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23화 (123/315)

# 123

123. 은혜고 원수고 따따블로 (1)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천상기는 경찰서를 변호사와 함께 나섰다.

이렇게 하면 누구도 그를 건드리기 어렵다고 판단해서였다.

유치장에 있느라 꾀죄죄한 몰골의 천상기가 주변을 두리번거린 직후였다.

휠체어를 미는 변호사와 휠체어에 앉은 그의 앞으로 캐주얼한 정장 차림의 남자 네 명이 다가왔다.

자각. 자가닥. 자각.

이제는 제법 걸음이 편안해 보였는데도 윤만석이 걸을 때면 이상하게 뼈 부딪치는 소리가 효과음처럼 울려 나왔다.

“뭐야?”

천상기는 거칠게 윤만석의 한쪽 눈을 올려다보았다.

“용인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천상기는 윤만석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대원을 살핀 뒤에 왼손을 들어 손목을 까딱였다.

“천상기 회장님의 변호사입니다. 앞을 막거나 동행을 계속 요구하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변호인의 말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윤만석은 천상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천상기 회장님. 운이 좋았습니다. 총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라면….”

말을 잠시 중단한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짧게 저었다.

“마음을 바꾸셔서 용인으로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거부하면 윤만석이 과거에 어떤 일들을 했는지 깨닫게 될 겁니다.”

움직이지 않는 가짜 눈의 옆에서 윤만석의 진짜 눈이 변호사를 힐끔 본 뒤에 다시 내려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인입니까? 아니면 여기에서 변호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말을 마친 윤만석의 외눈이 섬뜩하기 이를 데 없이 빛나고 있었다.

“총수님과 먼저 통화하겠다.”

“용인에 가서 하십시오.”

윤만석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태도가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여기에서 고집을 피우면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고약한 표정으로 버티던 천상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용인으로 가.”

“현명한 판단입니다.”

윤만석이 고갯짓을 하자 대원 한 명이 움직여 휠체어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나한테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해!”

고개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천상기가 지른 고함이었다.

“연락이 안 되면 바로 신고하고!”

경찰서 마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정도로 고함을 지른 천상기를 대원 셋이 승합차에 넣었다.

**

오지은은 막말로 모든 것을 잃었다.

늘 그녀를 감싸주던 오상구는 깔끔하게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이리저리 이용하려던 서수미조차 살인모의 혐의로 구치소로 넘어갔다.

“이건 아냐.”

구겨진 명품 바지와 셔츠 차림의 오지은은 제대로 씻지 못해 추레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뒷자리에 올랐다.

부자 망해도 3년 간다는데 아무렴 오상구가 구속되었다고 집에 운전기사 두 명 없겠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토요일이잖아! 내가 다니는 병원으로 먼저 가.”

중년의 운전기사에게 반말을 던진 오지은이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상해. 이건 아니잖아. 그날 뭔가 있었어.”

“예?”

“운전이나 해!”

뾰족하게 쏘아붙인 오지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알저축은행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듣도 보도 못한 소설의 한 구절을 떠들어서 넘어가긴 했지만, 확실히 그날 천중명은 이상했다.

‘성창욱이라고 했었지?’

속지 말라고 했었다.

몸에 있는 점까지 알고 있었다.

그 성창욱의 말과 눈빛이 이제야 오지은의 본능을 자꾸만 자극했다.

그래!

그날부터야!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 게!

전혀 다른 사람 같잖아!

오지은은 경찰서에서 돌려받은 휴대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불만 가득한 천상기의 답이 있었다.

“오빠, 저 오지은이요. 풀려나셨다는 말 듣고 전화했어요.”

- 내가 지금 통화할 상황이 아닌데?

“잠깐이면 돼요. 듣기만 하세요.”

오지은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성창욱이라고 있거든요. 그 인간을 삼성동 천중명의 집에서 봤거든요. 자기가 진짜 천중명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사준 옷, 몸에 있는 점, 그날 정했던 약속까지를 다 알고 있었거든요.”

천상기는 답이 없었다.

“오빠. 성창욱을 파보세요. 죽었다고 해도 기록은 있을 거 아녜요? 필요하면 저도 나설게요.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 듣기만하라며.

