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 마음고생 없이 내가 데려가야지 (2)
박승양은 한숨도 못 잤다.
주말이면 늘 나가는 골프 약속을 두고서도 그는 지난밤을 꼬박 새운 채 침실에서 나왔다.
침대에 누워서 세웠다가 허문 빌딩이 대략 70채쯤 될 테고, 혼자서 샀다가 되판 코스닥 회사만 50개가 넘는다.
어쩌려고 그러지?
이제 망하는 건 아예 생각에서 털어낸 수준이었다.
9시에 있는 티업을 앞두고 샤워를 마친 박승양이 인상을 찌푸린 채 식탁에 앉았을 때였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르.
그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토요일에 뭔 전화가?
휴대전화기를 들었던 박승양은 화들짝 놀라서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천 회장. 토요일 오전에 어쩐 일입니까?”
- 계획을 알려드릴까 해서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남은 4조 원을 매일 1조 원씩 남부증권에 넣어주세요. 가능하십니까?
“그야 말해 뭐하겠소? 그래? 방법이 섰소? 자신 있어요?”
- 현금보관증 하나 안 받고 믿어주셨는데 성공해야죠. 주문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나중에 확인할 테니까 남부증권 이명선 과장에게 직접 전하시면 어떻겠소? 선물, 옵션이라는 게 말 하나 잘못 되도 사고가 크니까.”
그의 부인이 희한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박승양이 두 손으로 휴대전화기를 든 채 통화하는 것을 처음 봐서 그렇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주문을 넣을 테니까 내용은 편할 때 확인하세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천 회장. 잊지 않고 전화 줘서 내가 고마워요! 고마워!”
- 그럼 주말 즐겁게 보내십시오.
“그럼! 이제 즐겁지요! 내 기분 좋게 공 칠 수 있으니까!”
통화를 마친 박승양은 위장약 광고에 나오는 중년 모델처럼 가슴에서부터 아래로 손을 쓸어내렸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아요?”
“알 거 없어! 얼른 밥이나 줘!”
“적당히 해요. 적당히.”
“가만있어 봐. 다음 주 목요일에 다 끝나.”
대꾸를 마친 박승양은 부인이 건네준 밥그릇에 숟가락을 깊게 찔러 넣었다.
어쩌면 토요일 오전에 전화를 다 주지?
봐봐! 젊은 회장이라고 가볍게 보면 안 된다니까.
게다가 나를 이렇게 대우해주잖아!
그 눈은 또 어떻고?
망할 리도 없을 뿐더러 망해도 나를 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입 안 가득 밥을 넣은 채 우물거리는 박승양을 그의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국물도, 반찬도 없이 밥만 씹고 있어서였다.
**
윤세계가 운영하는 삼중호텔의 11층은 스위트룸 투숙객 이상만 사용하는 VIP 라운지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장충동 사거리가 보이고, 왼편으로는 을지로를 넘어가는 도로가 보이는 라운지에서 윤세계는 그녀의 삼촌과 함께 뷔페식 조식을 함께했다.
“밥은 잘 먹었고, 괜히 아침부터 이럴 리는 없으니 이제 원하는 걸 말해야지?”
커피를 앞에 둔 그녀의 삼촌 윤병지가 넉넉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삼촌.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 어때요?”
“오호? 밥값이 그거야?”
대꾸를 던진 윤병지는 먼저 고개를 갸웃했다.
“독불장군이란 평가가 있던데? 이번에 전자에서 밀려난 조승필 회장 쪽에서 반격도 준비하는 거 같고?”
“그래서 말인데요. 삼촌. 조 회장님과 삼촌이 친하시잖아요? 지경그룹이 답답할 때 제가 나서도 될까요?”
고개를 삐뚜름하게 비튼 윤병지가 윤세계를 향해 눈을 좁혔다.
“그 사람을 잡을 생각이냐? 듣기로는 여자가 있던데?”
“흥. 망가진 집안 딸이 문제겠어요?”
“그건 그렇지. 그깟 망가진 집안 딸이야 뭐, 못 본척하다가 나중에 적당히 쥐어 줘서 내치면 그만이지.”
윤병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천 회장과 결혼하면 그룹의 실권도 쥐겠고.”
“그렇죠? 그래서 다음 주에 허선영을 한번 만나볼 생각이에요.”
“그 여자 이름이 허선영이었냐? 아! 허세직 의원 딸이니까.”
“예.”
