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 지경의 가치는 상호 존중입니다 (4)
방은경은 천중명의 자리로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을 데려왔다.
“회장님. 문광그룹 차남이신 송중대 전무님, 대송그룹 장녀이신 윤세계 삼중호텔 사장님, 그리고 자이로 텔레콤 박영철 부회장님이세요.”
“반갑습니다. 천중명입니다.”
세 사람과 돌아가며 인사한 천중명이 자리에 앉자 세 사람이 둘러싸듯 소파를 차지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1인용 소파가 네 개 있는 4인용 테이블이었다. 소개를 마친 방은경은 보조의자를 부탁해서 천중명과 윤세계의 사이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를 연신 날려댔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가실 경영자분들을 한 번에 모시니까 가슴이 다 설레요.”
방은경의 수다가 필요할 정도로 어색한 자리였다.
‘첩의 자식이 그룹의 회장이 되다니 운도 좋아.’
‘큰형 죽이고, 둘째 형 유치장에 넣은 독종.’
‘저 나이에 그룹을 차지했으니 부럽긴 하다. 난 언제 저렇게 되지?’
거기에 자리를 옮겨온 세 사람의 감정이 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서 기분도 별로였다.
“TV에서 활약상은 잘 봤어요. 언제 호텔에 한 번 들러주세요. 내가 근사한 저녁 내죠.”
제법 부티 나는 외모의 윤세계가 천중명을 바라보며 처음 입을 열었다. 특이하게 오른쪽 눈동자만 살짝 안으로 몰려 있어서 묘하게 색기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고맙습니다. 기회 되면 한번 들르죠.”
“그리고 우리는 모임이 따로 있어요. 나이 때가 비슷하니까 참석하시면 좋은 인연이 될 거예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천중명이 힐끔 윤세계를 다시 보았을 때였다.
“천 회장님. 우리 윤 대표님이 삼중호텔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후계자 구도가 달라지거든요. 도움 좀 주세요.”
방은경이 천박하게 나온 가슴을 천중명에게 기울이며 어울리지 않는 아양을 떨었다.
“어떻게 해야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가?”
답을 하는 대신 방은경은 시선을 윤세계에게 돌렸다.
“지경그룹의 행사를 맡겨주거나 그룹의 귀빈이 오실 때 이용해 주면 좋죠. 우리 호텔과 지경그룹이 협약을 맺어서 함께 협조해도 좋구요.”
“회장님. 그렇게 하시면 회장님께서 조용하게 호텔을 이용하고 싶으실 때 얼마든지 협조 받으실 수도 있지요. 그렇죠? 윤 대표님.”
윤세계가 그런 요구에는 굳이 답하기 싫다는 투로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 있는 세 분이 앞으로 그룹을 맡을 게 거의 확실하거든요. 그러니 지경그룹을 이끌고 계신 천 회장님께서 조금씩 손잡아 주시면 나중에 분명 도움 받을 일도 있을 거예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방은경이 온갖 굿을 해대는 동안, 천중명을 비롯한 네 명은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천중명은 덤덤한 얼굴로 세 명을 살폈다.
후계자가 되고 싶은 열망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고스란히 눈빛에 드러나고 있어서 어쩐지 유치한 놈들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방은경의 말이 끝나고 찾아든 침묵을 밀치며 문광그룹 차남인 송중대가 천중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크레인 기사를 구한 것도 그렇고, 전 직원의 정규직 전환, 직원을 함부로 대했다는 이유로 전자의 회장과 임원들을 해고한 것까지, 그렇게 해서 진짜 얻으려는 게 뭡니까?”
그의 질문은 도전적이었다.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정말 천 회장님이 비정규직 직원들과 우리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질문을 던진 송중대가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왼편의 박영철과 오른편의 윤세계를 돌아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우리와 그들이 다른 게 뭐죠?”
“에이, 말도 안 돼.”
기가 막힌 질문을 들었다는 것처럼 송중대가 상체를 뒤로 세워가며 천중명을 보았다.
“우리 아니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에요. 머리 달렸고, 팔 두 개, 다리 두 개 달린 것만 같지, 그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게 없다니까요.”
송중대는 생각조차 싫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능력이란 것도 없어요. 그런 게 있으면 자기들도 1년에 몇 억, 몇 십억씩 벌었겠지요. 임원들 보세요. 우리와 달라도 노력해서 그 자리 차지하잖습니까. 그런데 계약직이나 파견직 직원들은 솔직히 말해 이게 없잖아요. 이게!”
송중대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콕콕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일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사업하면 되는 거 아냐? 원숭이도 할 만한 일을 하면서 왜 우리더러 더 달래?”
파견직이나 비정규직 직원에게 수모당한 적이 있는지 송중대는 말을 하며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다.
“막말로 일하겠다는 사람 천지인 세상에서 단순한 일 대강 하고는 사는 건 우리와 같은 수준을 바라요.”
