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 다들 그런 회사 가지고 싶어 했잖아? (2)
참 오랜만에 나타난 어둠이었다.
그래서인지 끈적이며 몸을 감싸는 느낌이 반가울 지경이었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심정이기도 했다.
물을 뿌린 창을 통해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열린 빛줄기 속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두른 회의실이었다.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둘러앉은 다섯 사람 모두 처음 보는 인물이어서였다.
“천중명과 손을 잡은 박승양이 남부증권에 1조짜리 파생계좌를 열었습니다. 담당자인 이명선은 과장으로 승진했고, 박승양은 명동을 탈탈 털다시피 해서 예비자금으로 4조를 준비했습니다.”
곱슬기가 많은 머리칼을 한 남자가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안경을 위로 들며 내용을 전했고,
“지경건설에서 2조5천억 원의 파생계좌를 따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필요하다면 추가로 투입할 예정으로 보입니다.”
그의 맞은편에 있는 서른 중반의 남자가 좌우를 둘러보며 지경건설의 계좌에 관해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강 7조5천억 원짜리 싸움이 된다는 건데 그쪽은 어때요?”
리더인 듯한 인간이 질문을 던지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자료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 저 인간을 어디에서 봤는데?’
고개를 갸웃했던 천중명은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언젠가 곽대출과 함께 곱창전문점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그래! 너 화서투자증권 조기대!
“프랑크 증권에서 금감원에 매도 신고는 해두었습니다. 금융감독원은 외국계 증권사의 공매도를 제한하려는 조치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기대의 의견에 나머지 네 명이 야비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있는 선물결제일 장 마감 직전에 우리가 보유한 주식 5조 원을 동시에 매각해. 그러면 선물에서 30배, 옵션 풋에서 100배 정도의 수익이 생긴다. 천중명이 단순하게 선물 싸움이라고 판단할 때 그의 뒤통수를 제대로 갈기는 거지.”
리더인 인간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천중명이 콜에 걸어둔 7조5천억은 물론이고, 한국의 증권사와 개미들의 돈을 단숨에 쓸어 담는 거지.”
중앙에 앉은 매부리코의 남자가 지시를 내리자 나머지 네 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금융감독원에서 조사가 나올 겁니다. 당분간 한국 파생상품 시장이 주저앉다시피 할 테니까요.”
“그래 봤자야. 어차피 제대로 조사하려면 1년 이상 걸릴 테고, 한국의 증권거래법대로 주식을 매각할 거란 계획서를 제출한 거라 문제 될 것도 없어.”
매부리코는 단호했다.
“오히려 주식 매각신청서를 우습게 생각했던 금융감독원이 사건을 덮으려고 쉬쉬할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동안 교수들에게서 받은 교육 덕분에 천중명은 단박에 그들의 계획을 알아들었다.
선물과 옵션인 파생상품으로 시선을 끌어들여 천중명이 선물 가격이 오르는 쪽에 돈을 배팅하게 만든 뒤에, 단박에 현물을 팔아서 선물을 고꾸라트리겠다는 전략이었다.
물론 헤지를 통해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아차했다가는 꽤 크게 당할 뻔한 음모였다.
선물마감일에는 거래종료 후 10분의 여유를 준다.
그 마지막 순간에 주식을 냅다 5조 원가량 매도하면 파생상품에 투자한 기관과 개인은 손쓸 방법이 전혀 없다.
도망갈 구멍도 없어서 저들이 세워놓은 덫에 걸린 채 그야말로 인생 끝장나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온다.
100만 원짜리 주식은 100만 원에 산다.
그런데 선물과 옵션은 100만 원짜리를 10만 원에 사는 꼴이다.
게다가 상한가나 하한가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10만 원을 투자했는데도 손실은 백만 원 이상이 나올 수도 있다. 최악에는 증권사에 90만 원의 생돈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이 새끼들은 돈에 미친 거구나.
천중명이 둘러앉은 놈들의 얼굴을 외우기 위해 쭉 둘러보았을 때였다.
“또 한 번 홍콩 물고기의 전설이 한국에 떠들썩하게 퍼지겠습니다.”
조기대가 아부성 강한 멘트를 내놓자 가운데 앉은 매부리코를 한 인간이 별거 아니란 투로 웃었다.
“천중명이란 어린애가 제법 설치는 모양인데 그놈에게 금융시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고, 이 바닥의 주인이 나라는 것쯤은 알려줘야지.”
“그럼 지경그룹은 이거로 끝내실 생각입니까?”
이번엔 곱슬머리가 던진 질문이었다.
“조승필에게서 연락이 있었어. 지경전자 회장. 이번에 지경그룹에서 손실 난 부분을 떠들어달라고 하더군. 조건은 지경의 계열사 절반을 넘겨주겠다는 거니까 나쁘지도 않지.”
“우리만으로 가능합니까?”
