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 지경의 가치는 상호 존중입니다 (2)
마당에 나와 오후의 햇살을 즐기던 천호득은 주머니에서 몸을 떨어대는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액정에 올라온 이름을 확인한 그는 이어셋을 꺼내 귀에 걸었고, 이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천호득 총수님. 나 조철행입니다.
“어허. 장관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모처럼 한가하시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맡은 일이 있다 보니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나야 뒷방 늙은이가 돼서 정원에서 시간이나 보냅니다. 그래, 우리 장관께서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천호득은 우선 넉넉한 음성으로 정통부 장관인 조철행을 상대했다.
- 저야 늘 시간이 부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VIP께서 워낙 활동적이신 데다 국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으셔서 몰려드는 일에 정신이 없습니다.
적당하게 자신을 과시한 조철행이 바로 말을 이었다.
- 총수님. 모르고 계신 것 같으니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로 회장에 오른 아드님께서 지경전자의 조승필 대표회장과 사장 셋, 부사장 다섯 명에게 해임을 통보했습니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전화의 목적을 알아들은 천호득은 이어질 내용에 신경을 집중했다.
- 나는 지경전자와 협력해서 유럽과 북미, 인도 시장의 개척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왔습니다. 그런데 담당 임원들을 이런 식으로 해임하면 당장 우리 정보통신부의 입장이 몹시 난처해집니다.
“그렇겠지요.”
- 아직 혈기왕성할 나이인 데다, TV에 나와 직원을 구했을 정도로 정의감에 불타는 점은 높이 삽니다. 그렇지만, 세상일이 또 그렇게 부러트려서만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허허. 우리 장관께서 많이 서운하셨던 모양인데 우선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본 뒤에 연락하겠습니다.”
천호득은 여전히 여유 넘치는 음성으로 조철행을 다독였다.
- 시간이 늦어지면 괜히 불편한 말만 돌지 않겠습니까? 총수님께서 신임 회장을 잘 다독여주시길 바랍니다.
“알아보겠습니다.”
- 그럼 보중하시고, 일간 뵙고 식사라도 하시지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귀에서 뺀 이어셋을 카디건의 주머니에 넣은 천호득은 뒤를 돌아보았다.
“따끈한 차를 한잔 마시고 싶다.”
“예에, 회장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장만섭이 생활 무전기의 버튼을 눌러 차를 주문했다.
‘어쩔 셈이냐?’
장만섭이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지켜보는 앞에서 천호득은 시선을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조승필이 장관의 사촌동생이란 사실을 천중명이 모를 리 없을뿐더러, 혹여 몰랐다고 해도 유진교와 최만호가 분명 알려주었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승필을 비롯해 사장과 부사장을 모조리 해임했다면 천호득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생각에 잠긴 천호득의 뒤에서 메이드가 장만섭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그가 먼저 맛을 보게 한 뒤에야 메이드는 천호득의 옆에 찻잔을 놓아주었다.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정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있어 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물론 조언하고 조율해줄 유진교가 있고, 최만호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천호득도 어찌 못하는 천중명을 그 두 사람이 말릴 수 있을까?
천호득은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매출이 30조가 넘는 회사의 대표회장과 사장, 부사장의 목을 단숨에 날려버렸다고?
하여간 배포와 강단, 결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호득이 다시 차를 한 잔 마신 뒤였다.
우우웅. 우우웅.
그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기가 또 울었다.
슬쩍 이름을 확인한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셋을 귀에 건 뒤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총수님. 유진교입니다.
“조철행 장관이 조금 전에 전화했었네.”
- 그럴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녁에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지.”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안 되겠다. 안에 말해서 달달한 커피를 달라고 해라.”
“예에, 회장님.”
“너는 몸도 성치 않은 놈이 꼭 그렇게 서서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해야겠어? 거기 의자도 있는데 앉아 있어도 되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총수님.”
“내가 안 괜찮다고! 내가!”