윤병지가 입술을 한쪽으로 몰아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승필 회장을 만나보마. 대신 네가 그의 체면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해줘야지. 전자의 회장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 정도 말이다. 그래야 조철행 장관이 우리 쪽에 힘을 실어주겠지.”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윤세계의 답을 들은 윤병지가 “흠.” 하면서 숨을 뱉어냈다.
“한번 봤는데 이럴 정도로 천 회장이 어지간히 괜찮았던 모양이지? 어지간한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았잖아?”
“지경그룹이잖아요. 생긴 것도 나쁘지 않은 데다 능력도 있어 보였어요. 고지식한 게 좀 걸리는데 그거야 내가 알아서 녹여야죠.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흐하하하.”
윤세계의 표현이 재미있었는지 윤병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다.”
그런 뒤에 그는 답과 함께 여운이 묻은 숨을 내쉬었다.
“허세직 의원은 나도 만나볼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말해.”
“일단 제가 허선영이를 만나보고요.”
“그래. 그럼 그만 일어날까?”
답을 건넨 윤병지가 몸을 일으켰고, 윤세계가 뒤따라 의자에서 일어섰다.
**
방은경은 코리아클럽에서 보았던 부드러운 웃음 따위 완전히 지운 얼굴로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괘씸한 년.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깐 것도 모자라서 받아먹은 돈을 천 회장과 직접 해결하려고 들어? 소개한 나를 빼고?
이런 소문이 돌면 누가 방은경에게 소개를 받겠다고 나서겠느냔 말이다.
이년이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파랗게 오른 독을 꿀꺽 삼킨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저 안쪽 테이블에서 이하연이 엉거주춤 일어나 까딱 고개를 숙이고는 또 먼저 자리에 앉았다.
챙이 넓은 모자에 알이 큰 선글라스를 낀 그녀 앞에 앉은 방은경은 백을 옆자리에 놓았다.
“선생님이 어쩐 일이세요?”
이하연의 질문이 끝날 때 직원이 다가왔다.
“커피 주세요.”
오래 묵은 연기자답게 부드럽게 주문을 마친 방은경이 가면을 바꿔 쓴 것처럼 홱 변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너 천중명 회장님께 전화했었어?”
“그걸 왜 선생님이 참견하세요?”
이하연의 대꾸를 들은 방은경이 살벌한 미소를 그려냈다.
“밑구멍으로 돈을 벌어도 이 바닥의 룰이 있어. 어디 혼자 처먹은 거로 배짱을 부려? 네년이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소문나면 앞으로 어떤 분이 내게 사람을 소개받겠니?”
상체를 살짝 기울인 방은경이 독한 말을 쏟아낼 때 하필이면 직원이 다가와 커피를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직원이 가길 기다렸다.
직원이 좀 멀찍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천 회장님은 널 만날 생각이 없어. 그러니 가진 주식 시장에 내다 팔아. 그리고 너는 이거로 끝이야. 어디 한 번 멋대로 해 봐.”
“선생님? 천봉서 회장님은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거잖아요?”
“이런, 개년이 뚫린 주둥이라고 어디서 함부로!”
방은경은 나직한 음성으로 거친 욕을 잘도 뱉어냈다.
“내가 어떻게 이 바닥에서 살아남았는지 내일 알게 될 테니까 각오해, 이년아. 너처럼 한몫 잡겠다고 설치다가 사라진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방은경은 눈빛만으로도 이하연을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독기를 펄펄 풍기고 있었다.
“내가 그런 년들 못 죽였으면 아직 이렇게 있겠어? 그래도 난 네년이 주연급으로 클 줄 알았더니 이게 아주 개 쌍년이야. 너, 이년아. 전에 일본에 갔던 거 기사에 나올 테니까 그거 막을 준비나 하고 있어.”
막말을 시원시원하게 던진 방은경이 픽 웃고는 백을 들었다.
“잘 먹고 잘살아. 그리고 월요일에 연예란 기사하고, 인터넷 잘 살펴. 네년이 몸뚱이 팔아먹는 그림 예쁘게 올라올 테니까. 제목이 원정녀라고 하든가?”
방은경이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원하시는 게 뭐예요?”
이하연이 한풀 꺾인, 그러나 아직 독기가 사라지지 않은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천봉서 회장님께 받은 주식, 그거 내가 해결할 거니까 월요일에 얌전히 내게 가져와.”
이하연은 입을 다문 채 대꾸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하연을 보며 방은경은 얼음조각이 푸서석 떨어지는 표정으로 서늘하게 웃었다.
“주식 판 돈으로 미국에라도 가서 굴러먹어.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방송국 기웃거릴 생각 말아.”
서늘한 미소를 그대로 떠올린 채 방은경이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양보하면 대신 저 주연 한번 시켜주세요.”