투박한 천상기의 답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으니까 오후 7시에 전화해. 만약 그때 전화 안 받으면 8시에 다시 하고, 그때도 안 받으면 경찰에 실종 신고하면 돼.

뭔가 이상하지만 오지은은 “예, 오빠.”하고 답을 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독한 눈으로 앞을 노려보던 오지은은 시간을 힐끔 확인했다.

아직 저녁 7시까지는 여유 있다.

지금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기절하듯이 자고 나면 기분도 훨씬 좋아질 일이었다.

‘천중명, 당신 내가 부숴 버릴 거야.’

오지은은 언젠가 드라마를 보다가 가슴에 와 닿아서 써먹어 보고 싶던 바로 그 대사를 떠올렸다.

**

곽대출은 주인영의 작은 집 거실에서 통장을 다시 확인했다.

급여가 들어왔다. 그것도 첫 달인데 이리저리 떼고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 찍혀 있었다.

그것만도 가슴이 벅찰 지경인데 무려 3억이라는 큰돈이 또 천중명의 이름으로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오늘 오전에 집을 나설 때까지 천중명은 아무 말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할 만큼 했으니 이 정도 받고 그만 사라지라는 뜻인가?

곽대출은 픽 웃으면서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사람이 말이지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다.

아무렴, 세상 사람 다 바뀌어도 천중명이 변하겠냔 말이다.

번호를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뭐야? 오늘 데이트 아니었냐?

반가운 천중명의 음성이 단박에 넘어왔다.

“통화 편하셔? 불편하셔?”

- 편해.

웃음 묻은 천중명의 답이 있었다.

“3억은 뭐야, 회장님아?”

- 너, 주 과장 집에 기웃대지 말고 작더라도 집을 하나 장만해. 모자란 건 대출 받고. 곽대출.

“아, 이 씨! 고맙게!”

곽대출의 대꾸에 천중명 특유의 나직한 웃음이 넘어왔다.

- 다른 생각 말고 주말 푹 쉬어. 그리고 월요일부터 열심히 달려.

“알았어, 회장님아. 그런데 나 없이 되겠어?”

- 쓸데없는 소리 할래?

“이 돈은 내가 열심히 모아서 갚을게, 회장님.”

- 끊어.

통화가 끝났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주인영이 들어왔다.

“어딜 다녀와?”

“봉지 커피가 떨어져서 그거 사러 다녀왔어요.”

“그걸 왜 주 과장이 가? 내가 가면 되지.”

“금방인데요, 뭐.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방으로 향하는 주인영을 보던 곽대출이 시선을 떨구고서 통장을 바라보았다.

천중명이 알고 있었을까? 누가 말했을 리는 없는데?

아무튼, 주인영의 부모님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곽대출은 히죽 웃었다.

갚아야지.

은혜고 원수고 따따블로.

곽대출은 천중명을 떠올리며 웃음기를 지웠다.

**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계단에서 유진교가 올라왔다.

“장 비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전에 총수님께서 장 비서와 함께 움직일 눈치 빠른 여직원을 말씀하셔서요.”

“적당한 직원이 있던가요?”

“내일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뭐 하세요? 앉으세요.”

천중명이 권하고 나서야 유진교는 자리에 앉았다.

“월요일부터 박승양 회장의 계좌를 통해 선물 주문을 넣을 생각입니다. 목표 지수는 315.50입니다. 그곳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자금을 계속 투입할 겁니다.”

“315.50포인트면 3천만 원에 4계약 정도입니다. 외국인이 하방으로 계속 밀어붙이면 자금이 빠듯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국내 기관까지 동조하면 정말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레버리지가 워낙 크니까 각오는 해야죠. 선물 한 계약당 옵션 0.0대 셋, 0.10대 셋, 이렇게 여섯 개씩 콜로 포지션을 또 잡을 테니까 그 정도면 알아듣겠죠.”

천중명의 계획을 들은 다음이었다.

“회장님. 그렇게 선물 포지션만 잡아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진교가 안타까운 얼굴로 조언을 건넸다.

“목요일 오전에 승부수를 던질 생각입니다. 황채산이 5조를 계획하고도 매각신고를 1조 원만 했다면 분명 신고하지 않은 4조 원의 주식은 외부에서 바로 주문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진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천중명은 상황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우선 본부장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목요일 오전에 블루크루드의 생산 계획과 LTE급 와이파이 무료 개방의 계획을 발표하고 싶으니까요.”