“조승필이 천상기를 앞세우겠다고 하니까 괜찮을 것 같지? 거기에 내가 프랑크 증권, 비엔피 투자운용의 마이클, 그 외에 아시아 투자청까지 끌어들일 테니까 조만간 지경그룹은 반쪽이 되겠지.”
홍콩 물고기 황채산의 설명을 들은 네 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조승필은 장관의 사촌 동생입니다. 조만간 그가 천상기를 이용한 뒤에 버릴 테니까 결국 그가 지경그룹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군요.”
“나야 그런 것에 관심 없으니까 됐고, 여기 있는 사람끼리 적당한 거 하나씩 나눠 가지면 되지 않아? 다들 그런 회사 가지고 싶어 했잖아?”
천중명은 기가 막혀 픽 웃었다.
개새끼들이 뭘 어쩌고 해서 뭘 하나씩 나눠 가져?
천중명이 다시 한 번 네 놈을 쭉 돌아볼 때였다.
“오늘 중으로 이하연이 천중명을 만날 거거든. 조승필이란 양반이 야비한 쪽으로 작전은 정말 좋아. 그를 만난 뒤에 이하연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떠들기로 했다더군.”
“그게 먹힐까요?”
“천봉서가 죽기 전에 이하연에게 지경건설의 주식을 넘겨줬어. 이번에 주가가 한창 오를 때 팔았어야 하는데 멍청한 년이 욕심부리다가 헛물만 켠 꼴이 됐지.”
“주식을 받아주었다고 해서 천중명이 욕먹을 일은 아니잖습니까?”
“천중명은 죽은 천봉서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이하연의 요구대로 웃돈을 줄 거고. 그럼 그 웃돈을 받는 조건으로 사무실에서 관계를 가졌다고 떠드는 거지.”
곱슬머리와 조기대가 음흉한 눈빛으로 웃었다.
“우리가 준비한 돈이 얼마나 되지?”
“대략 10조가량입니다.”
“소문내지 말고 7조를 풋에 계속 밀어 넣어. 그러면 천중명은 콜에 7조5천을 넣어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할 거야. 그 돈을 선물 마감일에 싹 끌어오면 끝나는 거지.”
네 놈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이번 일은 삼합회와 야쿠자들의 자금도 들어와 있으니까 경고하는데 입소문 내는 사람은 다음번에 이 회의에 참석 못 해. 개인적으로 욕심이 나서 1억쯤 넣는 것까지는 말 안 할 테니까 그 정도 수준으로 끝내.”
“감사합니다.”
“1억이야. 더 넣었다가 수익이 300억을 넘어가면 금감원에서 내부자 거래라고 걸 수 있으니까 너무 욕심부리지 마.”
“염려하지 마십시오.”
답이 들리면서 어둠이 화면을 서서히 덮었다.
끈적이는 어둠이 천중명을 완전히 뒤덮은 뒤에 다시 세상이 밝아졌다.
천중명의 손에 구내전화기가 들려 있었고, 내선 1번을 누르려던 참이었다.
우선 전화를 받고.
천중명은 내선 1번을 누른 뒤에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천중명입니다.”
- 이하연이에요. 회장님께 꼭 만나서 이야기할 게 있어요.
“번거로우니까 통화로 말하든가, 아니면 기획실장을 만나서 하세요.”
- 천봉서 회장님 이야기라 꼭 회장님과 하고 싶어요. 제가 지경건설의 주식을 가지고 있거든요.
“흠.”
천중명은 이하연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직한 신음을 터트린 뒤에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독하게 나서면 저것들이 눈치 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고, 반대로 만난 뒤에 이하연이 언론에 떠들어대면 사실과 관계없이 추문을 뒤집어쓰게 된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주에 시간을 만들어서 비서실을 통해 연락하지요.”
천중명이 답을 건넨 다음이었다.
- 밖에서 만나는 건 제가 얼굴이 알려져서 곤란하니까 회장님 집무실이나 호텔에서 뵀으면 해요. 호텔을 원하시면 제가 예약해 놓을게요.
목소리만 들어서는 이렇게 순진한 년이 없다.
“그럽시다.”
-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최만호 실장이 있으면 불러줘.”
[알겠습니다.]
인터폰에서 손을 뗀 천중명은 집무실 유리 앞으로 걸어가 왼손으로 창을 짚은 채 빌딩 사이로 뚫린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가지면 만족이라는 감각이 없어지나?
지경전자만 해도 대표이사 회장의 1년 연봉이 70억 수준인데 그걸 받으면서도 더 욕심나는 건가?
지랄들도 참.
천중명은 독해지는 눈빛을 풀기 위해 눈을 몇 차례 껌벅였다.
돈에 미친 개새끼들을 상대하는데 인상까지 쓸 게 있겠나.
달려들면 그냥 단숨에 주둥이를 위아래 잡아서 찢어주면 그만인 거지.
똑똑똑.
그때 집무실의 노크 소리가 들리고 최만호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예, 잠깐 사적인 의논이 있어서요. 그리 앉으세요.”
