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16화 (116/315)

# 116

116. 다들 그런 회사 가지고 싶어 했잖아? (3)

삼성동의 빌라에 도착한 천중명은 밥통에 있는 뜨끈한 밥과 묵은 김치, 달걀 프라이, 거기에 된장국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지경그룹 회장이라는 이미지에 비하면 소박하다 못해 추레한 저녁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제 손으로 밥 차려 먹는 게 부끄러울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기본을 잊지 않고 싶었으며, 마지막으로 소박한 집 밥이 그리워서 차려 먹은 저녁이었다.

허선영이 늦을 것을 짐작하고 들어온 길이었다.

기본을 잊지 않고 싶어 차린 저녁이어서 밥을 다 먹은 천중명은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쳤다.

싱크대에 행주를 곱다랗게 걸어놓은 천중명은 서재로 들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이제는 다시 홍콩물고기 황채산을 상대할 방법을 연구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나씩 짚는다.

주가지수 선물은 종목이니 뭐니 고르고 자실 것 없이 달랑 그놈 하나밖에 없다. 거기에 옵션이라는 놈도 오르는 놈, 내려가는 놈 둘이 전부고.

당최 고민될 이유가 전혀 없는 수준이었는데 문제는 주식이었다.

홍콩물고기가 주식을 매각한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주식을 매각할지 종목을 알아야 대처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막말로 지경건설을 매도할 줄 알고 대기하고 있는데, 엉뚱한 종목을 매도하면 주문을 바꾸는 순간에 장이 끝날 테고, 그러면 아무리 대기하고 있었어도 말짱 꽝으로 끝난다.

허세직을 이용하면 금감원에 넣었다는 프랑크증권의 매각신청서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는 말이 새나갈 위험이 있었다.

이럴 때 천중명에게는 큰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어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다음 주 목요일 옵션만기일에 프랑크 증권이 주식을 5조 원 가까이 매각하겠다고 신청서를 넣었답니다. 그 종목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알고 싶습니다.”

- 내일 오전까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충분합니다.”

황성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에 천중명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 서수미, 오상구는 구속이 확정되었고, 그 외에 타워크레인을 조작했던 현장 소장은 살인미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다만, 오지은은 내일 풀려날 것으로 보입니다.

황성규가 현재 진행 중인 내용을 알려주었다.

“형은 어떻게 되었나요?”

- 꽤 높은 선에서 천상기 회장을 빼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태라면 내일 오전에 오지은과 함께 구속을 피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계속 주시해 주세요. 그리고 말씀드린 금감원 자료는 확보되는 대로 문자로 알려주세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다시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일정을 살폈다.

다음 주 목요일은 네 마녀가 동시에 심술을 부린다는 쿼드러플 위칭데이(Quadruple Witching Day)여서 어차피 금융시장이 혼란한 하루였다.

복잡할 것 없이 저놈들이 돈 해먹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천중명의 작전은 간단했다.

장 마감 직전에 홍콩물고기가 던진 5조 원의 주식을 그대로 사들인다. 놈들이 “어? 어?”하며 당황할 때, 이쪽에서 다시 5조의 주식을 추가로 매입하면?

5조 받고 5조 더!

카드 게임에서 레이스를 날리듯 주문을 더 넣는 순간, 저쪽은 그 주문 하나에 거덜 나고, 박승양은 30배의 수익을 얻는다.

계획은 이런 데 말이지.

천중명은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만지며 계속해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두 가지 문제가 남았다.

하나는 이 방식이 회사의 유보금을 이용해야 하고, 거기에 시장을 교란해서 이익을 얻었다는 이유로 조사 대상이 된다는 점이었다.

홍콩물고기가 던진 5조를 받기만 하고 끝내면?

소위 남는 게 없어서 박승양에게 약속한 2조5천억 원은 천중명이 생돈을 토해내야 한다.

그룹 유보금 2조5천억 원을 사채 이자로 지불할 경우, 천중명은 그룹 내 반발과 사회의 지탄을 받아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별, 먹지도 못할 생선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명분이 필요했다.

저쪽이 5조 원가량의 주식을 매도하는 타이밍에 천중명이 10조 원에 가까운 주식을 사들일 명분,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만한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천중명은 계속 눈썹을 매만졌다.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할 것도 아니고, 느닷없이 어둠이 저놈들의 회의장면을 보여 주었다고 떠들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승양이 넣어야 하는 돈이 5조라는 것도 걸렸다. 30배의 수익이야 이론상 가능한 숫자라 치자.

그런데 세 배만 수익이 난다고 해도 15조의 돈이 들어온다.

15조라는 돈의 단위가 이해가 되나?