“저는 괜찮습니다, 총수님.”
“에이, 곰 같은 놈!”
천호득이 타박을 터트리는 뒤에서 장만섭은 태연하게 무전기에 대고 달달한 커피를 주문했다.
**
본사에 돌아오기 무섭게 홍보실장이 최만호의 방을 찾았다.
“언론사와 보도방송국에서 확인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지경전자의 임원 교체가 사실인지, 이것이 지경전자의 상장을 위한 포석인지를 확인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재킷도 벗지 못한 상태에서 최만호는 홍보실장이 전해준 자료에 시선을 주었다.
“지경전자의 임원 해임에 관한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통제해. 어떤 경우에라도 새로운 임원의 발령이 날 때까지는 관련 기사가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해.”
“예, 실장님.”
“지경전자에 연락해서 오늘 방문에 관한 내용을 내부통신망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일이 없도록 직원들을 단속하라고 지시하고, 홍보실도 자체적으로 인터넷 사이트들을 검색해.”
“예, 실장님.”
홍보실장을 내보낸 최만호는 혼자 남은 방에서 얼굴을 매만졌다.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일이었다.
막말로 신제품의 판매를 막아버리는 일 따위 장관 선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천중명 회장의 오늘 결정은 너무 성급했고, 즉흥적이었으며 무모한 수준이었다.
“하아, 거 참.”
그룹 회장이 지시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리는 것이 최만호의 역할인 것은 안다. 그러나 오늘 같은 경우에도 묵묵하게 따라야 할지, 아니면 유진교의 말대로 자리를 걸고 조언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전기자동차의 최고 기술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게 벌써 15년 전의 일이었다.
만약, 그 회사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면 아마 지금쯤 대한민국은 전 세계 전기자동차 생산의 선두주자가 되고도 남았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수출 주문을 받아 생산까지 마친 회사의 제품에 승인을 내주지 않아서 제품도 있고, 사겠다는 나라도 있는 회사가 부품대금과 급여를 밀려서 깔끔하게 공중분해 됐다.
거대 자동차 회사의 압력, 정부에 밉보인 것들이 뒤섞여 벌어진 슬픈 사연이었다.
차세대 배터리와 플렉시블 대형 모니터, 스마트폰 부품, 반도체 생산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면 지경전자 역시 비슷한 꼴로 몰락할 수 있었다.
“후우-.”
최만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주말이어서 유진교와 의논할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설마? 오후에 있을 코리아클럽에서는 별다른 일 없겠지?
없을 거야. 없어야 해.
최만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어떨 때 보면 얼음처럼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천중명 회장이 또 이럴 때는 무모할 정도로 과격한 결정을 내린다.
최만호는 솔직히 천중명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본사에 도착한 천중명이 급한 결재를 두 개쯤 마친 뒤였다.
지이잉.
[회장님. 통화가 괜찮으실까?]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며 박승양의 문자를 올려놓았다.
뻔뻔한 인물의 대명사인 그가 이렇게 조심스러운 문자를 보내다니, 속이 얼마나 타면 이럴까 싶어서 천중명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그런 뒤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 천 회장님. 바쁘신데 방해한 건 아니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 천 회장. 오늘이 금요일인 건 아시지? 내일과 모레 장이 놀아요.
천중명은 그가 염려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포지션을 정해놨다가 주말에 예상하지 못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괜히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이 만기니까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 그러시지? 그런 거 맞지요? 우리 천 회장이 계산 없이 이럴 분이 아닌데 나 같이 돈을 굴리는 사람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 어쩐지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또 그게 힘듭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
“하아-.”
박승양의 숨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마치 천중명의 귀에 직접 입을 댄 것처럼 실감 나게 들렸다.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천 회장 믿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묘한 부담을 천중명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선물 만기일에 다 끝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 그럼 한 달도 안 걸리는 일이군요? 알았어요. 내 지켜보고 있겠소. 그리고 4조, 아시지? 4조. 그거 내 통장에 잘 있으니까 필요하시면 언제고 말씀합시다.
