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17화 (117/315)

# 117

117. 지경의 가치는 상호 존중입니다 (1)

점심을 먹은 천중명은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지경전자의 생산공장은 백색가전, 모니터, 컴퓨터의 생산공장 3곳과 반도체를 생산하는 화성공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화성 공장으로 향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천중명은 자료를 천천히 훑었다.

말이 좋아서 33조7천억 원의 매출이지 물량으로 따지면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물론 중국, 베트남, 인도의 현지 생산을 포함한 금액이긴 하다만, 그렇더라도 지경전자는 매출이나 고용 면에서 적지 않은 포지션을 차지한 계열사였다.

최만호가 조수석에 앉았고, 유진교가 운전석 뒷좌석에 앉았는데 승용차 안의 분위기는 묵직했다.

장서문 부사장의 해임에 이어 영통대리점에 내려온 특별 감사 김준동 전무까지 파면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방문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중명은 지경전자의 파일을 내려놓은 뒤에 이번엔 지경화장품의 파일을 들고 내용을 살폈다.

한 마디로 광풍 수준이었다.

선금을 걸어놓고 물건을 기다리겠다는 고객들의 요청이 줄을 이었고, 매장마다 ‘미라클’을 확보하기 위한 매니저들의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였다.

천중명은 지경화장품의 올해 예상 매출 수정안을 살폈다.

생산설비를 풀가동했을 경우에 3천2백억 원의 매출에 영업이익 9백억 원을 상회 하는 수준이었다.

누구보다 손도운의 반응이 궁금해서 천중명은 잠시 고개를 들었고, 그에 반응하듯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던 유진교가 시선을 주었다.

“지경화장품의 매출이 이 정도라면 손도운 개발자가 얻는 수익이 100억 정도 되겠네요.”

“보고는 받았습니다. 이중성 대표가 회계정산표를 넘겨줬을 때 호흡 곤란이 와서 꽤 놀랐던 모양입니다. 벌써 해외에서 상담이 들어온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잘 됐다. 잘된 일이다.

고생한 개발자들이 이런 식으로 성공을 거둘수록 새로운 제품이 개발될 테고, 그런 제품은 다시 수익으로 돌아온다.

“33조7천억을 팔아서 7백억의 손실을 보는 회사와 3천억의 매출에서 9백억 원의 이익을 내는 회사, 둘 중 어느 쪽이 이득일까요?”

천중명의 질문을 받은 유진교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경화장품이 그동안 현상유지 수준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을 통한 자금, 디자인, 그 외에 기념품 구매 등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만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유진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작년 지경전자의 단기손실은 모니터 부분과 백색가전에서 발생한 손실에 반도체 생산설비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생산시설이 완비되면 조 단위의 수익이 가능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똑 부러지는 유진교의 답이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본부장님이 그룹 회장을 맡으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천중명이 툭 던진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로 입을 열었다.

“그룹을 이끌어가는 자리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듣기에 불편하실 수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많은 임원들은 회장의 출신을 따지기도 합니다.”

생각했던 것이 있는지 그는 막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고개 숙여 모시는 분이 정통성이 있기를 바라는 심리가 아닌가 싶은데, 그런 면에서 저는 그룹의 회장을 감당할 재목은 아닙니다.”

“내 생각에 본부장님은 누구보다 잘 해내실 것 같은데요?”

“직감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제겐 없습니다. 거기에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질 결단도 부족합니다.”

지금 유진교가 내놓은 대꾸가 예상과 달라서 천중명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그룹을 이끄는 회장의 가장 큰 역할인데 저는 정해진 방향으로 달려가는 역할에 특화된 사람입니다.”

진심인지 겸손인지 모를 대꾸를 건넨 유진교가 흥미로운 눈으로 최만호를 바라보았다.

“기획실장은 어떤가? 자네는 그룹을 이끌 자신이 있나?”

“제가 가장 잘 사용하는 핑계가 회장님의 지시에 따르라는 말입니다. 계열사의 대표회장들 역시 주어진 환경 안에서 능력을 발휘할 때 가장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만호의 답을 들은 유진교가 다시 천중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룹 계열사의 대표회장쯤 되면 프라이드가 대단합니다. 매출, 회장님으로부터 받는 신뢰, 자기 직계 직원들의 충성심 따위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유진교는 부연설명처럼 계열사 대표회장들의 생리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계열사는 그들에게 있어 작은 왕국입니다. 실적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동안은 경영하는 방식을 존중해 달라, 내 사람을 인정해 달라, 아마 그런 심정일 겁니다.”