연 1퍼센트의 예금 이자만 받아먹어도 천오백억 원의 돈이니까 한 달로 치면 대략 120억 원이고, 하루로 따지면 4억 원을 써야 없어지는 돈이다.

매일매일 하루에 4억을 죽어라고 써대야 돈이 불지 않는 원금이라니.

천중명은 픽 웃은 뒤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15조에 국내외 기관, 개미들의 돈까지를 포함되어 있는데 문제가 생긴다.

박승양에게 1조만 넣으라고 하면 홍콩물고기는 얼마나 손해를 볼까?

“에이, 개새끼!”

아니지, 물고기라는데 개새끼는 좀 이상하지?

“어쩐다?”

홍콩물고기를 노리고 휘두른 주먹에 우리 기관과 개미들까지 얻어맞아 죽게 생긴 꼴이어서 천중명은 팔다리를 묶인 채 싸우는 느낌마저 들었다.

뭔가 있을 텐데.

아무리 악한 상황이라도 절벽에서 곽대출의 멱살을 움켜쥐고 뛰어내린 것과 같은 방법이 무언가 있을 거다.

천중명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현관의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간 천중명의 앞에서 곽대출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둘만 있어. 편하게 해.”

“선영 씨는 아직이셔?”

“요즘 매일 늦어.”

“얼른 씻고 옵니다.”

곽대출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모처럼 봉지 커피를 만들었다.

“아, 이게 얼마만이야, 회장님?”

세수를 마친 곽대출이 편한 옷으로 나와 홈 바에 다가왔다.

“우리 이런 거 너무 오래되지 않았냐?”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아. 언제 하루 시간 내서 지리산을 다녀오든가 해야지, 사람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더라고.”

그렇게 둘이 마주 앉은 뒤에 곽대출이 먼저 영통대리점의 일을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회식하자는 걸 적당하게 둘러대고 돌아왔지. 거기 직원들 감동의 도가니였다니까. 믿고 가보자. 으쌰, 으쌰. 이런 분위기, 아시지?”

보람을 느끼는 곽대출을 향해 천중명은 퇴근 직전에 어둠이 보여 주었던 장면을 전했고, 이어서 이하연과의 통화, 최만호와 나누었던 대화를 차례로 들려주었다.

“나야 선물이니 옵션이니 전혀 모르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무서운 거야, 회장님?”

“숫자놀음으로 하는 도박판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딱 맞다. 우리가 좀 불리한 도박이지. 저쪽은 홍콩에서 설치니까 현행법이고 뭐고 빠져나가는데 나는 꼼짝없이 묶일 수밖에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시던 곽대출이 퍼뜩 생각난 게 있는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조승필이가 회장님을 노리고 있다는 거잖아? 햐, 요 개새끼를 어떻게 때려잡지?”

“그건 내가 내일 알아서 하면 되고.”

“어련히 잘하시겠습니까마는, 두고두고 화근이 되는데 천상기를 굳이 끌어안을 필요 있겠어?”

마침 커피를 마시느라 천중명은 답을 하지 못했다.

“회장님은 모른 척하셔. 내일이라도 나오면 내가 휠체어 태우고 산책하다가 슬쩍 용인의 저수지에 밀어 넣지 뭐. 에고고! 미끄러졌네! 끝! 어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런 말을 곽대출이 하니까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좀 지켜보자.”

“그러셔.”

둘이서 그렇게 모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선영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네, 곽 이사님은 오늘 일찍 퇴근하셨나 보네요.”

곽대출이 있어서 천중명은 미소로 허선영을 맞아주었다.

그 뒤로 셋이서 앉아서 한 30분쯤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결국은 회사 이야기가 주였다.

시간이 벌써 새벽 1시였다.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곽대출이 먼저 방으로 향한 덕분에 천중명은 허선영을 가볍게라도 안아볼 수 있었다.

“너무 지치지 않게 해.”

“네, 회장님.”

웃으며 답하는 허선영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천중명은 아쉬운 마음을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오전에 출근한 천중명은 가장 먼저 유진교에게 전화를 넣었다.

“본부장님. 오후 2시 지경전자 방문에 최만호 실장과 함께 가셨으면 하는데 시간 어떠세요?”

-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시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계속해서 결재 서류를 살폈다.

11시쯤이었다.

지이이잉.

휴대전화기가 울리면서 문자가 떠올랐다.

[프랑크증권이 매각신고서를 낸 종목은 ST전자와 조강스틸, 미래자동차의 세 종목입니다. 다만, 매각신청 금액은 1조 원이었습니다.]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곧바로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혹시 프랑크 증권 외에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신고한 다른 증권사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나요?”