“고맙습니다.”
- 자, 그럼 바쁘실 테니 이만 끊습니다. 천 회장님. 나는 천 회장님을 진짜! 진짜! 진짜!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중명에게 부담을 얹어댄 박승양이 전화를 끊었다.
천중명이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유진교가 들어왔다.
“잠시 시간 되십니까?”
“안 오셨으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앉으세요.”
천중명은 소파를 가리킨 뒤에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둘이서 소파에 앉은 다음이었다.
“언론에서 해임과 관련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연신 전화가 걸려오고, 지경전자의 상장을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잠자코 유진교의 보고를 들었다.
“회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룹을 반으로 갈라서라도 자리를 보전하려 했다는 지적을 하셨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유진교가 굵직한 음성으로 건넨 질문에 천중명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먼저 어둠에서 보았던 내용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자칫 말이 흘러나가면 홍콩물고기 황채산에게 대응하려던 천중명의 계획이 새나갈 수도 있었다.
침묵을 대가로 고민하던 천중명은 마음을 굳혔다.
의심할 바엔 함께 일하지 말고, 함께 일하려면 믿어라.
당할 때 당하더라도 유진교 같은 인물을 의심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본부장님.”
“예, 회장님.”
“조승필 회장은 홍콩물고기라는 황채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형을 총수로 내세워 나를 밀어낼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지경을 반으로 갈라 홍콩물고기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을 했었던 것으로 압니다.”
역시 유진교는 당황하는 표정 따위 내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이 전에 없이 깊어진 것만은 분명하게 보았다.
“이하연이라고 돌아가신 큰형님이 만났던 병아리 탤런트가 지경건설의 주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꼭 저를 만나 넘기겠다고 하는 것 역시 성추행 따위의 추문을 덮어씌우기 위한 계략입니다.”
“그 계획에도 조승필 회장이 관여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답을 한 천중명은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편안한 자세로 다시 입을 열었다.
“프랑크 증권이 금감원에 1조 원의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신고서를 넣었습니다. 우리 금감원은 그걸 그저 과시용쯤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입니다.”
“다음 주에 있는 선물 만기일에 말입니까?”
천중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론 5조 원가량의 주식을 매각할 예정이라는데 아마 숨겨진 수가 있겠죠. 이 모든 것이 나를 지경에서 밀어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유진교의 볼이 씰룩했다.
“박승양 회장에게 5조 원의 돈을 준비하라고 했던 이유입니다. 뭐라고 해도 내가 유보금을 굴리면 수익이 나든, 손실이 나든, 언론과 금융 당국의 타깃이 될 테니까요.”
“회장님께서는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전에 내가 함께 계획을 들어보자던 황성규 씨를 통해 알아낸 정보들입니다.”
시선을 테이블로 떨어트린 유진교가 무언가 결심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의중을 알게 돼서 좀 더 제대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심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말을 꺼내놓지 않았다.
“나는 이제 코리아 클럽에 가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말한 내용은 우선 본부장님만 알고 계십시오.”
“총수님께만은 말씀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눈과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천중명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는 어차피 말씀드릴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코리아클럽에 가시려면 지금 일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함께 일어날까요?”
소파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재킷을 걸치고 유진교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테이블 앞에 쭉 서 있는 부속실 직원들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이었다.
“회장님. 노파심에 당부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천중명을 향해 유진교가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코리아클럽은 가십거리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장소입니다. 감정을 최대한 감춰 주십시오. 그리고 지경그룹의 명예를 지켜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당부를 전한 유진교가 고개를 숙일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코리아클럽이라는 게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사교모임이나 재벌 2세들의 돈지랄만 하는 곳은 아니란 의미일까?
천중명은 엘리베이터의 바깥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가보면 알게 될 텐데 뭘 걱정부터 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