유진교가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계산에 빠진 눈으로 잠시 시간을 끌었다.

“가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발표한다고 해서 5조 원에 해당하는 주식 물량을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장 종료 직전에 나오는 물량입니다.”

유진교의 설명을 들은 천중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목요일 오전에 사업계획과 동시에 10조 원의 주식을 매수하겠다고 발표하고 실제로 오전부터 10조 원을 매수 주문할 겁니다.”

계획을 전한 천중명은 처음으로 유진교의 놀란 얼굴을 보았다.

“명분은 주식회사 지경의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주식을 매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있습니까?”

“지경전자를 상장할 계획입니다.”

“하아.”

유진교의 놀란 얼굴 하나로는 서운하다는 것처럼 그의 탄식도 있었다.

“그것 역시 목요일에 발표하실 예정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경전자 상장 계획만으로도 지경 계열사의 주가가 뛸 판인데, 10조 원의 주식 매입,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사업 계획 두 가지가 곁들여진다면?

유진교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표시 내지 않으려 표정을 더 눌렀다.

“이 정도면 아마 장 중에 선물 지수를 400대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장 마감 직전에 홍콩물고기가 5조 원을 매각하더라도 아예 시장에 충격이 없도록 만드실 계획이군요.”

“그것도 있고, 외국인 세력이 기회를 놓치기 아까워서 주식을 내놓지 못하게 하려는 점도 계산했습니다.”

유진교는 “하아.” 하며 결국 속에 뭉친 놀라움을 쏟아내고 말았다.

홍콩물고기와 함께 움직이는 작전세력이라면 이 정도 물량에 절대 대항하지 못할 테고, 외국 기관은 수익을 앞에 두고 두 가지 손실을 모두 감당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계획을 세웠지?

방법도 놀랍고, 투입하는 금액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태연한 천중명을 보며 유진교는 다시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셔야 했다.

“회장님. 선물지수 315에 콜을 매수했는데 지수 포인트가 400으로 마감하면 수익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건 진짜로 유진교가 계산이 서지 않아서 건넨 질문이었다.

“글쎄요. 오전에 발표하는 거니까 대강 어림잡으면 선물에서는 대략 3배, 옵션에서는 아마 20배쯤 수익이 나지 않을까 싶은데요. 만약 우리가 장 마감 직전에 움직이면 선물에서는 30배, 옵션에서는 300배쯤 수익이 날 테고요.”

“상상이 안 되는 수준입니다.”

유진교의 반응을 본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본부장님이 목요일 오전에 발표할 자료를 만들어주신다고 했으니 남은 숙제는 하나입니다. 박승양 회장의 계좌로 미리 포지션을 설정한 것이 내부자 거래가 되느냐, 아니냐.”

“불행하지만 내부자 거래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유진교의 답에 천중명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송우근 금감원 부원장보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에게 공을 얹어준다면 승진이 목표인 사람에게 이만한 일도 없을 것 같거든요.”

“이 정도 규모면 부원장보의 능력으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유진교가 퍼뜩 생각난 것처럼 시선을 들었다.

“미국에 있는 김준후 사장에게 이 내용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이 계획이 밖으로 나가서 홍콩물고기에게 먼저 들어가면 끝입니다.”

“고민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준후라면 내부자 거래에 대한 대안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투입되는 금액만 15조입니다. 수익은 얼마가 될지 모르고요. 사람이 충분히 변할 수 있는 돈이란 것만 기억하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가 굵직한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을 때였다.

계단이 울리더니 장만섭이 올라왔다.

“총수님께서 과일을 드시겠냐고 말씀드리랍니다.”

우렁우렁한 음성에 힘이 담긴 것을 들은 천중명이 먼저 픽 웃었다.

“내려가야지. 안 내려가세요?”

“총수님께서 오붓한 걸 원하실 테니 저는 잠시 여기 있겠습니다.”

“그럼 먼저 내려가지요.”

몸을 일으킨 천중명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간 다음이었다.

“정말 15조 원의 싸움을 앞두고 전혀 긴장되지 않는 건가?”

유진교의 혼잣말이 평창동 2층 거실을 나직하게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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