소파로 향하며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미숫가루 좀 남았나?”
“예, 회장님.”
“우리 그거로 좀 주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속실 직원이 나가자 천중명은 소파에 앉았다.
“퇴근하려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최만호가 시선을 던질 때 부속실 직원이 미숫가루를 탄 음료 잔을 들고 들어왔다.
아마도 적당량을 미리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이하연과 통화했었습니다. 돌아가신 큰형님이 건넨 주식을 넘기고 싶은 모양입니다. 건설 주식이라면 주식거래를 통해 매각이 가능할 텐데도 굳이 만나자는 것을 보면 웃돈을 요구할 생각으로 보입니다.”
최만호는 단박에 말귀를 알아들은 얼굴로 천중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하연과 큰형님을 연결한 누군가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소위 뚜쟁이라는 사람이요. 그 사람을 찾아주세요.”
“회장님. 비서실에 그런 부분을 관리하는 직원이 있습니다.”
천중명의 요구에 최만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공연히 외부에서 직접 만나시다가 소문날 것을 염려해서 직원이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직원을 만나서 마담을 데려오겠습니다.”
“조용하게 처리됐으면 합니다. 내가 만난다는 소문이 나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다음 주까지는 비밀이 유지됐으면 싶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이하연에게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마 목요일 전에 저를 보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그 마담이라는 여자를 화요일 전에 만날 수 있도록 처리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님. 내일 저녁에 가실 코리아클럽에 마담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혹시 방은경이라는 중년 탤런트를 아십니까?”
“그 여자가 문제의 마담입니까??”
“네, 회장님.”
천중명은 기가 막혀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여자 정도 되면 그런 짓 하지 않아도 살만하지 않나요?”
“일회성 만남을 주선하면 대략 3억 원을 받는데 방 마담이 그중 절반을 가져간다는 소문입니다. 그 외에 돈이 필요한 여자 연예인들이 먼저 찾아와 다리를 놔달라고 요구한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만약 코리아클럽에 그 여자가 나오면 오히려 일이 쉽겠네요. 그럼 우선 내일 저녁 모임에 나가보고 그곳에 나오지 않으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지요.”
말을 마친 천중명은 미숫가루가 담긴 잔을 들어 반쯤을 마셨다.
이 음료에 담긴 것은 8년을 임시직으로 일하는 아들을 바라보던 노모의 정성이었다. 그리고 그 정성을 마실 때 천중명은 기본을 잊지 말아 달라는 나이 든 어머니의 당부를 듣는 것 같은 책임감을 느꼈다.
“회장님. 그러지 마시고 이하연을 아예 외면하시면 어떠십니까? 우리가 모른 척하면 저쪽도 알아서 주식시장에 주식을 팔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있겠죠. 대신 돌아가신 큰형님은 죽은 뒤에도 추문을 뒤집어쓸 테고, 그 지저분한 것들의 최종 목표가 우리에게 향할 수도 있을 테지요. 그걸 막아보고 싶습니다.”
입술에 힘을 준 최만호가 입맛을 다셨다.
“주식회사 지경의 유보금으로 주식을 매입하려면 그건 문제가 없습니까?”
“금융투자는 특별한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종목에서 5퍼센트 이상의 주식을 매입하면 다음 날까지 금감원에 지분 취득 신고만 하면 됩니다.”
“자금 이동을 지경증권으로 소문나지 않게 이동할 수 있나요?”
“은행에 있는 계좌를 지경의 증권계좌와 연동해 놓으면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순간에 바로 이동되고 주문도 가능합니다. 마침 지난번에 지경건설 주식 매입을 하느라 이미 지경증권에 주식회사 지경의 계좌도 있습니다.”
그나마 일이 조금은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계좌를 연계해 놓으세요.”
“예, 회장님.”
“지경증권이 자체적으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여력은 얼마나 됩니까?”
“그건 확인해 봐야 정확한 수치가 나올 것 같습니다. 펀드에 담겨 있는 자금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어서 순수 여유 자금만 가능합니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오늘 의논한 내용이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도록 주의해주세요.”
“예, 회장님.”
“늦은 시간에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의미 있는 미숫가루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대화가 끝난 것을 눈치 챈 최만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회장님.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좀 뒤에 퇴근할 테니까 놔둬.”
“예, 회장님.”
잔을 치운 부속실 직원이 나가자 천중명은 책상 뒤로 걸어가 이제는 어스름하게 변해 하나둘 불이 켜진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300배의 수입을 처먹겠다고?
개새끼들.
300배의 손실이 나면 어떤 꼴을 할지 한 번 보자.
홍콩 물고기?
회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인지는 모르겠는데, 전설이고 지랄이고, 매운탕으로 그 빌어먹을 이름이 끝났다는 슬픈 사연을 남겨주마.
천중명은 어둠이 깔리는 도심을 보며 피식 웃었다.