- 전부 확인했습니다만 다른 신고 내용은 없었습니다. 참고로 금융감독원과 증권거래위원회에서는 매각신고서에 관해 그다지 크게 비중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 놓친 부분이 있는지 오늘부터 범위를 넓게 뒤져보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버릇처럼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매만졌다.

가뜩이나 변수가 많은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어둠이 이제는 헛것을 보여 주는 건가?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준비를 해도 주식이나 선물은 짐작하지 못하는 변수까지 염려해야 한다.

막말로 10조 원어치의 주식을 샀는데 전 세계가 놀랄 테러라도 발생하면 선물과 주식에 배팅한 돈이 싹 날아가는 황당한 꼴을 당하게 된다.

이 물고기 새끼가 뭘 어쩌려는 거지?

오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중명은 우선 결재해야 할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

박승양은 자존심이 팍 상했다.

1조 원이다, 1조 원.

천하가 짜르르하게 알아주는 박승양이 시키는 대로 증권사 계좌에 1조 원을 입금했는데 그 돈이 고스란히 계좌에서 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닐 테고, 혹시 전에 천상기, 강승애와 손잡은 것에 대해 복수하려고 이러는 건가?

그러고 보면 막말로 증명서 하나 받아놓은 것 없이 말 한마디 믿고 1조 원을 덜컥 계좌에 넣은 꼴이었다.

“하아! 이건 뭐가 뭔지!”

골프를 함께 즐기는 변호사 중 한 명이 차용증도 받지 않은 채 돈을 빌려주었다고 한탄하는 꼴을 보았는데 생각해 보니 사채업자인 박승양이 그 흔한 현금보관증 하나 받지 않은 꼴이었다.

빌려준 돈을 떼이게 생긴 피해자들을 상담할 때마다 왜 차용증을 받지 않았냐고 질문하던 변호사야 차용증 없이 돈 빌려줄 수 있다.

그런데 박승양은 사채업자다.

돈을 떼인 것도 아니고, 계좌설정까지 해서 박승양 말고는 돈을 빼낼 수 없게 해놓았으니 나중에 법정에 가서 떠들어 봐야 동정표도 못 얻을 일이 아닌가 말이다.

명동의 사채를 싹싹 긁다시피 마련한 5조 원이라는 돈 덕분에 박승양은 하루 이자 17억 원을 생으로 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이자를 무는 돈 중 4조 원은 통장에서, 1조 원은 증권사 계좌에서 놀고 있었다.

17억 원? 아후! 그 돈이면 얼마를 더 버는데?

점심으로 그 좋아하는 특 회덮밥을 주문해 놓고도 박승양은 그걸 반도 채 먹지 못했다.

소태를 문 것처럼 입이 쓰디써서 당최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거 내가 진짜 미친 짓을 한 거 아냐?”

심지어 겁도 덜컥 났다.

여기에서 돈을 빼낸 뒤에 그깟 이자 이틀 치 34억 물어주면 깔끔하게 끝난다.

박승양은 초고추장에 벌겋게 비벼진 특 회덮밥을 내려다보며 물 잔을 들어 물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입을 헹구듯 물을 굴린 뒤에 삼켰다.

“후-.”

이건 좀 아니다.

박승양은 휴대전화기를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나다. 천중명 회장은 어떠냐?”

- 점심 먹은 뒤에 지경전자를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거길 왜?”

- 내부적으로 조승필 지경전자 대표회장이 천중명 회장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혹시 뭐 투자회사라든가, 증권사를 들른다거나 하는 건 없어?”

- 그 후에 일정은 전혀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남부증권에도 주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알았다. 계속 알아보고 연락해라.”

- 예, 회장님.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은 박승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물러나서 34억 손해 보고 끝내, 아니면 일단 170억까지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열흘을 기다려? 어떻게 해?

내내 박승양을 흔들어대던 본능은 어쩐 일인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박승양은 숨을 몰아쉰 뒤에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이틀 치 이자 34억만 물어주면 여기에서 끝내겠다고 문자를 넣어볼까 싶어서였다.

[회장님. 박승양입니다. 혹시 계획에 문제가 생긴 거면….]

거기까지 문자를 입력했던 박승양은 툭 휴대전화기를 테이블에 던졌다.

그랬다가 정말 34억을 돌려받고 끝났는데 한 달 뒤에 천중명이 5조를 벌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화병으로 쓰러지고 말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꼼짝없이 놀면서 하루에 17억씩을 내야 한단 말이다.

“에흐! 이 씨!”

돈을 빌려주고 이렇게 애가 닳아본 적은 박승양이 태어나서 맹세코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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