?

“후우-.”

이명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틱 움직일 때마다 10억의 이익이나 손실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이명선은 계산기를 들어서 숫자를 입력했다.

“세상에…!”

1포인트만 움직여도 200억의 이익이나 손실이 나온다.

간단하게 말해 평범한 하루가 지날 때 1천억에서 2천억까지 손실이나 수익이 발생하는 싸움이었다.

이게 만기일이 다가오면 미쳐 날뛴다.

오죽하면 네 마녀가 심술을 부리는 날이라고 이름까지 붙였겠나.

이런 주문을 초짜인 이명선이 넣는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명선은 마우스를 움직여 주문 프로그램을 노트북 화면에 올렸다.

숫자만 따로 있는 키패드야 이미 연결해 두었다.

그런 뒤에 이명선은 빠르게 숫자를 입력해 보았다.

수습 기간에 질리도록 했던 연습이 이렇게 감사하고 고마울 줄은 몰랐다.

“해낼 거야! 회장님께 도움될 거야!”

책상에 제대로 앉으려던 이명선은 의자가 아직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

그룹발전본부을 방문하기 전에 집무실에 들렀던 천중명은 비서실 직원을 보며 픽 웃었다.

“어떻게 나왔어?”

“회장님께서 출근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언젠가 미숫가루에 얽힌 사연을 알려주었던 30대 중반의 여직원이 밝은 얼굴로 답을 했다.

“굳이 이럴 필요 없는데?”

천중명의 책상에 커피를 놓아준 여직원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똑바로 섰다.

“회장님. 지경전자 조승필 회장님과 임원들을 해임하신 뒤로 비서실과 부속실로 손 편지가 꽤 들어왔습니다.”

“편지?”

책상에서 고개를 든 천중명을 향해 여직원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직원들을 위해 그런 결단을 내리실 줄 몰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오늘 출근한 발전본부 직원 대부분은 출근 연락이 없었는데도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그야 본부장이나 내 눈치가 보였을 수도 있지.”

“아닙니다. 회장님. 다들 같은 마음입니다. 회장님께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자 비서실 여직원이 상체를 공손하게 숙였다.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지닌 자부심을 회장님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인사를 마친 여직원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조금씩 이뤄지는 것 같다.

꼴통회장이 되는 길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었던 직원이 행복한 지경그룹의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홍콩물고기가 고마운데?

천중명은 픽 웃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

작은 생수병을 들어 물을 마신 황채산은 벨이 울리는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황 사장. 내 전화를 왜 안 받습니까?

“지금 받고 있잖습니까?”

- 이런? 신경이 날카로우시군. 그거야 이해하지요. 그래,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황채산은 휴대전화기에 들리지 않도록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다른 네 명은 우리가 모두 감시하고 있어요. 황 사장이야 체면을 생각해서 애들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월요일부터는 상황이 달라요. 알지요? 우리 방식?

“알고 있습니다.”

- 우리 돈 2조가 들어갔어요. 잘해줄 거라 믿어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황채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런 뒤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세계 금융권의 작은 전쟁터, 홍콩이었다.

이곳에서 황채산은 한국의 주식과 선물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섰다.

“병신들.”

황채산은 느닷없이 거친 욕을 쏟아냈다.

삼합회니 야쿠자니, 파생상품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돈 처먹을 궁리만 하는 꼴이 가소로워서였다.

“내 닉네임이 왜 홍콩물고기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그의 증권사 계좌 개설명이 ‘연어(Salmon)’라 홍콩물고기로 불린다는 것도 모르는 깡패들이 파생계좌에 돈을 넣고는 사람 목을 조른다.

한국의 파생시장이 시작된 직후에 그는 장흥낙지와 처절한 싸움 끝에 시장을 장악했다.

초창기였다.

아직 파생상품 시장의 규모가 작은 한국에 그는 하루 3천억에서 5천억에 이르는 자금을 쏟아 부어서 마감 직전에 장을 뒤집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유명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금융 기관의 펀드매니저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고, 친분이 있는 이들은 오늘 장을 어떻게 마감할지 한 번만 알려달라고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파생상품만이 아니었다.

코스피 지수를 움직이는 이름 있는 회사들의 주가를 만지는 작업도 1년에 수차례씩 맡는다.

한마디만 하자.

한국에서 주인 없는 주식은 절대 오르지 않는다.

하다못해 시시껄렁한 코스닥 회사도 작전세력이 붙어야 오른다는 뜻이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런 큰 회사들 역시 황채산이 관리해 줘야 주가가 오른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에게 돈만 많은 재벌집 개망나니 따위?

배고픈 연어 앞에 나타난 살찐 피라미와 마찬가지였다.

이번 계획이 성공하면 황채산은 개인적으로 6조 원에 달하는 돈을 먹고, 조승필을 통해 조철행 장관의 협조를 얻는다.

금융 선진화 방안?

엿이나 처먹어라.

연금부터 보험사, 투신사, 증권사가 개인투자자들을 빨아먹기 급하고 뒷돈 챙기기 바쁜 한국에서 그런 게 이뤄진다고?

황채산은 야비하게 웃은 뒤에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이제 나흘 남았다.

개망나니로 살다가 느닷없이 정의감에 사로잡혀 날뛰던 철부지 재벌 회장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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