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 마음고생 없이 내가 데려가야지 (1)
삼성동 빌라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조금 넘었다.
“고생들 했어. 퇴근해.”
“편히 쉬십시오.”
비서실 직원이 퇴근하는 것을 본 천중명은 빌라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불타는 금요일 밤이었다.
천중명이 마음만 먹으면 조소아 따위의 여자 배우 불러서 욕심을 채울 수 있고, 그런 게 아니어도 놀자고 마음먹으면 전담 수행 직원을 부르면 되는 금요일이었다.
띵동.
[7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집에 오길 잘한 거예요, 회장님.’하는 것처럼 벨과 층수를 알려주고는 문을 열었다.
천중명은 복도를 걸어 문으로 향했다.
삑삑삑삑삑삑삑삑. 띠루룩.
이 문을 열 때면 늘 고맙다.
허선영, 곽대출과 함께 지내는 것과 꼴통 회장이 되는 길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벌써 와요? 코리아클럽에 간 거 아니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간 천중명을 뜻밖에도 허선영이 맞아주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도 있었다.
“어떻게 벌써 왔어?”
“다들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오늘은 좀 일찍 마쳤어요. 오늘 월급 나오는 날이었잖아요? 혹시 몰라서 중명 씨 간식 만들고 있었는데….”
편안한 홈드레스를 입은 허선영이 커다란 눈가를 좁히며 웃었다. 그런 허선영에게 다가선 천중명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잠깐만 이렇게 있자.”
“오늘 많이 힘들었어요?”
“그냥.”
허선영의 온기와 등을 다독여주는 손길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보내며 지친 천중명을 위로해 주었다.
“우리 나갈까? 나가서 영화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좀 걷고.”
“그래도 돼요? 그럼 월급 받은 기념으로 내가 살게요.”
허선영의 눈에 담긴 반가움과 기쁨을 보며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참. 어머님이 전화하셨었어요. 내일 이화각에 가기로 했는데 저도 시간이 되냐고요.”
“시간 돼?”
“그럼요!”
“그래.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는 허선영을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저런 사람에게 적당한 보상을 어쩌고 하는 내기를 하자고?
그랬다가 따귀 맞으면 많이 아플 거다.
삼중호텔 대표 윤세계.
그나저나 월급이라?
얼마나 들어왔을까?
천중명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또 웃었다.
**
유진교를 보낸 천호득은 조명등을 배경 삼아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에 있었다.
“추워요.”
고개를 돌린 그의 옆에서 따뜻한 차를 내온 이은명이 새로 가져온 담요를 하나 더 천호득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요 며칠 계속 정원에 계시잖아요.”
“가진 걸 다 회장에게 준 날이야.”
이은명은 조용하게 천호득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선영이에게 전화했어요. 내일 함께 오겠대요.”
허선영을 떠올린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내 이은명이 통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중명이의 변한 모습이 두려우신 거예요?”
그런 뒤에 그녀는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건넸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 어어 하는 사이에 여기에 와 있으니까. 그런데 또 밉지가 않아. 회장을 보고 있으면 이래서 자식을 낳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떨리는 손을 돌려 잔을 든 천호득이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이 차는 저놈이 먼저 안 마신 건가?”
“아니요. 작은 잔에 따라서 먼저 건네줬어요.”
“에이!”
짜증을 쏟아내는 천호득을 이은명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장 비서를 볼 때마다 중명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좋던데요?”
“저놈이?”
“그렇잖아요. 교통사고 때도 장 비서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끔찍한데요. 저기요.”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이은명은 천호득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주방에서 음식 재료 준비하는 거 있잖아요. 그거 장 비서가 양념까지 전부 먹어보고서 들여오는 거 아세요?”
“양념을?”
천호득이 고개를 뺐다가 장만섭을 힐끔 본 뒤에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조명등의 바로 옆에서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장만섭은 여전히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늘을 빻은 것도, 고춧가루도, 심지어 설탕과 조미료까지 일일이 장 비서가 맛을 본 것만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럼 수육을 먹은 것도?”
“어제 말씀이세요? 네. 하여간 주방에서 만든 모든 음식을 장 비서가 다 먹어보거든요. 그러면서 김순례 씨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뭐라고 했는데?”
이야기에 홀딱 빠진 천호득이 궁금한 눈빛으로 이은명을 재촉했다.
“회장님이 믿고 맡겨주신 일이라고. 그래서 갈비뼈가 부러진 것보다 총수님을 지켜드리지 못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말을 하다가 고마움이 울컥 올라왔는지 이은명이 눈시울을 붉혔다.