천중명은 다른 말없이 묵묵하게 들었다.

유진교가 주는 조언에 관한 최소한의 예의였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면서 천중명은 조승필을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경전자라는 자신의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천중명을 몰아내고 천상기를 내세울 계획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것도 지경그룹의 계열사를 절반이나 날려가면서 말이다.

천중명을 몰아낸 뒤에 결국 그 역시 천상기와 함께 제 마음에 안 드는 임원들을 가차 없이 내쫓을 거면서 말이다.

천중명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모든 게 홍콩물고기 황채산의 음모와 연결된 일이었다.

천중명이 그를 상대할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승용차는 화성의 공장으로 들어갔다.

경비원들이 입구 앞에 늘어서서 경례로 천중명이 탄 승용차를 맞아들였고, 뒤따라오는 비서실 차량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임직원들이 쭉 나와 있었다.

승용차가 회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를 그려놓은 사각형의 공장 앞에 멈추자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천중명이 먼저 내렸고, 반대쪽과 조수석에서 유진교, 최만호가 차에서 내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조승필입니다.”

아이비리그 출신이며, 해외 통이라는 조승필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투박한 생김새였다.

곱슬머리에 뭉툭하고 살짝 휜 코를 가졌고, 눈매에는 고집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마치자, 조승필은 주변에 서 있는 세 명의 지경전자 사장과 다섯 명의 부사장을 소개했다.

입구에서 인사가 끝났다.

“먼저 생산시설을 둘러보시도록 준비했습니다.”

조승필이 말을 마치자 직원 몇 명이 안전모를 들고 다가왔다.

규정이 그렇다면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

안전모를 쓴 천중명을 시작으로 조승필과 임원들, 유진교, 최만호가 생산시설이 있는 1층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거대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없는 규모였다.

라인마다 로봇이 움직이고, 그 사이에 직원들이 서서 전체를 통제하는 형태였다.

“1층에서는 대형모니터와 컴퓨터, 가전제품의 핵심 부품을 생산합니다. 이곳에서 만든 부품을 중국, 인도, 베트남으로 보내는 방식이어서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천중명을 힐끔 살폈다가 얼른 생산 라인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뉴스를 보면 직원들에게 다가가서 이거저거 물어보던데 굳이 부담 주기 싫어서 천중명은 조승필이 안내하는 대로 걸으며 내부시설을 살폈다.

2층과 3층은 반도체 생산시설이었다.

격리된 창밖에서 안을 훑어보는 형태로 견학을 마친 천중명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있는 브리핑 룸으로 움직였다.

거대하고 길쭉한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천중명이 앉았고, 왼편에 최만호, 오른쪽에 유진교, 그리고 그 바깥쪽으로 조승필과 지경전자의 임원들이 자리했다.

브리핑 룸 역시 워낙 넓은 규모여서 앞에 놓인 얇은 마이크를 통해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브리핑 자료, 녹차, 물병, 주스, 컵을 준비하는 동안 사흘쯤 냉장고에 던져놓았던 시루떡을 꺼내놓은 것처럼 분위기는 딱딱하고 거북했다.

“잠시 차를 드시고, 그 뒤에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빨간 불이 들어온 마이크에 대고 조승필이 차를 권했다.

천중명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브리핑 룸을 둘러보았다.

굳은 표정의 임원들 앞에서 브리핑을 위해 대기한 30대 중반의 직원 두 명, 그 외에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세 명과 정장 차림의 여직원 두 명이 천중명의 허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천중명은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린 뒤에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브리핑을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직원들은 자리에 앉아주세요.”

쇳소리가 묻은 듯한 천중명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브리핑 실을 메웠다.

“오늘 내가 지경전자 화성공장을 방문한 것은 이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상황을 종료하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말을 건넨 천중명은 좌우로 앉은 지경전자 임원들을 천천히, 그리고 한 명씩 쭉 둘러보았다.

노골적으로 조승필의 편이라는 감정을 내세우는 인간, 중간인 척하는 인간, 그리고 분위기에 압도당한 인간들 사이에서 직원들은 시선을 떨군 채 있었다.

“그룹을 책임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투른 점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짚고 넘어야 할 부분을 소홀하게 해서 나중에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승필 회장님.”

천중명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조승필을 부르고는 그만큼이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브리핑 룸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 앞에서 그는 대꾸 없이 시선만 주었다.

천중명은 시선이 마주친 상태에서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조승필 회장님.”

그런 뒤에 천중명은 다시 그를 불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회의실을 삽시간에 짓누른 다음이었다.