목청이 높아진 송중대를 향해 박영철이 눈짓과 함께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아! 질문을 해놓고 내가 또 흥분했네.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그 사람들 그래 봐야 고마운 거 하나도 모른다니까요.”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저런 놈에게 어떤 말을 한들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나 싶어서였다.
“진짜 왜 그런 겁니까? 급여 더 줘야 하고, 해고할 때 더 힘들고, 이익이 전혀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한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천중명이 웃는 것을 보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번엔 박영철이 나름 점잖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타워 크레인에 올라가는 것도 그렇고, 뭔가 노리는 게 있었을 것 아닙니까?”
박영철은 소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경계한 뒤에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우리 셋은 아직 후계자로 정해지지 못했으니까 이럴 때 힌트를 주시면 크게 도움 될 것 같은데요. 천호득 명예회장님께서 그런 걸 좋아하셨던가요?”
이런 질문을 이토록 진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천중명은 솔직히 놀랐다. 이놈들은 정말 자신들이 종자부터 다르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였구나 싶어서였다.
“박영철 부회장님.”
천중명이 부르자 그가 답을 기대하는 얼굴로 상체를 슬쩍 기울였다.
“자이로 텔레콤에 가입한 사람들의 평균 통신요금이 얼마나 됩니까?”
“3만4천560원입니다.”
그는 숫자를 외운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우리나라 계약직 직원들의 평균 임금은요?”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비정규직과 파견직이 많아질수록 소득이 줄어들고,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현금자산이 줄어듭니다. 주거비, 최소한의 식비, 의료비를 제외하고 사용할 돈이 없는데 누가 호텔에 가서 밥 먹고, 누가 3만 원대의 통신요금을 지불하겠습니까?”
송중대와 박영철이 떨떠름한 얼굴로 천중명을 보았고, 윤세계는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룹마다 임대업에 진출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월세 받고, 대형 마트 운영해서 유통 마진 챙기고, 통신비용에 TV 연결까지, 한 명이 태어나면 의식주를 해결하는 동안, 그만큼 그룹에 수입이 생길 겁니다.”
방은경이 굳어진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앞이었다.
“살기가 빡빡하니까 아이들을 안 낳는 거고, 그러니까 이번엔 값싼 노동자들을 들여왔습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요?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들이 번 돈을 우리나라에서 쓸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회장님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서 그 사람들이 쓸 돈이 있어야 우리도 돈을 벌 수 있다? 뭐 그런 말씀인 겁니까?”
송중대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한번 돌렸다가 다시 도전적인 시선을 가져왔다.
“그 사람들 없어도 우리 사는 데 전혀 지장 없어요. 아까 대형 마트 말씀하셨죠? 여기 윤세계 대표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말씀하신 것과 반대잖습니까? 값싼 물건 편하게 구입하는 거거든요. 유통 마진이요? 우리가 안 먹으면 제조업자들 배 터졌을 걸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송중대에게 박영철이 다시 눈짓을 보냈으나 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애새끼도 못 낳을 정도로 가난한 게 우리 잘못입니까? 우리가 강제로 피임을 시켰어요? 아니면 그 집에 가서 돈을 뺏었어요? 제 놈들 능력이 부족하니까 몸뚱이로 밖에 못 벌어먹는 게 왜 우리 잘못인 것처럼 그러십니까?”
“아이, 우리 송 전무님 또 흥분하신다. 잠깐 저랑 가세요. 내가 이번에 주연 맡은 아이 소개해 드릴게요.”
지켜보던 방은경이 움직여서 송중대의 팔을 가슴에 안고는 그를 일으켰다.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몸을 일으킨 그가 ‘첩의 자식 주제에.’라고 입을 움직이는 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너는 언제 나랑 둘이 좀 봐야겠지?
그때 네 그 잘났다는 몸뚱이가 얼마나 나약한 건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아야 세상이 무섭다는 것도 알게 되지 않겠냐.
천중명이 픽 웃은 다음이었다.
“이해하세요. 지난번에 운전기사가 고발해서 수모를 당한 게 있거든요. 방송에 나갈 뻔한 걸 억지로 틀어막기는 했는데 그때 앙금이 아직 남아서 저래요.”
윤세계가 애매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여기 불편하시면 우리 호텔에 가서 조용하게 한잔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오! 윤 대표가 웬일이야?”
“나, 천 회장님이 마음에 드는데?”
윤세계가 독특한 오른쪽 눈으로 색기를 풍겨내며 미소를 그려낸 다음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는 투로 박영철이 천중명을 보았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 다음에 하죠.”
굳이 허선영의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서 천중명은 점잖게 거절했다.
“그럼 다음 우리 모임에 꼭 나오세요. 연락드릴게요.”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방은경이 이번엔 얼굴이 조막만 한 데다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마른 여자와 함께 소파로 다가왔다.