이하연이 어금니로 씹듯이 말을 뱉어냈다.
“다른 회장님도 한 분 소개해 주시고요.”
방은경의 입술과 눈이 길게 늘어지며 아까와는 다른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주연 돼봐라. 너도 조소아처럼 하룻밤에 5억씩 버는 거야. 해외 촬영이라고 일주일 함께 다녀오면 35억이잖아? 그걸 봐야지?”
핸드백을 슬쩍 옆에 내려놓은 방은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식은 천 회장님께 넘기고 받은 현금 반으로 갈라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원래 네가 스폰 받는 거는 뭐든 내가 반 먹기로 하고 소개했던 거 기억하지?”
욕심을 채운 방은경이 입맛을 다시며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었다.
“너, 내일 시간 돼?”
“내일이요?”
“그래, 내일. 알리온 대표 데이비드 최를 만나.”
이하연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선글라스까지 내렸다.
“그분이 저를 만나시겠어요?”
이하연의 답을 들은 방은경이 같잖다는 듯 웃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대신 알지? 그날 데이비드 최를 제대로 녹여. 천봉서 회장 대했듯이. 그래서 다음 작품 주연 꿰차. 그런 다음에 몸값 높여서 회장님들 만나야지?”
“네, 선생님. 제발 자리만 만들어주세요. 월요일에 주식 반드시 넘길게요.”
공손해진 이하연을 보며 방은경은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
점심 약속이었다.
고풍스러운 저택인 삼청동의 이화각에 도착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안쪽 룸으로 들어섰다.
통상 한정식 집처럼 바닥에 앉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화각은 커다란 식탁에 고급스러운 의자로 되어 있었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주어서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천호득과 이은명, 그리고 뜻밖에도 휠체어를 붙잡은 유진교가 함께 들어왔다.
“일찍 왔어?”
“조금 전에 왔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에 천중명과 유진교, 이은명, 허선영이 자리에 앉았다.
“장 비서는요?”
“밖에 수행 비서들과 있어. 우리와 똑같이 준비해주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천중명의 질문에 이은명이 부드럽게 답한 다음이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유니폼 차림의 여자 종업원 두 명과 남자 종업원 한 명이 테이블에 엄청난 종류의 음식을 올려놓았다.
“총수님. 말씀하셨던 보리굴비입니다.”
그리고 직원은 마지막에 천중명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굴비를 한 마리씩 놓아주었다.
“나는 손질해 줘.”
“예, 총수님.”
천호득의 주문에 비닐장갑을 손에 낀 여자 종업원이 능숙한 솜씨로 굴비의 양쪽 살을 발라놓았다.
그녀가 어떻게 하겠냐는 투로 시선을 돌렸는데 천중명을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거절했다.
“들자.”
“예.”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어때?”
“좋네요.”
“그렇지?”
“예.”
천호득이 질문했고, 천중명이 답했다.
“검소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이런 곳도 다녀.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대우를 해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진교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천호득이 가르침을 주었고, 천중명이 그걸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식사 분위기는 잔잔했다.
그런데 어쩐지 최후의 만찬을 함께하는 듯한 뻑뻑한 느낌이 천중명을 찔러댔다.
뭔가 있는데?
천중명은 천호득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무엇보다 웃음이 달랐고, 눈가가 순간순간 굳었으며, 마지막으로 천중명을 향해 음식을 권하는 태도가 애잔했다.
유진교를 부른 것도 그렇다.
이런 자리에서 그를 가족처럼 생각하라는 의미는 아닌 느낌이었다.
그랬다면 유진교와 함께 윤만석을 불렀어야 맞다.
아무튼, 화기애애한 가운데 애매한 감정이 떠다니던 식사가 끝났다.
“나는 회장과 차를 마실 테니까 구경이라도 좀 해.”
물수건에 손을 닦은 천호득이 이은명에게 권유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제가 하죠.”
천중명은 유진교에게 말을 건네고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방을 나서자 수행비서, 운전직원과 함께 식사했던 장만섭이 나섰으나,
“괜찮으니까 좀 더 쉬고 있어.”
천중명은 그를 말린 채 휠체어를 밀었다.
천호득이 원한 곳은 이화각의 뒤뜰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에 있음직한 돌로 만든 담벼락, 파란 잔디, 그리고 기와지붕의 처마가 운치를 한껏 살려주는 아래에서 천호득, 천중명, 유진교 셋이서 차를 앞에 두었다.
“김준후라고 있어. 미국에 있는 그 친구에게 연락했다.”