“예, 회장님.”

조승필이 마이크로 상체를 숙여 답을 내놓았다.

“장서문 부사장을 징계하지 않은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미 해임하셨습니다.”

그의 답을 들으며 천중명은 완벽하게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삐딱하게 나오기로 작정한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상기를 앞세워 천중명을 밀어내려 한 사람이며, 임원들이 함께 있는 브리핑 룸에서 대놓고 반항한 사람이었다.

결정은 났다.

배에 칼을 감춘 인간을 곁에 두고서 천상기와 손을 잡도록 놔둘 마음도 없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브리핑 룸에서 천중명은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경의 가치는 상호 존중입니다. 직급이 높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생각 따위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조승필의 볼이 씰룩했다.

“조승필 지경전자 대표이사 회장을 지금 이 시간부로 해임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브리핑 룸을 꽉 누른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 속에서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승필 대표이사 회장과 뜻을 같이하는 임원분이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천중명의 말이 스피커를 통해 울린 직후였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조승필이 독한 눈으로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회장에 오르셨다고 세상일을 너무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나와 여기 있는 임원들은 회장님이 유흥을 즐기는 사이에도 밤과 낮, 가족들을 잊은 채 지경전자를 지켜낸 사람들입니다.”

차마 개망나니 짓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조승필의 눈에는 경멸의 느낌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렇군요.”

천중명은 냉정하게 조승필의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밤과 낮, 가족을 잊은 채 일하는 동안, 직원들은 숫자를 외우거나 특정 음료를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대리점에 인간적인 정책을 선택한 뒤에 좋은 성과가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장서문 부사장은 지경전자의 매출을 위해 악역을 맡았을 뿐입니다. 인간적인 대우는 대리점 직원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조승필이 항의하는 투로 말을 마친 직후였다.

“개 같은 소리 좀 집어치워.”

천중명의 거친 대꾸가 뜻밖이었는지 그는 순간 멍해진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상급자인 내 권위에 도전하면서 당신들의 권리는 인정받고 싶어? 매출을 위한 악역? 당신 딸이 직장에 나가서 소름 끼치도록 싫은 임원과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려야 한다면 그게 매출을 위한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천중명이 건네는 말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조립 라인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직원들이 하찮아? 아니면 고객을 상대하며 계약서에 도장 받는 매장 직원들이 우스워? 내가 여기 있는 임원들의 정강이를 걷어차도 매출만 오르면 되는 거야?”

“말씀을 삼가십시오.”

조승필의 도발적인 대꾸에 천중명은 픽 웃었다.

“나이 어린 나에게 반말을 들으니까 언짢습니까? 인격적으로 나오면 나도 인격적으로 대우해 드립니다. 직원들을 그렇게 대우하지 못한다면 나에게서도 똑같은 대우를 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말문이 막혔는지 조승필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조승필 회장님. 그룹을 찢어서라도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분이 지경전자를 위해 밤과 낮, 가족을 잊은 채 일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승필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천중명은 다시 한 번 브리핑 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설프게 누군가를 앞세워 반기를 들려고 했던 분들은 이번에 알아서 사직하세요. 다음번에 남는 건 해임밖에 없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

볼을 씰룩이거나 마른침을 삼키는 임원은 있어도 입을 여는 임원들은 없었다.

천중명이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나와 여기 임원들이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면 지경전자가 온전히 운영될 것 같습니까?”

조승필이 마지막 무기라는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런 직후에 그가 눈 끝에 그려낸 야비한 미소를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홍콩물고기나 사촌형인 장관, 그리고 천상기, 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확실히 믿고 있는 눈치였다.

“다들 조승필 회장의 의견에 동의하는 겁니까?”

천중명의 질문에 답은 없었다.

어디 어떻게 나오는지 보겠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이 정도로 임원들을 장악했으니 천중명을 밀어내겠다는 계획도 세웠겠지.

“오해하는 게 있나 봅니다. 지경전자는 한두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직원들 전체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본부장님. 지경전자의 조승필 회장을 비롯해서 이 자리에 참석한 임원 전체를 해임합니다. 그렇게 처리하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가 무겁게 답을 하는 순간에 ‘어?’하는 놀라움과 함께 몇몇 임원의 눈가에 후회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선 뒤에 조승필을 바라보았다.

홍콩물고기를 믿고 설쳐?

매운탕에 함께 처넣어주마.

얼떨떨한 그의 눈을 보며 피식 웃어준 천중명은 브리핑 룸의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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