“중명이가 총수님을 부탁한다고 믿어준 것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 수 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니까 이해해 달라고도 했대요.”
“저 곰딴지가 말이지?”
“총수님 일이라면 누구도 못 말려요. 거기에 중명이 실망시킬 수 없다고 한술 더 떠서 지금은 김순례 씨가 만드는 과정을 못 본 음식은 상에 내지도 못해요.”
천호득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중명이가 총수님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보이나 봐요. 그러니 믿어주세요.”
“믿지. 난 이미 그 녀석을 믿어. 그래서 마음이 더 무거워.”
이번엔 이은명이 궁금한 눈으로 천호득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오물이 가득한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는 것과 같아. 다들 오물이 묻은 사과를 팔아먹는데 혼자 깨끗한 사과를 팔겠다고 나서면 나머지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꼴이 되지.”
“난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천호득은 시선을 앞으로 돌린 채 잠시 입맛을 다셨다.
“장관의 사촌 동생을 해임했어. 저쪽이 제대로 뭉칠 계기를 주었지.”
혼잣말처럼 앞을 향해 말을 뱉어낸 천호득이 짧은 순간 눈빛을 번득였다.
“상기 놈을 죽여야 해.”
화들짝 놀란 이은명의 표정을 외면한 채 천호득은 아직 독기 가득한 눈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그랬어야 했던 건데 내가 회장에게 매달렸지. 내가 아프다고.”
이를 깨물었는지 그의 늘어진 볼이 씰룩했다.
“큰놈을 잃고, 몸뚱이가 이렇게 된 이후로는 자식을 잃는다는 게 편치 않네. 그런 독하고 못난 놈인데도. 그러니 어쩌겠나. 이런저런 마음고생 없이 내가 데려가야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윤 실장을 봐. 저렇게 가슴에 응어리진 채 사는 꼴이 어디 보기 좋던가.”
“쓸데없는 생각 마세요. 중명이가 커나가는 걸 지켜보셔야죠. 그래서 선영이랑 결혼 서두르라고 하신 거면 난 싫어요. 내일 이화각도 안 갈 거예요.”
천호득은 옅은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는 거지. 이 사람아. 내가 힘이 어디 있어? 그냥 해 본 소리야. 회장이 나 때문에 당하는 것이 답답해서.”
“정말인 거죠?”
“그럼. 당신을 두고 내가 어딜 가겠나. 재혼하는 꼴은 죽어서도 못 봐.”
떨리는 손으로 이은명의 손을 덮은 천호득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장만섭은 여전히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묵묵하게 서 있었다.
**
평창동에서 저녁을 해결한 유진교는 본사로 돌아가서 그의 사무실 책상에 앉았다. 그런 뒤에 그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오랜만입니다, 전무님.
응대는 빨랐고, 활기찼다.
“잘 지냈나? 그리고 지금은 본부장이 되었어.”
- 그렇군요, 본부장님. 저야 늘 같습니다. 요즘 많이 바쁠 것 같은데 전화 주실 여유도 있습니까?
“자네도 들었군. 그 일로 전화했어. 통화할 시간이 되나?”
- 출근 전입니다. 아직 10분쯤 여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진교는 의자를 창 쪽으로 돌린 뒤에 입을 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불이 켜진 건물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새로 모시는 회장님을 황채산이 노리고 있어.”
- 황채산이요? 홍콩물고기말씀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이런 싸움은 자네가 전문이라 도움을 청할까 하는데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해야 할 것 같아.”
- 말씀하십시오.
“총수님께선 자네가 행복하길 바라시지. 그러니 도움을 청하는 것과 별개로 판단은 온전히 자네에게 맡기라고 하셨어.”
말을 마친 유진교가 덤덤한 얼굴로 답을 기다릴 때였다.
- 이야! 우리 총수님 많이 변하셨네요.
과장된 상대의 반응이 넘어왔다.
- 황채산이가 새로운 회장님을 노리는 데 도울지 말지를 내 행복을 기준으로 결정해라, 그런 말씀인 거죠?
“그렇지.”
유진교의 답이 건너가고 나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전무님. 아니, 본부장님.
“말해. 편하게.”
- 제가 끼어들면 싸움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 한국은 현재 공공연한 타깃입니다. 브릭스까지 완전히 훑어낸 자금들이 다시 안정을 찾은 나라, 그중에서도 금융제도가 불완전한 나라들을 찾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 한국입니다.
유진교는 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직 5분쯤 남았다.
“그 이야기는 회장님도 하시더군. 이게 그 전초전일 거란 말씀도 하셨고.