“회장님. 이 아이 아시죠? 조소아. 지난번 드라마 대박 나서 보자는 분이 많은데 제가 특별히 회장님께 인사시키려고 데려왔어요.”
“안녕하세요?”
“앉아.”
답은 박영철이 했다.
“실례할게요.”
조소아는 송중대가 일어난 자리에 앉자 직원이 다가와 칵테일을 앞에 놓아주었다.
자리 더럽게 거북하네.
도대체 이런 모임이 왜 있는 거지?
“너, 지난번에 영국 갈 때 왜 연락 안 했어?”
“부회장님은? 문자 드렸는데 연락도 안 하고서!”
“그랬어? 문자 없었는데?”
“그때 스폰서 어쩌고 하는 기사 나와서 새로 개봉하는 영화 홍보도 못 하고 영국 간 거잖아요. 이왕 가는 거 부회장님 만날까 했는데 연락 없어서 많이 서운했었어요.”
아주 염병들을 떠세요.
더는 견디기 어려워서 천중명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천 회장님. 우리 바람 쐴까요?”
윤세계가 속을 읽은 것처럼 천중명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그럴 만한 곳이 있어요?”
“따라오세요. 우리 잠시만 실례할게요.”
윤세계가 일어서자 박영철은 오히려 반가운 얼굴이었고, 조소아는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는 여자 주인공처럼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눈빛 연기 오진다, 진짜.
천중명은 몸을 일으킨 뒤에 윤세계를 따라 바의 옆쪽에 있는 문을 향해 걸었다.
달칵.
밖으로 나서자 테이블이 세 개 있는 테라스가 있었다.
은은한 기름 초가 올려진 가장 왼편의 테이블을 지난 윤세계가 테라스의 난간에 왼팔을 기대고 섰다.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웨이브가 살짝 진 머리칼과 척 보기에도 명품이 분명한 원피스, 유명 브랜드의 목걸이와 백,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윤세계가 뭔가 끈적이는 시선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천 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관심 없는데 굳이 대꾸할 필요 있겠나.
천중명은 테라스에 양팔을 기댄 자세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왼편에 호텔, 앞으로는 고급 주택, 오른쪽으로는 후암동이 쭉 펼쳐져 있어서 풍광은 나쁘지 않았다.
불을 붙인 천중명이 연기를 뱉어낼 때 직원이 나타나 테이블에 처음과 똑같은 세팅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유진교는 이곳에서 천중명이 무얼 얻었으면 싶었을까?
태생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미친놈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라는 거였을까, 아니면 저 눈빛 묘한 여자와 친분 맺기를 원했을까.
“천 회장님은 연예인 관심 없어요? 아까 조소아 예쁘잖아요.”
“나는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다.”
“아! 그 의원 딸이요? 결혼할 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가 싶어서 천중명은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윤세계를 바라보았다.
“정치인으로 생명 끝난 사람이잖아요. 설마 그런 집안 딸과 진짜 결혼할 생각은 아닐 거 아녜요?”
“결혼할 생각인데요?”
“호호호! 정말 재미있네요! 모처럼 웃어 봐요!”
뭔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
과장되게 웃던 윤세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놀랐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결혼할 생각이세요? 말도 안 돼.”
네 눈은 말이 되는 거냐?
천중명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경그룹을 책임진 분이 그냥 들여앉히면 되는 건데 뭐 하러 결혼을 해요?”
“그럼 나는 누구와 결혼해야 합니까?”
“그룹의 발전에 도움 되는 사람이요.”
천중명은 픽 웃으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 염병할 모임, 이거로 끝이다.
가입비 아깝고 연회비 더럽게 속 쓰리지만,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우월주의에 사로잡혀서 주접떠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허선영이라고 그랬죠? 그 여자?”
테라스에 팔을 걸친 상태에서 천중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윤세계를 보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난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어두운 하늘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나랑 내기할래요? 내가 그 여자에게 적당히 보상해줄 테니 떠나라고 하면 떠날지, 안 떠날지요?”
천중명은 픽 웃으며 윤세계를 보았다.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당신 따귀를 갈길지 아닐지부터 내기하는 게 좋을걸!”
윤세계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이만 갈 텐데 그래도 테라스에 데려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고 하나 해주지. 돈을 위해 몸뚱이를 파는 저기 분 바른 여자애나 경영이나 후계자를 위해 상대방을 선택하는 당신이나 내겐 비슷해 보여. 그러니까 수작질은 상대를 봐가면서 해.”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끈 천중명은 테라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름 초의 불빛이 일렁인 다음이었다.
“수작질은 상대를 봐가면서 하라고? 재미있는데? 지경그룹 주인이면 상대를 제대로 고른 것 아냐?”
윤세계가 던진 혼잣말이 테라스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