천호득이 말을 꺼냈고,
“전에 한 명 남은 사람이 누구냐고 하셨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포드앤제이슨의 총괄사장으로 그쪽 금융계에서는 꽤 영향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유진교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황채산이 증권사 출신으로 작전세력과 결탁한 범법자라면, 김준후는 미국의 헤지펀드와 기관에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총수님께서 말씀하셔서 어제 통화했고, 내용을 파악한 뒤에 적당한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천중명은 잠자코 유진교의 설명을 들었다.
“왜 말이 없어?”
“뜻밖이어서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주름진 눈을 돌린 천호득이 뭔데 그러냐는 투로 시선을 던졌다.
“뭔데 말을 안 해? 본부장 때문에 그래?”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질문을 드려도 되는 건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기껏 말을 꺼내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천호득이 특유의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타박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제가 모르는 일이 더 있습니까?”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천호득이 너는 무슨 뜻인지 알겠냐는 투로 유진교를 보았다.
“평소랑 분명히 다르십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니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시선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에서 천호득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홍콩물고기든, 미국문어든, 상대할 방법은 정했습니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박승양 회장과 통화도 마쳤구요. 김준후란 분이 도와주면 좋겠지만, 그건 어떻든 제가 해결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해.”
“어디 멀리 여행 가세요? 왜 그렇게 한꺼번에 주시지 못해서 답답한 눈으로 저를 보십니까?”
마른침을 삼키느라 천호득의 목이 움직이는 것을 천중명은 확실하게 보았다.
“이번에 황채산과 다투는 게 싫으시면 여기에서 그만두겠습니다. 제가 한 행동들이 못마땅하셔서 그런 거면 전자의 조승필 회장과 임원들 해임 취소하겠습니다. 못마땅한 구석이 있으시면 꾸짖고 혼내셔야지, 왜 버리려고 하십니까?”
“누가 누굴 버린다고 그래?”
천호득의 음성이 우는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 그러고 계시잖아요.”
“그런 게 아냐.”
“아니면 뭡니까? 뭔데 말씀 못 하십니까?”
무언가를 또 삼킨 천호득이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지금 봤나? 머리가 컸다고 내게 대드는 거?”
“하실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천호득의 질문에 유진교는 뜻밖의 대꾸를 내놓았다.
“총수님은 어제부터 이상하셨습니다. 만약 회장님이 묻지 않았다면 저라도 분명 질문 드렸을 겁니다.”
“하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천호득은.
그가 시선을 떨구며 침묵하는 동안, 천중명과 유진교는 답을 줄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기다렸다.
거듭 숨을 내쉬었던 천호득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둘째 놈과 함께 죽으려고 했었다. 조승필이 움직일 테고, 그놈들이 분명 상기를 명분으로 앞세울 테니까. 이제 자식 먼저 보내는 것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회장이 곤란한 것도 싫어서.”
천호득의 말을 들은 천중명은 막혔던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허탈하게 웃었다.
“뭐가 웃겨?”
천호득이 단박에 타박을 던졌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오늘 형이 나오니까요?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습니까?”
천중명은 곧바로 달래는 것처럼 대꾸를 건넸다.
“네가 계속 곤란할 거잖아?”
“아버지가 안 계신 것만큼 곤란하겠어요?”
그리고 이어진 질문의 끝에서 말문이 막힌 것처럼 천호득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 왜 그렇게 약해지세요? 제가 못 미더우셔서 그러세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홍콩물고기 잡을 거구요. 지경전자 제대로 세울 거구요. 세상에서 가장 제대로 된 그룹 만들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 계시면 힘이 안 나요.”
“말은?”
믿기기나 한가?
시선을 떨군 천호득이 힐끔 눈을 들어 천중명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안 그러실 거죠?”
“알았어.”
“약속하세요.”
“알았다고!”
불뚝 튀어나온 천호득의 답을 들으며 천중명과 유진교가 비슷하게 웃었다.
“아효, 아버지 때문에 힘듭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천호득의 뒤로 움직여 어깨를 천천히 주물렀다.
“아파!”
“가만 계세요.”
“어디에다 대고?”
천호득을 보며 유진교가 느긋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그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홍콩물고기인가 하는 놈하고는 자신 있는 거냐?”
“안 그래도 본부장님과 의논할 생각이었거든요. 제대로 잡을 테니까 진짜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가? 흐헤헤헤헤. 그럼 그래야지. 그래야 지경그룹의 회장이지? 흐헤헤헤헤.”
참 기다렸던 천호득의 만족한 웃음이 이화각의 뒤뜰에 멀리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