- 후. 그런데도 홍콩물고기와 붙겠다는 겁니까? 지경그룹 정도 되면 가만히 그 위기를 기다렸다가 잘만 노리면 엄청나게 덩치를 키울 기회가 될 텐데요?
“자네가 상상하지 못했던 회장님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나. 미국에도 없고, 유럽에도 없는 그런 정의로운 회장님.”
가벼운 웃음이 넘어왔다.
- 오늘이 금요일입니다. 주말에 대강 알아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가 만기죠? 한국은?
“그렇지. 괜찮겠나? 이렇게 나서도?”
- 황채산이가 움직인다면서요? 총수님께서 염려하시고요. 그런 잡상인 따위에게 지경그룹이 당했다는 소리 들으면 잠 못 잡니다. 주말에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하네.”
- 제가 알아서 움직이고 특별한 상황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았어. 고생해”
통화를 마친 유진교는 ‘김준후’라는 이름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액정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회장님이 운이 좋은 건지, 이게 지경그룹의 재앙이 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는 거겠지.”
그러면서 그는 그답지 않은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
시네시티의 VIP석은 상영관 2층에 따로 소파처럼 편안하고 넓은 의자와 테이블을 갖추고 있었다.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그곳에 앉아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끝나는 로맨스 영화를 보았다.
허선영의 손을 잡은 채 영화를 보았고 끝나기 직전에 주인공 남녀가 키스하는 대목에서 허선영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큰 눈이 천중명을 향해 빛나는 것도, 그 눈에 행복한 미소가 담긴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시네시티를 나온 천중명과 허선영은 그 뒷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맥주를 주문했다.
좀 전에 보았던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과 허선영이 디자인을 맡으며 벌어진 일들, 고상득 상무의 과장된 행동과 말투에 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경화장품 강남스퀘어 매장 있잖아요.”
고상득 상무의 이야기를 하던 끝에 허선영은 지경화장품의 매장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상하게 클레임이 많아서 어쩌면 매장을 뺏길 수도 있나 봐요. 그곳 매니저분이 참 안됐어요.”
“선영 씨는 디자인 파트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
천중명의 질문에 허선영이 계면쩍게 웃었다.
“그때 보았던 매니저분이 디자인 칭찬을 해줘서 좋았거든요. 그래서 그날 봤던 영업이사님께 물어봤었어요.”
말을 건넨 허선영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맥주잔의 끝을 만졌다.
“손님에게 무릎 꿇기 직전의 매니저분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해요. 지경화장품 매장을 지키기 위해 무릎 앞쪽 치마를 잡을 때의 표정이요.”
“흠.”
“이야기 불편했으면 미안해요.”
천중명은 허선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냐. 그냥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부당한 요구가 답답해서 그런 거지. 내일 이화각에 갔다 오는 길에 슬쩍 들러볼까?”
“어디요? 강남스퀘어요?”
“그래.”
허선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표정이었다.
“멀리서 구경만 하고 오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도 미라클의 반응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거든.”
허선영을 다독인 천중명은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맥주를 넘겼는데 잃어버렸던 활력이 몸 안에 쌓이는 느낌이었다.
**
퇴근한 김순례는 딸 이명선의 책상에 놓인 노트북과 책을 본 뒤에 궁금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 나 공부해야 돼. 그러니까 이번 주말은 밥만 할게요.”
“무슨 공부? 왜? 증권사를 옮기려고? 회장님이 본사로 옮겨주셨는데 벌써 그러면….”
“아냐, 엄마.”
이명선은 김순례의 손을 잡고서 좁은 빌라의 소파에 앉았다.
“회장님께서 나 과장 만들어주셨어.”
그러면서 이명선은 박승양의 방문과 1조 원의 예치를 알려주었다.
김순례는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담당 직원은 엄마. 거래할 때마다 거래금액의 0.0003을 곱한 금액을 수수료로 받아. 1조 원을 거래하면 내가 3억을 받게 되는 거야.”
“세상에…. 그걸 정말 주는 거야?”
이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엄마. 우리 빚 갚고 나면 유학 가고 싶어. 그렇게 공부해서 회장님께 꼭 도움 되는 사람 되고 싶어, 엄마.”
딸의 각오를 들은 김순례가 왈칵 눈물을 쏟아냈고, 그걸 본 이명선이 또 눈가를 훔쳤다.
“엄마, 나 지점에서 구박받다가 밀려나기 직전에는 나쁜 생각도 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엄마, 우리 꼭 은혜 갚아야 돼.”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사람이지. 그나저나 이건 또 어떻게 갚아드리니? 어쩌면 좋아.”
딸을 부둥켜안은 김순례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